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맑은돌 Aug 04. 2024

우리가 만났었다는 표식

너를 기억하는 방법

회사의 힘들었던 한 사건이 정리되며 지난 몇 달간 함께 일하고 고생해 주었던 매니저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하루 날을 잡고 회사 근처에 새로 생긴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회사는 베트남의 호치민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삼십 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넓고 휑한 고무나무 밭을 지나면 나오는 시골지역의 공단에 위치해 있는데, 이 구석진 시골에 한국 음식을 하는 식당이 생겼다. 한국인 남편과 베트남 부인이 함께 운영하는 곳인데, 이제 막 생겨서 아직 간판이나 메뉴판도 다 정비되지 않은 곳이었다.


아무것도 붙어있지 않은 통유리로 된 투명한 미닫이 문을 '지이익'하고 오른쪽으로 밀어내며 안으로 들어가니 4인용 테이블이 6개 정도 놓인 작은 식당 내부에 우리를 위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매니저들과 나까지 15 명 정도니까 우리만으로도 식당이 가득 차버렸다. 한국 남자 사장님이 요리한 닭백숙을 메인으로 테이블 가운데에 올려놓고, 또 베트남 여자 사장님이 요리한 베트남 음식들도 올려놓고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닭은 질기다. 베트남에서는 질긴 닭의 식감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한국보다 질긴 종의 닭을 키우고, 또 더 오래 키우는 편이다. 한국 출장자들 중에도 이런 종류의 닭 질감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다. 토종닭, 산닭 느낌이라며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난 아니다. 베트남 직원들과도 식사를 하는 도중에 이런 음식 문화의 차이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난 밥을 먹다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려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중간에 '꽝'하고 멈춰버렸다. 내 오른손이 입구의 투명 통유리에 부딪친 것이다. 난 앞의 유리가 너무 넓고 투명해서 문이 열려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밖으로는 푸른 잎이 가득한 기다란 고무나무가 보였고, 그렇게 중간에 유리문이 닫혀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서 고무나무만 보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중간엔 유리문이 있었다. 유리문은 높이가 2미터 정도였고, 너비는 70~80센티정도였다. 그런 문 4개가 미닫이 형태로 입구에 달려있었다. 빠르게 달린 것도 아니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는데, 내 오른손이 유리문의 아랫부분을 치자, 내 손과 부딪친 유리문이 동그랗게 뻥 뚫리더니 통유리가 위에서부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무래도 강화유리가 아닌 일반 유리인가 보다.


단두대에서 칼이 내려오는 것처럼 빠르게 떨어졌지만, 내 눈에는 아주 천천히 내려오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순식간에 왼손 손바닥으로 위에서 떨어지는 기다란 유리를 밖으로 밀쳐냈다. 그리고 왼편의 손바닥에서 피가 조금 흘렀지만 큰 상처는 아니었다. 반면에 유리에 구멍을 낸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는 큰 상처가 났고 끈적한 점도를 가진 검붉은 색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바로 차를 타고 근처 병원으로 달려갔다. 나와 동갑인 여자 총무 매니저가 동행했고, 통역 직원도 차를 타고 함께 이동했다. 내 몸에서 이렇게 많은 피가 나오는 것을 처음 본 것이라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차분하게 근처의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여 의사를 기다렸다.


