인연은 정말 질기게 이어진다
"프엉(Phoung), 정말 오랜만이에요. 우리가 얼마 만에 만나는 거죠? 한 7년, 8년은 됐나 보다. 그렇죠? 어쩌면 이렇게 그대로예요?"
"진~짜 오랜만이네요. 그런데 정말로 얼마 전까지 만났던 것 같은 기분이에요. 잘 지내셨죠? 법인장님이야말로 이전하고 똑같으시네요." 프엉(Phuong)도 내 반가운 인사에 기분 좋은 반응을 보여주었다. 한국에서 나에게 1개월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속성으로 베트남어를 알려주던 나의 첫 베트남어 선생님, 프엉(Phuong). 이제 그녀의 이름이 베트남 사람들이 좋아하는 붉은색의 꽃이라는 뜻 정도는 알고 있다. 꽃이 너무 많아서 나뭇가지가 휘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흐드러지게 피는 꽃이다. 8년 전, 한창 춥던 12월의 겨울, 한국의 한 대학교의 행정실에서 프엉(Phuong)을 처음으로 만났다. 빠르게 베트남어를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을 구하다가 소개받은 프엉(Phuong)은 그 대학교의 대학원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있던 석사 과정의 학생이었고, 방학 기간 동안 학교 행정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방학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는 대학교 건물의 빈 강의실을 옮겨 다니며 베트남 생활과 베트남어를 배웠다.
그 뒤, 나는 바로 베트남으로 발령을 받아 나오게 되었고, 나의 첫 베트남어 선생님 프엉(Phuong)은 한국어와 베트남어를 통역하는 전문 통역사가 되었다. 한국과 베트남의 국제행사에도 모습을 나타내고, 정치인들, 공무원들이 한국과 베트남에 방문하면 그녀가 옆에 서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한국에서 만난 베트남 남자와 결혼하여 하노이에 들어와 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 몇 년 되었는데, 코로나라는 이유로, 또 바쁘다는 이유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다 이번엔 하노이 출장이 잡힌 김에 내 책을 전달하겠다는 약속을 잡고 만나게 되었다. 만나기로 한 날, 아침부터 하노이에는 비가 내린다. 북쪽이라 그런지 살짝 쌀쌀한 기운이 있다. 이른 아침, 비행기를 타고 하노이의 노이바이 국제공항에 내려 조그마한 현대의 i10 택시를 타고 프엉(Phuong)이 있는 하노이 시내까지 이동했다. 좁은 3층 건물의 2층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프엉(Phuong)은 택시에서 내린 나에게 그녀가 보이는 건물로 후딱 뛰어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차가운 비는 무게감 있게 내 얼굴과 어깨를 때린다. 난 후다닥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가서 8년 전과 같은 모습으로 서있는 프엉(Phuong)에게 반가운 악수를 건네며 안부를 물었다.
"저 지금 촬영 중인데 금방 끝나니까, 구경하시면서 잠깐만 여기 기다리세요." 프엉(Phuong)이 촬영팀과 함께 동영상을 찍으며 나에게 얘기했다. 프엉(Phuong)은 하노이 시내에 있는 한 한국어학원의 원장님이다. 학생들의 한국어 회화에 필요한 동영상을 주말마다 한꺼번에 찍어서 매일같이 올리고 있다고 한다. 난 옆에서 사진을 찍으며 구경하다가 함께 촬영을 하기도 했다. "자, 여러분! 오늘은 베트남에 살면서 한국에 베트남을 소개하는 책을 쓰신 작가님을 모셨습니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베트남을 소개하는 이 책은 어떻게 쓰게 되신 거죠?"
"자, 그럼 마지막으로 질문하나 드릴게요. 지금 이 영상을 보시는 분들은 한국으로 유학을 생각 중인 베트남 학생들이 많을 텐데요, 어떻게 하면 한국 생활을 잘할 수 있을지 조언 하나 해주시겠어요?"
"프엉(Phuong)도 베트남 사람으로서 한국에서 살아봤고, 저도 한국 사람이지만 베트남에 살고 있어요. 그리고 여러분도 곧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지내게 될 거예요. 충분히 준비하고 가는 것인 만큼 잘 지내실 수 있겠지만,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한국에 대한 선입견은 살다 보면 분명히 바뀌게 될 겁니다. 서로 잘 모를 때 신기했던 것들은 익숙해지면서 별것 아닌 게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익숙해진 뒤에 보게 되면, 사는 것은 다 비슷합니다. 다만 서로의 문화 차이를 인정하며 지내면 더 쉽게 적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갑자기 촬영을 부탁해서 놀라셨을 텐데, 정말 잘하셨어요." 촬영을 마치고 프엉(Phuong)이 칭찬을 해줬다. 함께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책에 대한 얘기, 그리고 그동안 살아왔던 얘기를 나누었다. 프엉(Phoung)은 어학원을 하면서 유학원도 함께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베트남에서 살 만하니?'라는 책을 썼다는 소식을 듣고서 베트남에 너무 잘 적응한 것 같아 기뻤다고도 했다. "그러게. 이 책이 정말 많은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것 같아요. 어릴 적 친구, 학교 선생님, 멀리 떨어져 지내던 친척들, 또 프엉(Phuong)까지 이렇게 다시 연락될 수 있게 해 주네요." 실제로 책을 출판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여러 감동적인 감상을 전달해주기도 하였고, 비즈니스가 이어지게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책이 작가에게 주는 또 다른 힘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점심을 먹는 중에 비가 그친 모양이다. 바닥은 아직 젖어있지만 이제 어두운 구름이 걷히면서 조금씩 더운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오늘 너무 반갑고 감사했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호치민으로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식당을 나서며 프엉(Phuong) 선생님이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