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온 Feb 11. 2024

나는 늘 그 편지를 수신한다.

영화 <벌새>에서 주인공 은희는 많은 이들과 관계하며 성장해 나간다. 


가족부터 친구, 남자친구, 학교 후배, 병원 의사 등 다양한 관계가 나오지만 나는 늘 ‘영지’와의 관계에 마음이 동한다. 영지는 은희의 한문 선생님이다. 은희가 다른 어른들과는 다른 것 같다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다고 생각하는 그런 어른이다. 


실제로 영지는 은희의 삶에 작은 지표가 되어준다. 영지는 가정폭력을 당하는 은희에게 “너 이제 맞지 마. 누가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알겠지.”라고 말해준다. 또 힘들어하는 은희에게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펴 봐. 그리고 움직이는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손가락은 신기하게도 움직여져.”라고 한다.


이처럼 영지는 은희에게 길을 제시해 준다. 영지를 만나기 전까지, 세상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종종 은희를 끼워주지 않았다. 중학생이라는 이유로 우울과 혼란도 허락되지도 않는 듯했다. 그러나 영지는 그런 은희를 이해하고 나아가 동등한 위치에서 해결책까지 제시해 준다. 자신도 불안하다고 숨김없이 드러내는 영지를 보며 은희는 세상과 조금씩 연결된다. 


무엇보다 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의 편지다. 영화의 후반부에 영지가 은희에게 남긴 편지가 잔잔한 영지(김새벽 배우)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온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학원을 그만둬서 미안해. 돌아가면 모두 다 이야기해 줄게.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지 고민되는 밤이면 나는 늘 이 편지를 꺼내 읽는다. 이제는 이미 다 외워버려서, 구태여 읽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되지만, 그럼에도 직접 눈으로 읽고야 만다. 내가 아닌 은희에게 발신된 편지라는 걸 알지만, 나는 늘 자발적으로 그 편지를 수신한다. 


나쁜 일들이 닥쳐도 기쁜 일도 있으리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와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사는 게 어려워 마음이 어지러워도, 결국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누군갈 만나 무언갈 나누면서 살아가고, 그 신기한 세상이 우리 삶이라는 것. 이 간단하고 가벼운 영지의 말이 늘 내 이정표가 되어준다. 


그러나 이 편지의 본질은 마지막 문장에 있다. 돌아가면 모두 다 이야기해 줄게. 영지는 무엇을 이야기하려던 걸까. 돌아오면 다 이야기해 준다며 은희를 안심시키던 영지는,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사고를 당해 결국 ‘돌아오지’ 못한다. 모든 해답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영지의 부재는 오히려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돌아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려고 했을까. 영지가 말하는 ‘모두 다’는 무엇일까. 하고 잠잠히 생각하다 보면, 모르긴 몰라도 해답이 이미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된다. 전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알고 있던 그 해답을 나도 찾고 싶어 진다.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영지의 편지 덕분에 길을 덜 잃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나도 누군가에게 영지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진다. 


은희의 나이를 훌쩍 지나 영지의 나이를 지나고 있지만, 난 여전히 은희 쪽에 가까운 듯하다. 여전히 세상은 어렵고 어지럽다. 그러나 결국에는 은희보다는 영지에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내가 해내고 싶은 성장이다. 


단 7문장으로 어떤 삶을 살리는 영지처럼 좋은 글을 써내고 싶다. 언젠가는 모두 다 이야기해주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대학교 첫 교양수업이 내게 미친 영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