Ⅷ
식사를 마친 뒤 겉옷을 챙겨 입고 가방을 들자 가족들이 모두 나를 쳐다봤다.
입구에 서서 가족들에게 인사를 했다.
멀리 안 나간다. 조심히 가라. 아버지가 빈소 입구에서 나를 배웅했다.
어머니는 내가 오자마자 바로 가는 것이 기가 차다는 듯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게서 고개를 돌리셨다.
그냥 나가려다 어머니를 보고 말했다. 입구에 서서 길에 한 숨을 내뱉고 다시 빈소를 향해 돌아섰다.
형! 동생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나를 불렀다.
엄마, 힘드시죠? 고생 많으신 거 알아요. 그런데 저도 힘들어요. 전주 근처까지 갔다가 올라와서 이제 다시 내려가요. 저도 뭐 많이 바라는 거 아니지만 그냥 내 아들이 그런 마음이었구나, 힘들었구나 그건 알아주셨으면 해요.
"힘들어? 그래서 오기 싫은 거 억지로 왔니? 너는 이게 오기 싫은데 참고 와야 하는 일이니?" 어머니가 울먹거리며 소리치셨다.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몰아쳐오는 저 감정을 마주할 용기도 기력도 내게는 없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는 말리고 외숙모는 어서 가보라는 손짓을 내게 해 보이셨다. 어머니를 잘 부탁드려요 삼촌 하고서 조용히 속삭였다. 어머니와 짧지 않은 한 마디씩을 서로 나눴다. 마음에 있는 말이 기어코 밖으로 나왔지만 절대 편하지는 않았다. 이 슬픔이 부디 무탈히 지나가 속상함도 서운함도 잊혀지고 편안함이 올 수 있기를 바라며 어머니의 행복을 빌었다. 숙모가 행하는 사랑의 방법이기도했다.
택시 타고 갈 거지? 나와 1살 차이인 조카가 나를 배웅해 주려 함께 나왔다.
"미안하다. 이렇게 일찍 가서"
"전주 가던 길이었다며 이 시간에라도 와준 게 고맙지"
"언제 돌아가신 거야?"
"그저께였어. 지난주부터 심장 쪽이 불편하다면서 입원하셨었거든. 심각하게 아픈 것도 아니고 해서 병원에는 나랑 엄마는 안 가고 아버지 혼자 계셨었는데. 이렇게 될 줄 몰랐네"
"나한테는 외삼촌이지만, 너한텐 아버지인데. 참 마음 힘들겠다"
"힘들지. 사실 아직 모르겠어. 실감이 안 나. 그런데 신기한 게 알다시피 우리 아빠가 말도 없고 표현도 잘 없던 사람이었잖아. 그런 아빠도 그저께 아침엔 이제 곧 마지막인걸 직감하셨었나 봐. 돌아가시던 날 주치의 회진이 있었는데 일주일간 자기를 돌봐준 의사 손을 별안간 꼭 잡더래"
"왜?"
"몰라 그렇게 10초를 잡고 있었대. 웃기지 않아? 난 아빠가 그런 짓을 했다는 게 상상이 안 가.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것도 늙은 노인 손을. 처음엔 되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빈소에서 아빠 사진을 멍하니 보며 그 생각을 하고 있자니 갑자기 아빠가 되게 가여워지더라. 평생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던 마음을 마지막에 가서야 마침내 겨우겨우 해낸 느낌이었다랄까? 세상 무뚝뚝하고 차가운 아빠도 사랑은 필요했던 거야.
"너희 어머니도 아까 비슷한 얘기를 하셨는데"
"아 그랬어? 사실 나는 아빠가 우리 엄마를 정말 사랑해서 같이 사는 건가 하고 되게 궁금했거든? 집에서 둘이 대화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엄마가 기침하고 있을 때도 괜찮냐고 물어보는 법이 없었어. 엄마가 먼저 어디 같이 가자고 해도 늘 됐어하고 거절하기 일쑤였고. 그런데 이것도 마지막이 되니까 알겠어. 아빠는 엄마를 사랑했던 게 맞아"
"그걸 어떻게 알았어?"
"아까 저녁에 아버지 상사분이 찾아오셨었어. 아빠한테 인사드리고 우리 엄마랑 그분이 아빠 얘기를 하시더라구. 그분이랑 아빠가 평소 퇴직하고 나서 어떻게 지내고 싶은지에 대해 얘기 나누곤 했나봐. 아빠도 퇴직하고 엄마도 퇴직하고나면 좀 늦은감이 있지만 엄마랑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어했대. 그래서 두 분이 모두 일을 그만두는 그 날을 기다려오셨다는거야. 그게 언제가 될 줄 알고 기다린다고 했던 걸까? 일년이 될지 삼년이 될지 모르는거잖아. 거기서 느꼈어. 그건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었던거라고. 누군가를 위해 일단 시간을 주고 기다려줄 수 있는 건, 나는 그게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줄 수 있는 최고이자 최선이라고 생각해"
"맞아. 그러고보면 내가 삼촌을 좋아했던건 그런 이유였던거 같아. 삼촌은 늘 기다려주시곤 했지. 내가 혼자 뭘 잘못해도 그냥 혼자 해보고 깨닫도록 그냥 지켜봐주셨어. 참 그게 고마웠고 그래도 마지막이라 좀 아쉽지만, 네가 아빠에 대해 많이 이해하고 보내드리는 거 같아서 다행이다"
빈 차 표시등을 켠 택시가 멀리서 다가오자 손을 뻗었다. 택시는 우리 방향으로 속도를 줄여 오고 있었다. 또 보자, 조카의 어깨를 톡톡 치며 인사했다. 택시에 올라타고 조용한 밤거리 속을 가로지르며 방금 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먼 과거처럼 느껴진 장례식장의 풍경을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가족들과의 만남, 외삼촌의 영정사진 그리고 방금 전 조카와의 대화. 조카와의 대화를 통해 듣게 된 외삼촌 이야기는 나에게도 굉장히 의외였다. 사랑이라는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무뚝뚝하고 기계 같으신 삼촌도 마음속에 나름 그만의 사랑 방식이 있었구나. 역시 사람은 사랑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구나 생각했다. 우리는 어쩌면 평생 동안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해해 가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자기만의 경험을 토대로 각자가 생각하는 사랑을 정의해 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서로는 그것이 사랑임을 이해하는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한다. 때로는 그것이 그들의 사랑이었음을 깨닫기도 전에 이별을 하거나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삼촌은 숙모의 사랑을 알고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