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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지 Aug 01. 2023

저마다의 성장, 저마다의 성숙

   1990년 첫 발령지에서 신규발령교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학교를 방문하신 장학사님은 다른 선생님들의 애로사항을 물으시면서 나름의 학급경영 노하우를 전달하셨다.

  내가 신규발령받은 특수학급 교사라는 것을 들으시고는 ‘바보들의 행진에는 별로 할 말이 없고....’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듣는 다른 교사들도 심지어 나 역시도 그 말에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고 조용히 장학사님의 이어지는 말씀을 들었다. 선배들에게 익히 들어서 알고 있던 상황이었으니까 그 말에 별다르게 이의를 다는 일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특수교육을 전공한 교사가 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학교에 뇌병변장애학생과 지적장애학생이 입학을 했다. 아무 교재도 없고 제시되는 교육방법도 없고 따뜻한 주변의 시선도 없이 공립초등학교에서의 특수교육 1기가 시작되었다.


  실수투성이였다. 고백하건대 흑역사다.

  보호장구 착용이 서툴러 교실을 이동하다가 넘어져 턱을 찧은 아이를 둘러업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건 예삿일이었다. 한글과 숫자를 익히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운동장 달리기를 하면서 아이들과 나는 천천히 특수교육의 현장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도 딱히 갈 곳이 없었던 아이가 입소한 시설에 면회를 다녀오던 날, 그때 넘어져 다친 상처가 흉터가 된 턱을 가리지 않고 온 얼굴의 근육을 다 모아서 반갑게 웃으며 아이는 내 앞에서 전화로 안부를 묻는 아빠와 통화하는 중간중간 내게 장난스러운 눈짓을 했다.

  수화기 너머로 ‘선생님, 여전히 예쁘냐?’ 묻는 아빠에게 “아줌마야~” 하면서 큭큭 웃던 아이. 결혼 후 첫 아이를 안고 남편과 함께 가서 만나보고 온 나의 첫 제자였다.      


  2001년, 안산에서 근무하시며 장애학생들이 차별받지 않고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장애학생의 개별화교육프로그램, 일반학생과 함께 하는 통합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학교 현장에 보급하는 활발한 교육활동을 하시던 선생님 한 분의 과로사 소식을 들었다. 급성 백혈병이었다. 특수교사들은 모두가 애통해했지만 거기까지였다.


  2007년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특수교육 현장에서도 해묵은 숙원사업 한 가지가 해결되었으니 이제 꽃길만 걸으면 될 것 같다는 희망이 가득했었다. ‘장애’를 가진 이유 하나만으로 사회적으로 말 못 할 차별을 받아야 했던, 그것이 감히 ‘차별’이라는 말도 할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나의 학생들과 그 부모님들에게 이제 세상 밖에 조금은 폭신폭신한 길이 준비될 거라는 기대감이 마음을 설레게 했었다.     


  교육청에서 장애인차별 금지법안에 대해 설명하는 연수를 받으면서 ‘설렘’의 마음에 조금씩 ‘우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갔다. 법안을 만들기 위해 산정된 단어들이 하나같이 차갑고 딱딱하게 일상을 단정 지으며 서술되어 있었으므로 대다수의 참석자들은 우려가 섞인 질문을 했다.    

 

   “사람들은 아직까지 자신들이 장애인을 대상으로 사용하는 단어와 발언이 이렇게까지 심각한 차별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안내도 없이 계도기간도 없이 이런 일상의 많은 부분들에 대해 장애인 차별법 적용을 하게 된다면 오히려 역차별 문제가 불거지지 않겠는가?”      


  그때 법안 설명을 하시던 분은 아주 복잡한 눈빛과 억양으로 말씀을 하셨다. 정확한 워딩을 기억해 옮기지는 못한다. 그저 당시에 내가 그분의 설명과 답변을 들으면서 이해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입법하는 과정에서도 논의되었던 사안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장애인들이 받은 차별의 강도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높았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예상되는 모든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반대편의 지렛대를 아주 강하게 눌러서 장애인 차별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이었습니다. 반대편의 지렛대를 아주 세게 눌러버리는 법안이기 때문에 반드시 부작용은 나오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해법을 찾으며 가야 한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의 가실 길이 험난할 것으로 예상되어서 죄송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들이 차별받지 않으며 사는 사회로 가기 위해 선생님들께서 큰 한 축의 역할을 담당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특수교사 연수를 받을 때 또 한 분의 특수교육 선배께서 말씀하셨다.      

 

  “선생님들은 이제 소송에 대비하셔야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 오던 모든 교육활동은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모델로 삼아서 가고 있는 미국 교육의 현실이 지금 그렇습니다.”     