호치민 한인타운의 한국 의사가 있는 병원으로 가고 싶었지만, 이미 저녁시간이라서 시간이 맞지 않을 것 같았고, 일단은 빠르게 응급 처치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골 병원 응급실에 앉아있는데, 총무 매니저가 들어와서 걱정 말라며 사탕을 주고 갔다. 빨간색 봉지에 들어있는 '홍삼맛캔디'였다. 아마 한국 식당에서 가져왔나 보다. 손이 아픈데 좀 웃겼다. 그러다 의사가 들어왔는데, 완전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턱에 수염을 다 깎지 않은 것 같았는데, 검붉은 얼굴에 턱과 인중에는 깎다가 만 것 같은 흰 수염이 보였다. 그는 흰 의사 가운을 입고 와서 우리 회사의 통역 직원을 불렀다. "이거 꿰매야 한대요. 본인이 잘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말고 잠깐 누워있으면 된답니다." 그렇게 믿고 가만히 있으려고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 의사는 엄청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의료용 돋보기 같은 것을 추가로 들고 와서 손에 들고선 내 상처를 보기 시작했다. 또 담배냄새가 폴폴 나는 의사의 거친 손가락은 내 상처를 만지며 아래위로 떨리고 있다. 그렇게 돋보기를 4개나 쓰고 있고, 손을 떨고 있는 베트남 시골의 할아버지 의사가 내 손을 처치하고 있는 중이다.


손에서 유리 조각들을 제거하고 소독약을 마구 뿌려댄 뒤에 'ㄷ'자 모양으로 찢어진 오른손 검지 손가락과 엄지 손가락 사이를 꿰매기 시작했다. 마취를 해서 크게 아프진 않았는데, 그래도 따끔따끔한 느낌은 내 눈과 손가락 사이의 피부를 통해 징그럽게 전달되었다. 이를 이겨내고자 홍삼맛캔디를 먹으며 10 바늘정도 꿰매지는 과정을 온전히 지켜보고 있었다. 의사는 잘 되었다며 거즈를 덮어두고 일어났다. 그리고 간호사가 와서 상처를 다시 보고 소독을 했다. 병원의 진한 소독약 냄새가 의사 손에서 나던 담배 냄새를 가려주었다.


'이제 일어나면 되는 것인가?' 싶을 때 의사 선생님이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내 앞에 앉더니 처치 도구를 또 꺼내기 시작했다. 조금 더 해야 한다고 했다. 아까는 1차적으로 조치를 한 것인가 싶었다. 그리고는 상처부위를 덮고 있는 거즈와 내 살을 같이 꿰매기 시작했다. 네모난 거즈 모양을 따라서 나의 살과 거즈를 붙여주었다. 어려서 본 영화 '마농의 샘'에서 좋아하는 여자(마농)의 리본을 가슴에 꿰매던 한 남자가 생각나기도 했다. 이게 맞는 것인가 싶기도 했지만, 태어나서 처음 이런 처치를 받아본 것이라 그냥 있기로 했다.



"이게 뭐예요?" 다음날 찾아간 푸미흥 한인타운의 한 피부과에서 만난 한국 의사는 나에게 반문했다. "제가 뭐 아나요? 어제 베트남 시골 병원에서 이렇게 해줬어요." 본인은 거즈랑 피부를 함께 꿰매는 이런 시술을 처음 본다고 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걸까요?" 서로 답을 모르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아마 외국인이 와서 너무 잘하려고 하다가 이런 거 아닐까요? 드레싱도 못하게 이걸 왜 다 꿰맨 거지? 아무튼 이거 다 풀러야 하겠네요." 의사는 스스로 결론을 낸 뒤에 다시 처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다음날엔 어제 꿰맨 실바늘을 다시 풀어내는 시술을 받아야 했다. 시골의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은 나의 고통이 두 배가 되도록,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일 년이 지났다. 아직도 오른손에는 그날의 사건이 흉터가 되어 남아있다. 나중에도 이 흉터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볼 때마다 생각이 날 것 같다. '그래, 내가 한때는 베트남에 살았었지, 그때 너무 힘든 일이 있었는데, 그 일 처리하고 회식하다가 이 흉터가 생긴 것이지. 그때 담배냄새 폴폴 나는 할아버지 의사가 돋보기 4개나 사용하면서 꼼꼼하게 꿰매주셨지. 나보고 아프지 말라면서 홍삼맛캔디를 준 직원도 있었지.'


그래, 사는 건 이렇게 힘들고 아팠는데, 어쩌면 재미도 있었더랬지.

매거진의 이전글 경호원이 좋아한 자두맛 파인애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