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온 Feb 07. 2024

영화 <괴물>, 태풍이 오는 한 모두가 젖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


하나하나 곰곰이 뜯어볼수록 더 좋아하게 되는 영화. 영화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등장인물들의 안부가 자꾸 궁금해지는 영화예요.



 영화에 대한  감상은 '괴물을 찾고 있는 내가 괴물이었다' 부류의 감상과는 거리가 있어요. 괴물이 누구냐는 중요하지 않은  같아요. 괴물을 찾고 있는 관객이 괴물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제가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은 '모든 사람과 상황은 입체적이기 때문에 무언갈/누군갈 멋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보이는  다라고 믿어선 안된다.' 쪽에  가까워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원스>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까만 눈동자로 타인을 온전히 관조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타인을 납작하게 만들지 않으면, 보이는  다가 아니라는  알고서   있으면, 우리들은 금세 붉어지는 눈을 그것도  개나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없는 것들도 있다는  시를 읽지 않아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괴물에 나오는 인물들은 정말.. 정말 입체적이에요. 호리쌤은 누구보다 아이들을 위하는 착한 쌤이지만 생각 없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남자답게 사과하자' '남자가 돼서 그게 뭐야' 같은 말은 아이들에게 상처를 줘요. 애인이 떠나면 따라나가지도 못하고 현관문 구멍으로 쳐다보는 머저리지만 자신의 인생을 망친(..) 미나토와 요리의 진실을 알게 됐을 때는 산도 무너뜨리는 태풍을 뚫고 집 앞에 찾아가 사과하는 사람이에요. 교장쌤은 마트에서 시끄럽게 뛰는 아이를 몰래 발 걸어 넘어뜨리지만 괴로워하는 미나토에게는 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거라고 알려줘요. 미나토와 요리도 마찬가지고요. 요리는 방화범이고.. 미나토는  (의도했든 아니든) 한 선생님의 직장을 잃게 했어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히어로와 빌런 선인과 악인을 찾고 그들을 구분 짓는 데에 익숙한 저에게 이 영화는 불편할 정도로 인물들이 입체적이었어요. 평소처럼 인물을 나눠야 되는데. 명확히 나눠지지 않고 이 사람이 좋다가도 싫고 밉다가도 안쓰러워지니까요. 영화를 보며 느꼈던 그 감정을 계속 되뇌려고 해요. 절대선과 절대악은 없다. 한 면만 보고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구분 짓는 행위가 악일 뿐이다. 한 인간은 칸이 나뉜 팔레트가 아니라 스펙트럼이다. 전부 섞는다면 검은색이 아니라 하얀빛인 거다.



그리고 정작 요리를 괴롭히던 조연 친구들은 시점이 바뀔 때마다 길거리에, 학교에 배경처럼 자연스럽게 나와요. 영화의 초반 걸스바 건물에 불이 났을  소방차를 뒤따라가던 아이들도 얘네고, 호리쌤 놀리던 애들도 얘네. 그리고 처음 관악기 소리가 나오는 장면에서도  친구들이 화면에 나오더라고요. 사실  친구들은 명백히 '잘못'이라는  했는데 어른들은 끝까지 모르고요, 혼내지도 않고요, 심지어는 영화조차  친구들을 조명하지도 않아서 관객마저 관심을 크게  두게 돼요.


 친구들이 영화 전반에 걸쳐 일상적인 화면에 자연스럽게 나오는데,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그게 '정상'처럼 느껴지거든요. "어릴   그렇게 크는 거다.", "사내 녀석들은 원래 장난이 짓궂다" 이런 말들처럼. 같은  친구를 놀리고 거기에 동참하지 않으면 '  좋아하냐?' 따위의 뻔한 말로  크게 놀리는 목소리  학생들. 어느 학교 어느 반에나 있던  영화  학생들의 존재가 제겐 정상성에 대한 고발처럼 느껴졌어요. 사회가 말하는 정상성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우린 얼마나 잘못된 평범을 좇으며 사는지. 미나토에게는 엄마가 말하는 '평범한 가족'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는 것보다  어렵고 폭력적이었을 테니까요.



