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바잉’이 아니라 ‘패닉’이야!
‘패닉 바잉’. 최근 몇 년간, 청년세대 옆에 가장 많이 따라붙었던 말들 중 하나입니다. 뉴스에 도배되는 패닉 바잉 현상을 보고 전혀 딴 세상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사람, 저뿐인가요? 서울에 거주하는 청년 3명 중 1명이 지옥고(지하·옥탑방·고시원)에 산다 는 점을 고려할 때, ‘바잉(buying)’은 청년세대의 주거권과 동떨어진 말일지도 모릅니다. ‘내 집 마련’이 먼 미래에, 혹은 다음 생에서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청년이 적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도 ‘패닉(panic)’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주택자, 또는 세입자의 불안. 꼭 청년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본 적 있을 겁니다. 세입자가 느끼는 공포는 언제 또 이사를 가야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 한가지만이 아닙니다. ‘언젠가 떠나야 한다’는 불안에 앞서, ‘과연 떠날 수 있을까?’라는 불안이 존재합니다.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 또는 수억원에 이르는 보증금을 돌려받아야 다음 집으로 이사를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행에 큰 돈을 맡긴다고 해서 매일 밤 불안에 떨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생전 처음 본 사람에게 큰 돈을 맡겨야 한다면 어떨까요? 전재산과 다름없는 돈을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하루하루가 편치 않을 겁니다. 게다가 맡긴 돈이 은행에서 대출받은 것이라면, 순식간에 신용불량자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세입자가 보증금 회수에 불안을 느끼는 것도 비슷한 원리입니다.
‘소액임차인 보호제도’ 있지만…
소중한 보증금을 모두 날릴 수 있다는 공포가 세입자의 일상을 갉아먹지 않도록,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임차인의 보증금 확보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 제8조는 임대인의 채무문제로 주택이 경매에 넘어갔을 때 소액의 보증금을 먼저 돌려받을 수 있는 ‘우선변제권’을 임차인에게 부여합니다. 이 제도의 목적은 보증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고 쫓겨나가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도록 하여 영세임차인의 주거안정을 도모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영세임차인이 보호받는 것은 아닙니다. 보증금이 소액이어야 하고, 그 소액 중에서도 일부분만 보장됩니다. 보증금이 얼마 이하여야 소액으로 볼지는 시행령으로 정하게 되어있습니다. 사회·경제적 상황에 따라 임차인 보호 기준을 바꿀 수 있는 구조입니다. 이에 따라 보호대상 임차인의 범위와 우선변제되는 보증금의 액수는 법 제정 이후 10차례 개정되었습니다.
서울 평균 전세금 ‘86’배 뛸 때, 우선변제액은 17배만 올라
1985년 11월, 지금의 기획재정부인 경제기획원이 전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주택조사에 따르면 당시 서울의 평균 전세보증금은 553만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서울의 평균 전세가격은 얼마일까요? 2021년 8월을 기준으로 4억7402만원에 이릅니다. 36년간 서울의 평균 전세보증금은 무려 85.7배나 뛰었습니다. 그러나 보호대상 임차인을 정하는 소액보증금의 기준액은 50배밖에 오르지 않았고, 우선변제액도 16.7배 상승하는 데 그쳤습니다.
보증금의 인플레이션이 연동되지 않는 현재의 제도는 임차인의 재산권을 침해하고 있습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상 임차인에게 부여된 우선변제권은 다른 채권자보다 먼저 돈을 회수할 수 있는 권리로, 헌법상 보호받아야 할 재산권에 해당합니다. 임대보증금의 상승규모에 맞춰 소액보증금제도가 변화하지 않으면 임차인의 재산권은 줄어들게 됩니다.
“보증금은 집주인이 정했는데요?”
소액임차인으로 보호를 받으려면 보증금이 소액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보증금이 소액일지 아닐지는 임대인이 주택을 얼마에 내놓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보증금을 모으기 어렵고, 나중에 제대로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보증금이 소액이길 바라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액보증금 주택에 살지 못하는 이유는, 높아진 평균 전세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임대인이 보증금을 소액으로 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액보증금 주택의 경우 월차임이 높기 마련인데, 그만큼의 주거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적습니다. 빚을 내서라도 고보증금 주택을 선택하는 이유입니다.
정부에서도 청년 등 주거취약계층에게 억단위가 넘어가는 보증금을 저금리로 대출해주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고보증금 주택에 입주해 주거비용을 아낄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가뜩이나 적은 소득의 상당부분을 월세로 지출하는 게 부담돼서 소액보증금 주택에 거주할 수 없는 사람들이 보호대상에서 제외되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보증금 회수에 문제가 생겨 빚더미에 오르게 될 경우 즉각적으로 생계에 위협을 받는 사람들인데도 말입니다.
