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
2년 만에 함께하는 그녀와의 저녁은 상수역 이자카야에서였다. 그곳은 우리가 처음 저녁을 같이했던 곳이기도 했다. 나는 먼저 도착해 가장 안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이전에 이곳에 같이 왔을 때도 우리는 이 자리에 앉았었다. 그때 그녀를 바라보는 내 마음과 지금 그녀를 바라보는 마음은 너무나 달라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신기하구나. 그녀가 뒤이어 도착했다.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치고 앉았다. 고개를 숙이고 테이블 위의 메뉴를 바라본 채 한쪽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그녀는 뇨끼와 그라탱을 좋아했다. 결국 뇨끼로 할 거지? 내가 묻고서 술 코너로 메뉴판을 넘겼다. 나는 이미 맥주를 마시기로 정해뒀던 터라 메뉴판은 그녀 쪽으로 향하게 펼쳐두었다. 그와 동시에 어떤 질문부터 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메뉴를 주문하고서 요즘 일은 어떤지 내가 먼저 물었다.
"정신없지. 나아진 게 없어. 살인적인 업무량이야" 그녀가 한숨 쉬며 답했다. 여전히 나를 보지 않았다.
"고생이 많네"
대화엔 정적이 흘렀고 힘겹게 만난 이 자리에서 불필요한 질문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바로 본론으로 말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반갑다. 예전엔 자주 봤었는데" 닿을 수 없었던 연락에 대한 답답함을 꾹 눌러 담아 돌려 말했다.
"나도 이렇게까지 바빠질 줄 몰랐어"
"내가 뭔가 부담스럽게 한게 있었거나 그게 아니라면 뭔가가 두려웠던 거야?"
"아니야. 그냥 나도 내 마음을 많이 경계했었어. 네가 오해하지 않도록. 나는 친구까지의 온도가 당시엔 적당하다고 생각했어. 그 이상으로 갔다면 분명 이런 환경에선 얼마못가 헤어졌을게 뻔하니까"
"금방 헤어져버릴게 두려웠던거구나"
"내 생각은 그래. 누굴 만나더라도 책임감 있게 만남을 시작하고 싶었어. 누군가를 만나는데 적당한 마음으로 만나는건 난 이해 못해. 하지만 너도 내 상황을 잘 알잖아. 누구를 만날 형편이 못된 거. 매일밤 야근이야. 주말엔 외근을 나가. 집에 들어가면 핸드폰을 충전기에 꼽자마자 바로 잠들어버려. 15년도 더 알고지낸 친구의 시시콜콜한 농담도 가끔 답장하기 버거워서 그 친구 연락을 한달간 차단한적도 있었어. 그야말로 모든게 버거웠던거야. 이런 상태에서 연애가 가당키나 했었을까?" 그녀는 마침내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본인은 충분히 합당하다고 판단되는 일을 했다는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당당했다. 그녀의 눈은 차가웠다. 그 차가운 눈은 분노를 말하고 있는지 이해받길 원하는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머리로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찾아오는 서운함과 도무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이 상황은 무력감으로 다가왔다.
"나도 나중 가서는 그냥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었어. 우리 사이 뭔가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쯤은 이해하고 있었어. 너와 나는 마음을 여는 속도가 달랐던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도 천천히 다가가려 노력했어. 나는 분명 나름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내가 뭘 어떻게 했어야 했던 건지 모르겠어"
"어떻게 할 수 있었던 건 없어. 너는 충분히 잘해줬고 잘못한 게 없어. 그냥 이건 내가 원래 그런거야"
물을 한모금 마시고는 그녀가 계속 말했다.