영화를  번째 봤을  생각이 바뀐 지점들이 있었어요.


영화에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들 있잖아요. 호리 선생님이 걸스바에 다닌다는 소문, 교장 선생님 손녀를 죽게   남편이 아니라 교장선생님이라는 소문 그리고 미나토의 아빠가 불륜을 하다 죽은 이야기. 처음에 저는 호리쌤은 걸스바에 다니지 않고, 손녀를   교장쌤이고, 미나토의 아빠는 불륜이 맞다고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문득 호리쌤이 걸스바에 다니는  맞을 수도 있겠다, 교장 선생님이 아니라 남편이   수도 있겠다, 미나토 아빠의 불륜 이야기는 미나토가 지어낸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게 뭐든 멋대로 판단하고 싶지 않아졌나 봐요. 오해에서 비롯된 태풍을 그린 영화  주인공들을  이상 오해하고 싶었나 봐요.


그리고  지점은 모두 생각하는 바가 다를  같아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궁금하기도 했어요. 영화에 나오지 않는 인물들의 배경지식까지 창조해 둔다는 감독과 작가는 분명 무엇이 진실인지 정해뒀을 텐데. 무엇이 진실이든 이해된다는 점에서 감독과 작가는 천재 같아요....  인물을 창조한다는  실로 엄청난 일이에요...



또 하나 생각이 바뀐 건 결말에 대한 부분이에요. 처음 봤을 때 저는 미나토와 요리가 열차에서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마지막에 숲을 행복히 뛰어가던 장면은 가짜일 거라고. 그런데 두 번째 봤을 때 뭔가.. 죽은 게 아닐 수도 있겠더라고요. 창문을 열었을 때 아무도 없는 기차와 열려있는 반대편 창문 컷을 보는데 왠지 그대로 믿게 되는 거예요. 처음 봤을 땐 같은 컷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안 들었는데. 두 번째 볼 때는 뒤집힌 열차 창문을 통해 수로로 빠져나와 드넓은 숲을 막 소리치며 뛰어다닌 아이들이 실제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태풍이 치고 있는데 어떻게 날씨가 그렇게 맑고 나무들이 멀쩡하냐는 물음에 대한 제 생각은 이래요. 어쨌든 괴물이라는 영화는 계속해서 전지적 작가시점이 아닌 각각 등장인물의 시점으로 그려졌어요. 1부에서 관객은 미나토의 엄마가 보는 만큼만 볼 수 있고요, 2부에서는 호리 센세가 보는 만큼만 볼 수 있어요. 저는 1부에서 돼지 뇌 혹은 로봇 혹은 사이코패스 같던 학교 선생님들의 섬뜩한 태도가 '실제로'도 그랬을 거라곤 생각 안 하거든요. 관객이 본 건 엄마의 시선일 거라고 생각해요. 같은 맥락에서 낙원 같던 마지막 장면도 아이들의 시선일지도 모르죠. 실제로는 여전히 비가 오고 있을 수도 있죠. 그게 미나토와 요리가 함께 보던 세상일 수도 있죠. 우리는 달의 뒷면을 보지 못하지만 달은 여전히 달이니까.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애들이 죽은 줄 알았을 때도 이상하게 그게 막 슬프지는 않았거든요. 죽음이라는 결말에 슬퍼하지 않는 제 감정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건대 아마 이 결말에서는 죽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서 그런 것 같아요. 햇살 아래든 빗속이든 아이들은 새로 태어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새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하게 됐으니까요. 말할 수 없어 트럼펫을 불던 미나토는 트럼펫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토해낼 수 있게 됐으니까요.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이 카드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딱 처음 봤을 때 이 괴물 카드가 제 눈엔 기찻길 위의 거대한 하트로 보였거든요. (물론 오피셜 아니고 멋대로 판단한 거예요. 그냥 팔다리 달린 하트일 수도 있어요..)


