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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지 Sep 26. 2023

안녕! 오랜 세월

연일 팍팍하고 혹독한 비바람 속에 팽개쳐져 왔던 선생님들의 소식을 뉴스를 통해 듣는다.


요즈음 들어서 부쩍 많이 듣는 말이 있다.



"그동안 힘들었겠다."

"고생 많았지? 잘 그만뒀다."

"네가 그렇게 고생하며 사는지 정말 몰랐어!"


재작년에 퇴직 소식을 전할 때만 해도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이 하던 말은 지금과 전혀 달랐었다.


"그 좋은 직장, 남들은 가지고 싶어도 못 가지는 직업을 뭐 그리 힘들다고 그만두느냐?"


 그래서 나는 복에 겨운 직장 생활을 청산하고 세상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이 되어 설렁설렁 시간을 보내는 중이라는 포지션을 정하고 지내왔는데 3년이 채 못 되어서 그런 인사를 듣게 되었다.


세상 무신경해서 퇴근해도 끝나지 않는 직장 일을 붙잡고 있는 걸 눈앞에서 보면서도 일 년 수업 일수 이백일이 안 되는 날만 출근하면 되는, 세상에서 제일 든든한 철밥통이 보장되는 선생이라는 직업(지위)을 휘리릭 던져버린 세상 쿨한 사람으로 나를 보던 남편도 뉴스가 나올 때마다 내 얼굴을 보며 말한다.


"오랜 시간 동안 참 고생 많았네!"




가능하면 학교에 가지 않으려고 하지만 가끔 거절할 수 없는 요청을 받을 때가 있다.


지난달, 독감으로 결근 중인 선생님 수업을 며칠만 대신해달라는 반복되는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고 선언을 하고 사흘 출근을 했다.

사흘짜리 강사지만 제출해야 하는 서류는 여전히 많았다. 자격증, 최종학교 졸업증명서, 경력증명서, 건강검진 결과지, 잠복결핵검사서, 청렴 서약서, 행정정보이용 동의서, 스쿨뱅킹 신청서. 조회 확인서, 범죄조회 신청 동의서... 거기다 이제는 마약검사결과지까지 추가되어서 병원에 가서 마약검사를 받았다.


그렇게 출근을 하던 사흘째 아침에 약한 몸살 기운이 느껴졌다. 작년에 코로나 대체 강사를 했을 때 마지막 5일째 되던 퇴근길에 감기 기운이 돌았었는데 다음날 코로나 확진을 받은 적이 있었다. 아마 이번에도 독감에 걸렸을 것 같아서 집으로 오지 않고 격리를 하겠다고 식구들에게 말하고 안말로 향했다.


혼자 있는 일이 쉬는 일이라는 걸 이젠 가족들이 받아들여 주고 있다.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쉬고 싶은 곳에서 쉬고 싶은 만큼 시간을 보내라고 그저 놓아주고 있다.


전원생활의 로망이라는 게 바쁘고 정신없는 도시 생활의 팍팍함이 필수 전제 조건이라면, 이제야 나는 비로소 주변 사람들에게 전원생활을 누려도 될 만큼의 시간 정도는 지내왔다고 인정받는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뱀.

그림책이나 영상에서나 보았을 뿐이다.

아니다. 동물원 전시실에서 한 번 살아있는 뱀을 본 적이 있기는 하다.


도시의 삶을 잠시 떠나 한적한 시골 생활을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 평창 어느 계곡의 집을 둘러보다가 우거진 풀과 나무를 보고 '뱀'이 있을 것 같아서 안 되겠다고 포기하고 돌아선 날이 있었다.


 "뱀이 어디 있다고 그러느냐"

부동산 중개인이 화를 냈지만 그도 알고 나도 알고 있었다.

뱀은 어디에나 있다.

도시공원의 산책길에도 흔하게 나타나는 그것이 수풀이 우거진 산을 필수 옵션으로 삼고 있는 시골에 없을 턱이 없다.


그렇기에 낮은 산 옆에 자리한 안말의 이 집을 사기로 마음을 먹은 날부터 언젠가는 그것을 보게 될 거라는 건 각오하고 있었다. 


그래도 난 한 번도 자연 상태의 뱀을 본 적이 없으므로, 그래서 만약 뱀을 보게 된다면 무서움에 꼼짝도 못 하게 질려버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산과 붙어있는 집 돌담 속에는 뱀이 살고 있다고 시골에 살아본 적이 있는 사람들과 시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말한다.


산과 붙어있는 작은 돌담을 가진 작은 집.


각오는 했지만 기어이 그것을 보게 되는 날이 올 거라는 예상은 하지 않았었다.


비가 갠 저녁에 도착해서 어둠 속에서 차를 세워두고 계단을 오르려고 핸드폰 불빛을 비추는 순간 어둠과 핸드폰 사이로 난 불빛 아래로 화들짝 놀라는 뱀의 표정이 보였다.


나보다 더 많이 놀라고 있는 눈.


허둥지둥 옆 집으로 사라지는 어스름한 뒷모습을 끝까지 보지는 못했지만, 1미터는 되지 않겠구나 하는 가늠이 저절로 되었다.


잠시 서서 고민을 했다.


이대로 돌아갈까?

집을 팔아버려야 하는 걸까?

혹시 또 다른 녀석이 집 마당에 숨어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분명 나보다 더 놀라서 도망가던 두려움 가득한 눈을 가진 녀석은 어서 내가 이 공간에서 사라져서 평소처럼 아무도 없는 시골의 빈 밤 골목길이 곧 되어주기를 어딘가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본 자연상태의 뱀은 의외로 겁이 많은 모양으로 도망쳐 숨어버렸다.