"내가 대학 졸업하고였던가, 오랜만에 내려간 고향이었는데 친구들이 내 생일 얼마 안 남았다고 돈을 모아서 예쁜 지갑을 사준 거야. 너무 예뻤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그리웠던 동네들 그리고 예쁜 선물. 모든 게 완벽했어. 하지만 그 지갑 단 한 번도 들고나간 적이 없어. 쓰다가 낡아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잃어버리면? 그 지갑을 잃어버리면 마치 그때 그 순간조차 잃어버리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나는 그때 그 기억이 너무 좋아서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거든. 그래서 아직 그 지갑을 그냥 책장 위에 올려만 둬. 그러면 나는 그 지갑을 보고 그 시절 그때를 훼손하지 않고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거야. 가끔 사람한테도 그래. 그 사람과의 관계가 소중해질수록 혹여나 틀어질 것이 두려워 그냥 더 가까이도 멀지도 않게 그 상태를 유지해. 그러면 틀어질 일도 없이 좋은 기억만 남는거야"
그 말을 하고 물을 홀짝 마시는 주영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너무나 반가운 주영이의 얼굴을 바라볼수록 그녀를 꼭 안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더 나아가 그녀와 입맞춤을 하거나 그녀와 진한 스킨십을 나누고 싶은 마음까지 가지는 않았다. 그저 단순히 꼭 껴안기만 하되 강하게 껴안아 마치 내 몸속으로 흡수라도 되듯 내 품 안에 안고 싶었다.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무언가 달랐다. 이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어떠한 강한 욕구와도 같았다. 나와 여자친구와의 관계가 좀 더 사랑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영이에 대한 갈망과 집착을 나는 이해하고 싶었다. 어떠한 이유에서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며 나는 왜 그녀를 강하게 원하는 것일까? 그녀에게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어떤 마음인가?
"네가 편한 대로 하자. 네가 많이 보고 싶었고 지금 대화하는 이 순간이 꿈만 같지만 그럼에도 나는 네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이 거리가 편하다면 그렇게 하자. 친구로라도 좋아. 어쩌면 너한테는 혼자만의 재충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혼자가 가끔 쓸쓸할때면..."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그녀가 내 말을 치고 들어왔다.
"학생 때 혼자 서울에 올라와서 10년을 넘게 혼자살며 배운게 몇 가지 있어. 그때 배운것들중 아직까지도 꽤나 쓸만하다고 생각되는게 있는데 그게 뭔 줄 알아?"
그녀가 알아서 말을 이어주길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혼자서도 충분히 괜찮은 마음이야"
혼자서도 충분히 괜찮은 마음을 배운게 아니라, 외로움과 그리움이라는 마음을 비로소 완전히 회피할 수 있는 마음을 배운게 아닐까? 하고 속으로 반박했다. 다만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랬구나 하며.
그녀는 나와 함께 걷거나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볼 때보다 이렇게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적당한 거리를 벌린 채 대화를 나눌 때 훨씬 편해 보였다. 그녀를 알고 지낸 지 이년 동안 난 그녀와의 시간을 온전히 즐겨본 적이 없었다. 늘 긴장했고 떨렸다. 그녀의 표정과 말투에 신경 쓰기보다 내가 이제 어떤 말을 해야 하지 에 온 신경이 다 가있었다. 그리고 이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그녀에 대한 긴장감이 조금 사그라든 지금, 나는 지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눈치채지 못한 것을 오늘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마치 본인이 생각했을 때 적당한 거리라고 여겨지는 선을 분명히 그어놓고 나를 대했다. 대화가 즐거워져 혼자 신이 나 본인이 정한 선을 훌쩍 넘어버릴 때면 아차 싶은 마음으로 다시 뒷걸음질 쳤다. 갑작스레 이 관계를 단절시킨 것은 그녀의 감정크기 역시 스스로 뒷걸음질 치며 본인이 정한 선을 지키기 어려운 상태까지 갔기에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쳤던 것이리라.
"벌써 이년이나 지났더라. 시간 빨라. 그때 아무것도 몰라서 나한테 이것저것 물어보던 때가 훤한데"
"그러게. 매일매일이 힘들었는데 결국 다 지나가네"
"이제 일은 좀 할만해?"