미나토와 요리가 처음 숲 탐방을 했을 때 기찻길은 철장으로 막혀 있어서 거기로 넘어가지 못했잖아요. 철장 너머의 기찻길을 쳐다보기만 했죠.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둘의 아지트는 탈선한 기차칸이에요. '탈선'한 기차칸. (저는 이게 많은 걸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아아)  그래서 기찻길 위의, 기찻길보다 훨씬 더 큰 하트로 보이는 이 카드가 제겐 이렇게 읽혔어요


사랑은 정상성 안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위에 있다.

사랑이 정상성보다 더 크다.


그러니 (그놈의) 정상성 안에만 사랑이 있다고 여기는 세상이 되려 괴물인 거라고.


팔다리 달린 하트가 맞다면, 자신들의 사랑이 괴물 취급 당하는 세상에 세뇌당한 무의식이 그렇게 그렸을 수도 있겠고요. 요리는 실제로 자기가 돼지 뇌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고쳐주려는(..) 아빠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아이였으니까.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저는 붕괴가 되네요.. 여러분은 이 카드를 어떻게 읽었는지 알려주세요.



가장 자주 떠올리는 장면은 음악실 장면부터 미나토가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부분이에요. 교장선생님은 비밀이 있는데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들킬까 봐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하겠다는 미나토에게 그럴 땐 차라리 후 하고 불어버리라며 트럼펫을 건네요. 그러고는 둘은 있는 힘껏 악기를 불어 소리를 내요. 시끄럽고 아름다운 울음 같은 소리를.


1,2,3부에 모두 이 소리가 들어가잖아요. 미나토를 걱정하는 엄마에겐 이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을 거고요 친구들과 집에 가던 가쿠에게는 그냥 잠깐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새로운 소리였을 거고요 또 다른 누군가에겐 소음이었겠죠. 단 한 명 호리쌤은 이 소리를 듣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는 가늠이 안 돼요. 아마 소리의 본질을 가장 가깝게 느꼈을 인물이 아닐까 싶어요. 호른과 트럼펫 소리에 섞인 괴로움들을 오직 호리쌤만이 어렴풋이 들었을 것 같기도 해요.


특히 배경음으로는 호른과 트럼펫 소리가 깔리면서 자전거를 타고 요리에게도 달려가는 미나토 장면이 계속 생각나요. 저는 그때의 트럼펫 소리가 뱃고동 소리처럼 들렸어요. 쏟을 듯 아슬아슬하게 물컵을 쥐고 있던 소년이 빗속으로 뛰어들어 목적지를 향해 마구 페달을 밟는 장면이 마치 바다로 출항하는 배 같이 느껴졌어요. 아마 미나토는 요리에게 달려가는 자전거 위에서 최초로 자신을 긍정하지 않았을까요? 새로 태어날 필요가 없다는 걸, 새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걸 그때 깨닫지 않았을까요? 부정하던 자신을 긍정하게 되는 순간과 뱃고동 같은 트럼펫 소리가 너무나 잘 어울려서 가슴이 쿵쿵 뛰었어요. 그 뒤로 깔리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Aqua까지..



세상을 바다로 만들어버릴 듯 불어오는 태풍 속에서는 잘 닦인 길에서 잘 걷던 사람도 넘어져 나뒹굴어요. 그리고 방금까지 길이던 곳도 쓰러진 나무에 덮여 더 이상 길이 아니게 되고요. 그래서 태풍이 왔을 때 아이들이 가장 자유로웠던 게 아닐까 생각해요. 흰 선의 바깥쪽과 안쪽이 무의미해지니까. 태풍이 오는 한 모두가 젖게 되니까. 그러면 더 이상 젖지 않게 되니까요.


미나토와 요리와 사오리와 호리와 교장쌤 모두가 결국엔 행복해지면 좋겠네요..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깨달은 건데, 인물이 입체적이면 (정확히는 사람은 누구나 입체적이라는 걸 깨달으면) 그 인물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드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 같아요.


제게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면을 가지고 계실 여러분도 행복하시길 진심으로 바라요.

매거진의 이전글 내일로 향하는 가장 똑똑한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