  학생이 교실에서 보이는 ‘문제 행동’ 때문에 학교 생활에 어려움이 있다는 설명을 하면 보호자는 ‘문제 행동’이라는 표현에 이의를 제기했으므로 ‘장애학생의 문제 행동 수정’이라는 표현도 ‘적응행동 지원’에서 ‘긍정행동 지원’으로 바뀌어갔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용어의 변경도 바람직한 움직임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 차별’ 반대편의 지렛대를 꾹 누르는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특수교사들에겐 ‘공무상 비밀 유지’ 의무와 ‘인권 보호’를 위해서 모든 어려운 상황에 입을 다물고 조용히 지원을 하는 길을 찾는 일이 주 업무가 되어갔다.      


  2년 차 어여쁜 교사가 심각한 도전 행동을 하는 아이에게 얼굴을 심하게 깨물려서 치료를 받으러 다니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수업 중 생긴 일은 오롯이 교사의 책임이고 장애 학생의 문제 행동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교사의 미숙함에서 비롯된 일이므로 공무상 질병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답을 보면서도 말하지 못했다.


  특수교육지도사가 급식지도 중 질식위험이 있는 음식을 삼키고 있는 아이의 입 속에서 음식물을 꺼내다가 깨물려서 손가락이 잘린 사건도 있었다. 다행히 그분은 공상 인정을 받았지만 특수교사들은 저마다 위로금을 모아서 전해주고 그나마 수술 경과가 좋아서 다행이라는 당사자의 미소에 감사한 마음만 전할 뿐이었다.     


  통합학급 교실에서 책상과 의자를 뒤집어엎으며 물건을 던지는 아이를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그 교실로 올라가서 반 아이들과 선생님이 모두 보는 데서 아이를 뒤에서 감싸 안은채 발을 걸어 엎드리게 하고는 무릎으로 등을 눌러가며 마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교실로 내려와 아이 엄마를 학교에 오시게 한 날도 있었다.


“제가 오늘 아이에게 한 일은 학대가 명백해요. 어머니께서 고발하신다면 쇠고랑 차야 하는 일이 맞아요. 죄송해요. 그 방법밖에 몰라서요.”    

 

  아이 엄마는 울었지만 곧 눈물을 닦고 차분하게 아이에게 사과하라고 타일렀다.      


  초등학교시기는 장애학생의 가정에 가장 힘든 시기이다.     

  유치원 시기에는 장애를 가진 학생도 일반 학생들과 그다지 심한 편차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조금만 더 연습시키고 공부를 시키면 비장애학생들과 다르지 않게 발달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초등학교 1학년, 2학년을 보내면서 다른 아이들이 폭풍성장을 하게 될 때, 그것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자신의 자녀를 받아들이기 직전에 비로소 미루어두었던 좌절이 본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퀴블러 로스는 인간이 상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부정 –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는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했다.


  대부분의 장애자녀를 둔 부모들은 초등학교 시기에 이 ‘분노’의 단계를 맞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는 특수반에 보내지 않을 테지만 통합반 받아쓰기 시험시간에 제대로 시험을 보기만 했으면 100점을 맞을 수 있었는데도 단지 아이가 시험지를 찢어버리며 시험을 안 볼 거라고 우는 것을 그냥 달래주기만 하느라고 시험 볼 기회를 주지 않았다며 화가 많이 난 학부모가 “너, 연금 못 받게 할 거야!” 하고 악에 받친 소리를 지를 때, 우울에 빠진 엄마가 하교 후 집에 간 아이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아 아이가 먼 곳으로 배회를 하느라 행방불명이 된 것을 학교 책임으로 돌릴 때에도 나는 어서 부모님들이 아프지 않게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은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수용을 하기는 했다. 초등학교 시기를 어렵게 보내고 중학교에 진학한 아이들의 선생님들에게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물어보면 다들 부모님들이 좋은 모습으로 아이의 학교생활을 받아들인다고 했다.

겪을 때마다 아팠다.

그러나 단지 그것으로 족했다.    

 

여전히 길을 모른 채로 좌충우돌 가는 모든 과정이 30년이면 충분했다는 결론으로 나는 퇴직을 했지만,  누군가의 삶에 개입해 온 모든 과정들을 하나하나 돌이켜보고 세밀하게 자기 검열을 하다 보면 모두들 나와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또 입을 다문다.      


또 한차례의 폭풍처럼 특수교사와 장애자녀와 학부모의 사연을 연일 듣는다.     

결론은 또 저마다의 진심이 닿아서 괜찮은 결말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그게 저마다의 사람들이 복잡한 사회 속에 저마다의 사연을 거치며 적응하고 성장하고 성숙하는 과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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