Ⅸ
장례식장에서 용산까지는 차로 1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였다. 택시 창가로 보여지는 새벽의 밤거리는 조용했다.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이 조용한 거리가 마음의 공허함으로 다가왔다. 버겁고 지친 마음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윽고 서러움에 복받쳐 숨이 차고 있었다. 좋아했던 외삼촌을 떠나보내서 흐르는 눈물도 정신없는 회사 일정도 아닌 내 마음의 힘듦을 온전히 공감받지 못한채 도리어 죄책감과 미안함만 마음에 가득 담아온데서 나오는 눈물이었다.
택시 기사님께서는 작게 나오던 라디오 볼륨을 조용히 높이셨다. 지방분이세요? 내 호흡이 조금 진정되자 택시 기사님이 조심스레 먼저 말을 꺼냈다. 짐 가득 싸들고 용산역 가는거보니 KTX타고 집에 가시는건가 해서요.
호흡은 안정을 되찾았지만 지금 대답했다가는 목소리에 남아있는 떨림으로 내 감정이 들킬 것만 같았다.
신호에 걸려 차가 잠시 정차했을 때 기사님이 병음료 두개를 꺼냈다. 하나는 기사님이 마셨고 다른 하나는 내게 건네셨다.
"늘 날 밝을 때만 몰다가 요 근래 밤에만 운전하니까 보통 피곤한게 아니네요"
기사님을 쳐다봤다. 택시 기사는 올렸던 라디오 볼륨을 다시 낮췄다.
"사실 낮에만 택시 모는데 요 며칠전부터 낮에 쉬고 밤에만 택시 모는데 피곤해서 적응이 안되네요. 저도 고등학교 들어간 아들내미가 하나 있거든요. 얼마전에 크게 한번 싸웠어요. 택시 수십년 몰면서 한번도 길을 헤맨적이 없었는데 자식이랑 대화할 때면 늘 헤매요. 매번 싸우면서도 매번 어떻게 풀어가야할지를 몰라요. 저야 말문이 턱 막히니까 별 수 있나 그냥 속터져서 화내는거지. 애기나 어른이나 이럴때보면 뭐가 다른가 싶어요. 어떻게 말해야할지 몰라서 일단 화를 냈는데... 애엄마는 또 아들내미 사춘기라고 편 들어주니까, 둘 눈치 보여서 다들 나가있는 낮에 쉬고, 밤에 나와서 일하고 있네요"
"먼저 사과하셔야겠네요"
"그래야죠. 자식을 어떻게 이겨요. 더군다나 마누라까지 애 편을 드는데. 혼자 별 수 있나요. 자식도 못이기지만 아내한테는 더 못이겨요" 혀를 끌끌 차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답했다.
"그래도 아들 많이 사랑하시죠?"
"그럼요. 없으면 못살죠"
"아드님한테는 사랑한다고 표현 많이 하시나요?"
"못하죠. 낯간지러서. 그냥 손님없을 때 어디간다고하면 태워줄까? 하고 물어보고는 하는데. 그게 고작이에요"
그 아드님에게 기사님의 이런 마음이 잘 전달 되었다면 다행일텐데 하고 생각했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사탕을 주며 아이의 미소를 바라는 것은 쉽지않다. 매주 금요일이면 내 방 문지방위에 올려둔 엄마의 돈 이면에 담긴 엄마의 마음을 내가 알아차릴 수 없었던 것처럼.
"답답하시겠네요. 서로 잘 풀리시길 바래요"
"어쩔 수 없죠 뭐. 이 나이 먹고 혼자되면 얼마나 서럽겠습니까. 옆에서 같이 살아줄 때 고분고분 말 잘들어야죠. 이 나이 먹고 헤어지면 누가 저 만나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손님은 애인 있으세요? 시원하게 잘생겨서 인기 많으실 것 같은데" 거울로 나를 힐끗보며 말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여자친구였다. 하지만 곧 바로 주영이 생각도 함께 들었다. 누구 한명을 생각하고 섣불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나는 사람은 있는데 제가 좋아하는건지 잘 모르겠어요 하고 답했다.
아들과 아내와 어떻게 대화를 풀어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그는 어떻게 지금 아내분을 만나신걸까 하고 궁금해졌다. "기사님은 지금 아내분 어디가 좋으셨어요?"
"아, 저희는 고아원에 있을 때부터 알고지냈어요. 그 친구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던거죠. 어릴땐 부모 없다는게 너무 큰 꼬리표니까 사회 나와서 누가 이걸 이해해줄 수 있겠나 걱정되더라고요. 그러다보니 같이 고아원에 있던 지금 집사람 말고는 저같은 사람 좋아해줄 여자 없을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리고 서로를 너무 잘 이해하고 있으니까"
나도 남들과는 다른 꼬리표가 하나 있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부모님께서 밥 먹는 모습보다 약먹는 모습을 더 많이 보고 자랐다. 일찍부터 힘든거 내색하지 않고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는 것이 그들의 안좋은 건강에 조금이나마 짐이 되지않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엄마 중학교 때부터는 학교 공부로 안된대요. 학원 꼭 다녀야 한다고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구요" 용기내 말한 초등학생의 나였다.
"왜 안하던 말하고 그래. 혼자서 잘 해왔잖아. 자꾸 엄마 힘들게 하지마. 엄마 많이 사랑하니까 그래줄 수 있지?" 어린나이로써는 이해되지 않는 단어들과 납득되지 않는 이유들로만 들렸다. 예나 지금이나 늘 지쳐있는 어머니의 말투는 나의 죄책감을 유발 시켰다. 나는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채로 자랐다고 생각했다. 이 외로움은 너무나 깊어, 연인에게 이것을 채워주길 바랬다가는 상대를 너무 지치게 할 것을 잘 알고있었다. 상대방과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했다. 가까워진다는 것은 상대방이 내 마음을 채워줄거라는 기대가 생긴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내 마음을 미리 경계했다. 깊은 외로움을 이해받고 싶어하는 마음 속 어린 아이를 나는 부끄러워했다. 때로는 두려워했다.
나는 아픔을 겪은 이성에게 마음이 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옆에 있어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조금씩 열 수 있었다. 내가 내 마음을 잘 알고있었기에 그들의 마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이건 선의가 아니었다. 나는 늘 부족했기에, 나 역시 부족한 이들에게 다가간 것 뿐이었다. 그들 역시 부족했기에 부족한 나를 보고도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들도 아픔이 있기에 내 아픔도 알아줄 것이라 기대했다. 아픔이 보이지 않는 이들은 나를 역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혼자가 될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곁에 있던 누군가 떠나가는 그 상황을 미리 두려워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