지금처럼 지역과 보증금만으로 보호대상 임차인을 선별하는 것은 헌법상 평등권을 침해합니다. 보증금의 액수만으로는 임차인의 경제적 상황을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불합리한 차별이 발생합니다. 월세 주택보다 상대적으로 보증금이 높은 전세 주택에 사는 임차인들은 이 제도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한 주택에 여러사람이 거주하는 경우에도 이 제도의 보호를 받는 데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1인가구에 비해 더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다인가구의 임대보증금은 상대적으로 높은데, 현행 제도는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깡통전세 속출… 보증금 반환에 ‘빨간불’
소액보증금 제도가 임차인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깡통전세'의 위험성은 커지고 있습니다. 2021년, 매매가의 80% 이상이 대출금과 임대보증금으로 이뤄진 아파트 거래가 전년보다 1.8배 증가했고, 빌라 거래의 경우 3.3배 늘어났습니다. 통상 매매금액의 80% 이상이 ‘남의 돈’으로 이뤄지면 보증금 회수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봅니다. 주택담보대출과 임대보증금을 합산한 금액이 집값의 100%가 넘는 깡통주택 거래도 전년대비 2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이런 경우 집주인이 현금 한푼 없이 대출과 임대보증금 만으로 집을 매입했기 때문에, 주택가격이 떨어지면 보증금을 받을 수 없게 될 위험이 큽니다.
세 들어 살고 있던 집이 경매에 넘어갔을 때, 임차인 10명 중 1명은 보증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큰 돈이 오가는 계약에서 임차인들이 부주의했던 탓일까요? 보증금 반환에 문제가 생겼을 때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대신 돌려주는 보험상품을 운영중인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또한 보증금을 회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5년간 HUG가 보증금을 대신 갚아 준 후 경매 절차를 거쳐 이를 전액 회수한 경우는 31%에 그칩니다.
보증금의 98%를 날린 심각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전세보증보험을 제공하는 기관들은 보증금 회수가 어렵다고 판단되는 위험한 주택의 경우에는 보증을 거절합니다. 이러한 공공기관마저 대규모의 보증금 사고를 겪는 것을 보면 , ‘임차인들이 조심했어야 한다’는 쉬운 결론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보증기관의 검토를 거쳐 보험에 가입한 주택임에도 불구하고 보증금 반환에 문제가 생긴 비율은 점점 증가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상황입니다.
임차인 주거권, ‘보험상품 제공’으로 지킬 수 있나
임차인의 생존권을 보장하려면, 주택이 경매에 넘어가더라도 일정액의 보증금은 보장받아야 한다는 게 공익허브의 생각입니다. 보증금 미반환 사고를 막기 위해 정부가 전세보증보험 가입을 독려하고 있지만, 보험은 어디까지나 돈을 내고 구입하는 ‘상품’입니다. 권리에 관한 문제를 상품으로만 해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보증보험료가 부담돼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든, 보증기관으로부터 보험가입을 거절당한 사람이든 지위가 불안정한 임차인으로서 일정정도 보호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아버지, 저는 오늘 근본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돈을 벌겠습니다. 아주 많이요. 대학, 취직, 결혼 다 좋지만 일단 돈부터 벌겠습니다. 돈을 벌면 이 집부터 사겠습니다. 이사 들어가는 날 저와 엄마는 정원에 서 있을게요. 햇살이 워낙 좋으니까요. 아버지는 그냥 계단만 올라오시면 됩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건강하세요. 그럼 이만."
임차인의 삶, ‘텅 빈 깡통’ 되어버리지 않도록
영화 <기생충> 속 기우(최우식 분)처럼, 열악한 주거상황에 놓여있을 지라도 우리는 안락한 집을 꿈꾸고 미래를 계획하곤 합니다. “사람다운 집에 살고 싶은 마음에 고시원에 살면서 돈을 열심히 모았고 이제 전세에 들어가게 됐는데, 이런 상황이 터지니까 앞으로 몇 년은 빚을 갚기 위한 삶을 살아야 되는 거예요…….” 인천 부평구의 전세 오피스텔에 입주했다가 보증금을 날린 20대 청년이 울먹이며 한 말입니다. 현재의 부족함을 참아가며 차곡차곡 모아온 재산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그려온 계획을 송두리째 잃지 않도록 소액보증금 제도는 더 많은 임차인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해당 소송 관련 언론보도]
[참고문헌]
2000.6.29. 98헌마36.
통계청. 2018. "지난 20년 우리가 사는 집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 1987. “1985 인구및주택센서스보고 제1권 전국편”. p590-591.
국민은행. 2021. 월간시계열 B가격통계.
장경태의원실. 2021. 한국부동산원으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
장경태의원실. 2021. 한국부동산원으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
박홍근의원실. 2019. 대법원 경매현황을 분석한 자료
신동근의원실. 2021. HUG에서 제출받은 자료.
파이낸셜뉴스. 2019.01.10. "서울 1인 청년가구 3명 중 1명 ‘지옥고’에 살고있다".
한겨레. 2021.10.04. "돈 한푼 안 들인 갭투자 올해만 2만건 육박…‘깡통전세’ 위험".
시사저널. 2019.10.20. "집 경매 시 세입자 10명 중 4명 전세금 떼인다".
경향신문. 2021.10.06. "'깡통전세' 떠안은 HUG…경매 거쳐도 회수율 저조".
이투데이. 2021.08.16. "HUG가 대신 갚아줘야 하는 전셋값 사상 최고".
JTBC. 2021.12.25. "'깡통전세' 세입자들 떼인 돈 역대 최고치... 청년들 "빚더미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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