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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흔일지 Jan 13. 2021

열두 살 언니

망원동의 마흔 2

부모님이 거주하시는 본가에는 고스톱 세트가 있다. 손때 묻은 고스톱 한 벌과 만 오천 원가량의 백 원, 오백 원 동전 뭉치. 자식들이 모두 독립한 후 부모님은 이 세트로 맞고를 치며 무료한 밤을 보냈고, 우리도 본가에 오면 저녁을 먹고 함께 고스톱을 쳤다.


고스톱에 대한 추억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이제 일곱 살이 되는 조카가 막 태어났을 때의 어느 날이다. 동생 부부가 서툰 손으로 아들을 씻기고 어렵게 아이를 재운 다음 조용히 거실에 나와 우리는 무언의 고스톱을 쳤다. 청각적 자극이 맛있는 게임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해냈다. 아이가 깰까 봐. 머리 희끗한 할아버지부터 아이가 낯선 고모와 열 달을 품었던 며느리까지.


아무튼 고스톱이 우리 가족의 유일한 놀이인데, 어제는 고스톱을 하려고 동전을 나누다 오래된 10원짜리 동전을 발견했다. 고풍스러운 서체로 쓰인 ‘십 원’이라는 글자, 떼가 잔뜩 묻은 다보탑, 1970이라는 제조된 시간. 이제는 쓰이지 않는 동전이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어쩐지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나보다 열두 해를 더 대한민국에서 보낸 동전 한 닢. 더 이상은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반가움을 주는 존재.

마흔이 대체 뭐라고 흔들리는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무섭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저 열두 살 언니를 보니 마치 모든 게 다 괜찮을 것만 같았다. 나도 저렇게 세월의 흔적을 안고 언젠가 누군가에게 발견될 것 같았다. 살아있다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한 듯했다. 무언가에 의지하지 않는 성향의 사람이라 종교도 없고 사람도 잘 믿지 못한다. 당연히 내 안의 슬픔과 고통을 잘 털어놓을 줄도 모른다. 그런데 이 동전을 가까이하면 마음 한켠이 편안해질 것 같아 지갑에 담았다. 지름 5cm도 되지 않는 이 작은 물건에서 받는 감정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옅어질지라도.


망원동 1인용
오늘의 마흔. 혼자서도 잘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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