"아니, 전혀. 좀 지쳐서 내년 이월에는 일을 그만둘까 해. 그때가 딱 삼 년을 채우는 날이야. 그냥 이제 어디 가서 조용히 꽃가게나 하고 싶다"
"꽃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원래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요즘 보니까 예쁘더라고. 아니면 그냥 아무거나 소박한 일을 하고 싶은 걸 수도 있고. 지금은 어디 시끄러운 곳 갇혀 사는 기분이야. 어딜 가든 귓가 주변이 시끄러워. 그냥 내 삶이 버거운 걸 테지"
내년 이월까지는 아직 십 개월가량이 남아있었다. 그때면 퇴사를 한다니 더 이상 환경이나 상황적 이유를 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이 작지 않았다. 그녀의 환경이 여유를 되찾는다면 내가 다가가는 것에 대한 부담도 훨씬 덜해질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십 개월은 내게 너무 애매한 기간이었다. 그 순간은 언젠가 오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너무나 먼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내게는 나를 너무나 사랑해 주는 여자친구가 있지 않은가. 설령 내년 2월까지 그녀를 기다린다 하더라도 그때 가서 그녀가 내 마음을 받아줄지조차 미지수인 것이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상황은 명확하되 결과는 불확실했다.
안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모든 전화 알림은 모두 무음으로 설정해 두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여자친구의 전화였다.
통화 좀 하고 오겠다는 신호를 주고 밖으로 나왔다.
"외근은 좀 어때? 많이 바빠? 저녁은 먹었나 해서" 여자친구가 물었다. 전화 너머 여자친구의 목소리는 참 따뜻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주영이와의 앞날과는 너무나 대조되게도 여자친구는 참 내게 확실했다.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그 목소리에서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앞으로도 나를 믿어주고 내게 큰 힘이 되어줄 사람이 분명했다. 내가 그녀를 저버리지 않는 한 그녀는 나를 떠나가지 않을 그런 사람이었다.
"퇴근은 했어?" 내가 물었다.
"응 오랜만에 요리해서 언니네에도 좀 가져다줬어. 밖이네? 아직 퇴근 못한 거야?"
"이제 곧 할 거야. 마무리할게 좀 남아서"
"추운데 고생이야. 안 그래도 바쁜데 내가 너무 부담 주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 다음 달에 일정 어려우면 꼭 알려줘"
여자친구의 어머니께서 내 생일이 껴있는 주말에 나를 초대해 저녁을 해주고 싶다고 하셨다. 여자친구는 요즘 바쁜 내 일정이 걱정되어 괜찮다고 적당히 말렸지만 여자친구의 어머니께서 얼굴도 볼 겸 꼭 초대하고 싶으신 모양이었다. 여자친구 어머니의 저녁 초대가 마치 내게는 카운트 다운을 알리는 디데이 같았다. 하루하루 그 날을 향해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느끼는 무게는 마치 결혼식과 같은 무게감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 마음의 비밀과 모든 것에 대한 결론을 내야한다고 생각했다.
유리로 된 가게 문을 통해 앉아있는 주영이를 바라보았다. 자그마치 이년을 그리워했던 사람이 지금 저곳에 앉아있다. 그녀를 만나보려 퇴근 시간에 맞춰 그녀 회사 근처도 가보았지만 만날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저 가게 안에 앉아있다. 이 순간을 너무나 기다려온 나머지 시간이 잠시 멈추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냥 조금만 더 오래 이렇게 바라보고 싶었다.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하지만 알고 있다. 지난 이 년간 그러했듯 오늘이 지나고 나면 또다시 그녀와의 연락은 멀어질 것이라는 것을.
내년 이월,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지난 십 개월 참 힘들었잖은가. 왜 우연은 지금 이 상황을 만들어주었을까. 이 상황에서 맞는 선택은 무엇일까 아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훗날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라도 미리 알았으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