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즐거운 방학의 시작이다.
선생님께서 안전하고 즐거운 여름방학의 안내에 이어 통지표와 탐구생활을 주셨다.
방학 때 탐구생활도 꾸준하게 해야 하고 통지표는 부모님의 확인을 받아서 개학 때 제출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래도 금방 방학이라며 즐거워하는 친구들의 목소리로 교실은 왁자지껄했다.
나는 그 새를 틈타 통지표를 받아 드는 순간 기분이 좋아지고 고개를 숙이며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들고 친구들을 둘러보니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받아 든 통지표는 안내장과 함께 탐구생활 속에 끼우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선생님의 종례는 끝났고 집에 가려고 친구들과 운동장으로 나오니 오늘따라 비가 오려는지 갑자기 하늘이 뿌예지고 있었다.
우산도 챙기지 않고 학교에 왔는데 하늘의 움직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방학의 시작이라며 모두 비명을 지르며 우산이 없는 빈손을 걱정하지 않았다.
이제 방학이라 아침부터 버스를 놓칠까 떨어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뜰 이유도, 엄마 잔소리를 들을 이유도 없게 됐다.
그 먼 십리 길을 걸어서 다닐 필요도 없고 또 겨우 한 시간에 한 대가 오는 그 버스를 문방구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면서 학교 앞 평상에 앉아서 기다릴 일도 없어졌다.
친구들은 방학이라 입꼬리는 광대뼈에 닿을 지경인데 와야 하는 버스는 오지 않고 겨우 한 시간에 한 대 그것도 하루에 몇 번 오지도 않는 버스는 왜 이리 더딘지...,
오늘도 어디서 또 펑크 나서 기사 아저씨가 버스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친구들과 약속이라도 한 듯, 문방구 할아버지의 눈치를 피하고 싶었든지 한 명, 두 명 일어나 아이스 깨끼 통 뚜껑 열며 얼음주머니를 꺼내고 아이스 깨끼를 하나씩 꺼내서 입에 물었다.
친구들 모두 그렇게 하나씩 입에 물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다.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고, 자신에게 주는 유일한 선택권인데 어쩌면 약속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또 굳이 말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우리 집 가는 신작로에는 자갈돌이 큰 게 울퉁불퉁 나뒹굴고 있고, 버스는 사흘 들이 고장인데 운전기사 아저씨께는 흔히 있는 일처럼 보였다.
우리가 버스를 기다리기 싫은 것보다는 10원으로 아이스 깨끼를 사 먹고 싶어서 걸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들의 표정은 이것이라도 물고 걸어가야 신이 나고 또 간혹 버스를 타는 것이랑 아이스 깨끼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버스가 바로 올 시간인데도 아이스 깨끼에 손이 갔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덥기는 덥고 버스는 오지 않고 하늘은 시꺼멓게 구름이 모여 놀고 있어서
하늘은 더 꺼멓다.
그렇게 모두 입속의 달콤하고 시원함을 위안 삼아 걸었는데 대낮의 더위는 금 새 아이스 깨끼를 녹이기에 충분했다.
아이스 깨끼를 순간 삼켜버린 게 서운했는지 아이들은 입을 다시 열고 수다를 떨며 한참을 걸어가는데 먼저 보였던 까만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시야를 막으며 억수 같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연습도 없이 굵기가 일정하게 앞도 보이지 않고 내는 비에 금방 물이 불어 신작로는 몇 개의 작은 산맥처럼 패였다.
나는 통지표가 혹시 젖어서 엄마에게 보여드리지 못할까?
탐구생활을 러닝 속에 넣고 또 고개는 처마 끝 모양 접어서 숙이며 막 달리기 시작했다. 옷이 젖어 검정 만년필로 쓴 선생님의 글씨가 조금이라도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나의 작은 생각이었다.
잉크로 통지표에 써주신 성적이 지워지면 안 되고 엄마도 보여드려야 하고 또 도장을 받아서 선생님께 제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의 첨벙거리며 뛰는 모습을 보니 계곡에서 노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계곡 물속에 들어간 듯 온몸을 흠뻑 적시면서 달리는 기분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렇게 달리기를 몇 분하고 어떤 친구는 재밌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가기도 했지만 난 그냥 빙그레 웃기만 하고 막 뛰어갔다. 빨리 가야 비도 덜 맞고 옷 속에 탐구생활과 통지표도 엄마에게 보여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뛰었기 때문인지 4킬로를 뛰면서 순식간에 집에 도착했고 엄마는 방에서 이불을 꿰매고 계셨다.
살짝 웃으면서 옷 속에서 꺼풀이 젖은 탐구생활 속에서 통지표를 꺼내 엄마께 내밀었다.
엄마는 언제나 동생에게만 관심이 많았는데 오늘도 별 내색 없이
"네 방에 갖다 둬라." 이렇게 말씀하시곤 갈아입을 옷을 내주시고 밥을 주셨다.
그러시고는 아무 말씀 없이 바느질을 계속하셨는데 그런 엄마가 싫었다.
'잘했다, 칭찬도 없이 아무 말씀도 없이...,‘
동생이 이런 통지표를 받아 왔으면 어떤 모습으로 대하셨을지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통지표를 한 번 더 보고 말리려고 방바닥에 펼쳐놓은 채 피곤한 탓인지 잠이 들었다. 곤하게 자고 깨어보니 엄마는 방에 계시지 않았고 저녁 준비를 하시는지
부엌이 아닌 집 뒤 뒤편 아궁이에서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이 맑게 개었고 맛난 생선 굽는 냄새와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찌르고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젖은 운동화는 아궁이 옆 온기 때문인지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엄마는 내가 잘 때 아마도 운동화를 씻어서 말려놓은 모양이었다.
통지표도 제대로 보시지 않고 관심도 없는 듯해서 서운한 마음이 있었는데
엄마의 환한 미소를 보니 잠든 사이에 펼쳐놓은 통지표와 탐구생활을 보신 모양이었다.
하늘도 맑아지고 엄마도 활짝 웃으시고 엄마의 사랑이 아궁이의 온기처럼 나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날따라 더 엄마 등 뒤에서 신이 난 듯 조잘거렸고 아궁이 속 불꽃은 엄마의 사랑만큼이나 활활 타오르고 얼굴도 홍조 빛을 띠면서 나의 환한 미소는 비를 막으려고 숙였던 턱 위에 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