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불출 야구쟁이
이 글은 많은 팬심이 담긴 매우 편파적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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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아침 하는 나의 루틴이다. 아침에 야구를 켜면 주로 7회쯤 진행되고 있다. 경기를 보면서 아침을 먹고 몸을 쭉쭉 펴고 슬슬 일을 시작할 때가 되면 경기가 끝난다. 가끔 연장전을 해서 야구장 bgm을 틀고 일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타이밍이 완벽히 들어맞는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 경기를 시작부터 보고 싶지만, 현생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포기한다.
나는 야구를 사랑한다. 특히 한국 야구를 열렬히 사랑한다. 약 15년 동안 한 팀만을 좋아했다. 4호선 > 수인선> 인천 1호선, 4호선 > 1호선 > 인천 1호선, 마을버스 > 경기 버스 > 마을버스. 수많은 방법으로 왕복 네 시간에 걸쳐서 문학구장을 오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나를 소개할 때 늘 야구를 좋아한다고 밝힌다. 프로야구팬과 만나는 것 자체가 신나는 일이기 때문에. 게다가 같은 팀 팬이라면 지극한 반가움을 표현한다.
2018년 7월, 미국으로 유학을 오고 가장 아쉬워한 일이 있었다. 아, 1년만 늦게 올걸. 페넌트레이스를 2위로 마친 나의 팀이 한국시리즈를 우승한 것이다. 페넌트레이스에서 1위를 하지 못했지만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한 팀은 꽤 있다. 2015년 두산은 준 PO 직행팀에서 한국시리즈 우승팀이 되었다. 하지만 내 팀의 우승은 남다르다. 그것도 2010년 이후로 8년 동안 하지 못한 우승이다. 상대가 두산이기 때문에 정말 이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학창 시절 가장 야구에 빠져있을 때 나름 라이벌로 불렸던 팀이기 때문에 왠지 두산을 만나면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라이벌이라고 불리긴 했지만 늘 우리 팀이 우위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두산이기 때문에 이기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 당시 두산의 경기력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미국과 한국은 13시간 차이가 나기 때문에, 매일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야구를 봤다. 올빼미형 인간이었던 나에게 새벽 5시 반 기상은 기적과 같았다. 5분 간격으로 울리는 알람을 10개쯤은 꺼야 일어나는 내가, 5시 29분에 정확히 눈을 떴다. 주말에는 아예 밤을 새기도 했다. 2012년 한국시리즈 패배 이후 한동안 삼성 왕조(인정하고 싶지 않지만)에 집어 먹혔던 프로야구 포스트 시즌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5-6위에 머물렀기 때문에 늘 가슴이 답답했는데. 드디어 쌀쌀한 날에 우리 팀 경기를 보고 있자니 행복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왜 지금 미국에 있는가, 하필 지금, 하필 올해. 1년만 더 일찍 잘 좀 하지. 아니면 유학을 내년에 올걸, 직관을 갔어야 하는데. 이런 행복한 투정도 부렸다.
역시 내가 새벽마다 응원을 보내서 그런가 우리 팀은 연장전에서 기적적으로 재역전을 하고 한국시리즈에 올라가는가 하면, 견고해 보였던 두산을 짓누르고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해 보였다. 나는 자녀를 서울대에 보낸 극성 엄마처럼 여기저기 우리 팀 우승을 자랑하고 다녔다. SNS에도 업로드하고,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 친구들에게도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말하고 다녔다. 부모님은 10년이 지나도 우리 딸은 아직 철부지구나 하셨다. 네가 선수도 아니면서 고작 좋아하는 야구팀 우승했다고 그렇게까지 호들갑이냐고. 하지만 나이가 들었든 말든 야구는 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고, 그 무엇보다도 기분 좋게 만든다.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이 철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좋아하고 열광하는 것이 있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을 정도다.
어릴 때는 스포츠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서 잠시 체대 입시를 준비하기도 했고 관련된 활동을 하기도 했다. 선수로서 뛸 수는 없어도 어떻게든 스포츠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결국 내 직업으로 삼는 것은 포기한 것 같다. 너무 좋아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부 사정을 알 수록 괴로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내 직업이 되어 출근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 때 슬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짝사랑하는 이상형과 굳이 사귀고 싶지는 않은 기분이랄까. 하하.
다른 길로 진로를 틀었지만 그래도 언젠가 어떻게든 관련된 일을 하리라고 생각하긴 했다.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되든지 어떻게든 나중에는 야구랑 관련된 일을 해봐야지.
나는 실천력이 나쁘지 않다. 하고 싶은 것은 금방 한다. 브런치에 글을 써볼까 생각하고 그날 바로 쓰기 시작했다.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 지 이틀 만에 기타를 샀고, 밴드와 함께 노래 부르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 주 주말에 보컬 오디션을 보러 갔다. 하지만 이상하게 야구에 있어서는 어렵다. 애정이 너무 커서, 하려면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크다.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스스로 너무 괴로울 것 같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당시 내 기억이 조금이라도 잘못되었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너무 명확한 기억임에도 2018년 우승이 맞았는지 검색해보았다. 그만큼 엄청난 애정을 쏟은 분야에서 무언가를 하는 게 나에게는 참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아직도 생각은 한다. 언제 실천할 수 있을지, 과연 실천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관련된 일을 안 하면 더욱 순수하게 경기를 즐길 수 있으니까. 하게 된다면 거기서 나오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겠지. 이제는 그냥 15년이나 애정해 온 것이 스포츠고, 야구고, 우리 팀이라는 것이 좋다.
로또 당첨되면 우선 SK 와이번스를, 아니 SSG 랜더스를 살 거라는 농담도 많이 한다. 물론 고작 로또 당첨으로 팀을 살 순 없지만. SK를 인수하고 애정을 뿌리면서 팀 프로모션에 힘쓰는 정용진 회장까지 좋아지고 있다. 이번에 한국에 가면 정용진 맥주도 마셔볼 거다. 내 청춘을 다 바친 SK 와이번스라는 이름이 사라진다는 것이 슬펐지만, 조금 더 관심을 주는 회사에 인수된 것 같아서 SSG 랜더스라는 이름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안 받아들인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가장 슬프고 답답한 것은 지금 내 주변에 한국 프로야구팬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나를 모른다. 나에게 어떠한 잠재력이 있는지, 어떠한 삶의 방식이 가장 좋은지, 아직도 고민하고 있다. 하고 싶은 일도 너무 많고 해야 하는 일도 너무 많다. 혼란의 연속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취미는 스포츠, 그중에서도 한국 프로 야구임을 안다. 때로는 욕하고 때로는 마음에 안 들지만 그것도 다 나의 애정임을 안다. 올해도 우리 팀이 우승할 것 같은데 직관을 또 못 갈 것 같아서 벌써부터 조금 슬프다.
그래서 오늘도 아침에 야구를 켠다. 야구장 소리를 들으면서 양치하고 아침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