철제 계단을 발로 서너 번 쿵쿵쿵 두드려 경계를 해 주고 심호흡을 여러 번 한 다음 핸드폰 플래시를 더 꼼꼼하게 구석구석 비추어가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난 무척 씩씩했다.


방에 들어가서는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고 또 살피며 벌레 한 마리 흔적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내일은 어쩌지?


내일 아침 밖에 나가서 그 뱀을 다시 보게 되면 어쩌지?


몸은 피곤했고 생각도 많았지만 여전히 나보다 더 많이 놀라던 뱀의 눈이 생각났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마음이 담담했다.


내일은 어쩌나?  

그런 고민을 한참동안 하느라 밤을 새울 줄 알았는데 어느새 잠이 들었다.


싱숭생숭한 꿈을 꾸게 될 줄 알았다. 꿈속에서 뱀 굴이 보였고 곧 거기서 뱀이 튀어 오른다고 누군가 알려주었다. 그런데 튀어나온 건 연푸른 털을 가진 보노보노 두 마리였다.

만화 같은 등장물 때문에 피식하는 웃음으로 깨어나 아침을 맞았다.


아침 해가 사방으로 난 창을 통해 들어오고, 부지런한 옆집 아주머니가 정원을 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부스스 일어나 주섬주섬 트레이닝복을 걸쳐 입고 장화를 꺼내 거꾸로 들어 탁탁 털어가며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꼼꼼히 확인한 뒤에  단단히 챙겨서 신고  마당으로 나가서는 옆집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가 나보다 더 반갑게 인사를 해 주셨다.

"안녕하세요~"


"뱀을 봤어요. 어젯밤 늦게 들어오다가요."

내가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어제 일을 일렀다.


"아유~ 글쎄 뱀이 들어왔더라고요. 아침에 우리 집 마당 나무 밑에 있어서.... 내가 막....."


아주머니가 약간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 뱀을 을 수도 있는 거군요!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냥, 막.... 삽으로..."

"아! 마당에 꼭 긴 삽을 놓아두어야 하겠어요."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혹시, 고양이 밥을 다시 놓아두면 안 될까요?"


옆집 아주머니는.... 고양이가 마당에 똥을 싸 두고 쥐를 잡아다 구석에 두기도 하는 등 성가신 일이 그동안 많았다며 정색을 하셨다.


"아, 그랬군요. 그건 안 되겠군요..."


나는 풀이 무성하게 자란 밭 구석구석을 삽으로 눌러보고 확인하고 또 확인해 가면서 잡초를 뽑았다. 두껍고 긴 장갑을 끼고.


시골집 돌담 틈으로는 뱀들이 다닌다.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던 지난 2년 동안은 고양이들이 그것들을 막아주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고양이들, 밥을 준 건 나였는데 보은의 사냥 선물을 옆집으로 보내는 배달사고를 내다니....


어쩌면 내가 없을 때 놓인 사료를 준 사람이 옆집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거였을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옆집 아줌마가 집안에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뒷마당에 슬쩍 고양이 사료 한주먹을 던져두었다.


5분도 안되어서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는 흙바닥 위의 사료를 골라먹느라 애를 쓰기 시작했다. 나를 경계하며 사료를 골라 먹다가 내가 움직이면 냅다 도망을 가다가 또 다가와서 바닥의 사료를 골라먹었다. 오랫동안. 내가 밭 정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면서 그렇게 사료를 먹었다. 어쩐지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러다 마음이 미안해졌다. 내가 필요해져서 뱀을 피하게 해 달라고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는 건 조금 미안한 일이었다. 흙바닥에 던져진 사료를 불안하면서도 반갑게 먹는 불쌍한 고양이의 납작하게 숙인 등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늦은 오후에 다시 밖에 나가서 사료를 한 그릇 담아 비가림막 아래에 놓아두었다. 이 사료, 내가 주는 거야. 옆집으로 사냥 선물 보내지 말았으면 좋겠네. 그래야 계속해서 이걸 놓아둘 수 있으니까 말이야. 


삽을 준비하는 것보다 고양이 사료를 놓아두는 게 훨씬 내가 감당하기가 수월할 것 같아서 며칠을 더 고민해 보기로 하면서 산과 밭 경계면으로 스텐 철망을 둘러쳐 보았다. 택도 없을 테지만 고양이들이 드나들게 두려면 이 정도 높이를 유지해야 할 것 같다.


결계를 치듯 뱀 퇴치제와 토양 살충제와 백반을 마당 주변에 뿌리고 나프탈렌 봉지를 바닥에 던져두었다.


친환경 유기농법은 오늘 날짜로 포기하고 이제부터 농약과 살충제와 제초제를 아끼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그럼에도, 이런 최대치의 불편함에도 내가 지금 여기서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유가 지금보다 더 많이 나이가 든 다음의 더 긴 홀로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는 걸 새삼 설명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도시는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곳이지만 나는 천천히 내가 더 이상 도시에 어울리지 않게 될 순간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작은 마당의 잡초 깎기, 서툰 밭갈이, 서툴게 치는 농약과 제초제, 씨 뿌려 작물을 거두는 일을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천천히 해 보고 있다.


긴 긴 시간을 소일하며 보내는 시기를 기꺼이 맞이할 준비를 하는 중이니 애써 피한다 해도 사라지지 않을 당연히 존재하는 자연의 생명들 중 하나인 뱀, 너란 아이를 보고도 당연한 일상으로 흘려보내고 또 한편 가능한 한 마주치지 않게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목록에 올려서 기꺼이 연습해 보기로 마음을 먹는 날.


그 긴 앞으로의 시간들에게도 인사를 해 본다.


안녕, 긴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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