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삶을 소화하지 못해도 삶을 좋아할 수 있다
시(詩)를 전부 다 이해해야만 시에 대해 말할 자격이 주어지는 줄 알았던 때가 있다. 작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시를 이루는 모든 문장을 전부 소화해야만 그 시를 좋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늘 시가 어려웠고 시에 대해 말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그러던 중 대학에 입학해 처음으로 들었던 시 수업에서 교수님이 해주신 말은 시를 포함한 다양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한 편의 시를 전부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단 하나의 문장이라도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왔다면 그걸로 된 겁니다.”
교수님의 충격적이고도 다정한 허락(?)하에 나는 시의 구절 하나하나를 뜯어서 볼 수 있게 됐다. 더이상 수능 공부를 할 때처럼 이 구절이 시 전체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그래서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에 매이지 않을 수 있었다. 외국어처럼 느껴지는 시구의 향연에서 딱 한 문장이 눈에 들어오면 그 페이지를 통째로 접어뒀다. 앞뒤로 무슨 맥락인지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다음에 또 펴서 읽을 수 있게. 그러자 시가 좋아졌다. 시를 읽는 게 쉬워졌다. 그게 신기해 시집을 더 자주 펼치게 됐었다.
양자역학을 다루는 SF 연극과 시 감상이 대체 무슨 관계인가 싶지만, 연극을 보며 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이 극에 교수님의 말을 그대로 전달해 주고 싶은 주인공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SF 연극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은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과 다중우주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극은 크게 세 개의 우주(시공간)로 나뉘어 진행되는데 각 우주가 긴밀하게 얽히고설켜 있다. 처음에는 물리학도 ‘차연’이 야광버섯산 동호회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물리에 대해 마구 떠드는 장면이 나오더니 조명이 바뀌며 기억을 잃고 지구대에 와 있는 어느 노파가 등장한다. 두 우주를 오가는 사이에 의미 모를 숫자를 세는 목소리가 들린다. 140-1, 140-2, 140-3….
주인공 차연은 아인슈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한 줄의 방정식으로 우주를 설명하려고 고군분투한다. 논문을 쓰기 위해 모든 열정을 쏟고,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좋아하는 일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푸릇푸릇한 사람이다. 그러나 극의 중반부를 지나며 차연은 우울에 사로잡힌다. 부당한 세상을 맛보며 만년 조교를 하게 되고,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던 선배는 불확실한 말로 답답하게 군다. 방정식처럼 딱 떨어지지 않는 일이 반복되자 ‘전부 부질없다’는 마음이 차연을 좀먹은 것이다. 차연은 삶을 정확히 증명할 수 없자 좌절한다.
"아인슈타인은 단 한 줄의 방정식으로 우주를 설명하려 했다. " 차연이 극이 끝나기 직전까지 중얼거리는 이 문장은 삶을 대하는 차연의 태도와 닮아있다. 차연은 인간의 삶을 단 한 줄의 방정식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자꾸만 생기는 변수만 파악하면 다른 우주도 완벽히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차연. 그러나 차연이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다. 삶은 변수 그 자체라는 것. 우리는 죽을 때까지 우리 앞에 일어날 변수를 예측하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평생 동안 욕망을 실현해 나가며 분투하지만, 결국 그 욕망의 정거장에서 미끄러져 소진되고, 빈 껍데기(기표)로 남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떠한 희망 속에서 삶을 살아가야 할까.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은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작품 소개 中)
불확실해서 절망스러운 삶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이 제시한 답은 다름 아닌 야광 버섯이다. 끝날 때쯤이 되어서야 극 중 계속 울려 퍼지던 숫자의 비밀이 밝혀진다. 자신이 누군지 잊을 정도로 기력이 쇠한 서 회장이 자신이 좋아하는 야광 버섯만은 계속해서 심고 가꾸며 그 수를 세는 소리였던 것이다. 관객에겐 내내 소음처럼 들렸던 그 숫자가 서 회장에게는 삶을 긍정할 수 있게 해주는 행위였다.
삶을 대하는 건 시를 읽을 때와 같다. 야광 버섯의 수를 세는 일, 연인과 나누는 시답잖은 농담, 동호회 동료의 따뜻한 한마디. 삶의 어느 한순간이 마음에 들었다면 그것으로 된 거다. 그래서 삶을 예측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좌절이나 포기가 아니라 예측이 필요 없는 지금 이 순간을 느끼는 것뿐이다. 극 중에는 “주변부가 아닌 자길 기억해야 해요.”라는 대사가 계속 나온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가 무얼 느끼면서 사는지. 지금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시 구절처럼 작은 순간들을 마음에 들이다 보면 어느새 삶이라는 시 한 페이지 전체를 접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중우주를 다루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상식이 통하는 건 단 한 줌의 시간일 뿐”이라며 삶을 비관하는 딸 조이에게 엄마 에블린은 말한다. “그럼 소중히 할 거야. 그 한 줌의 시간을.”
에블린이 조이에게 그랬듯 차연에게 말하고 싶다. 삶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한대도 우리는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삶을 소화하지 못했어도 삶을 좋아할 수 있다고. 너는 끝끝내 변수를 예측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 사실이 삶을 좀 더 쉽게 만들 거라고. 계속 펼쳐보게 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