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예술을 사랑하는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누구에게나 좀처럼 잊기 힘든 공간이 있다. 머문 시간과 상관없이 꼭 고향처럼 느껴지는 곳이 있다. 나에게는 파리의 한 서점이 그렇다. 노트르담 성당을 끼고 흐르는 센 강변, 늘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노란 간판의 작은 책방.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Shakespeare and Company)’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의 첫인상은, 어이없을 정도로 관광지 같지 않은 곳이었다. 어느 시간대에 가도 줄을 서서 들어가야 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 서점 안에는 의자가 아주 많았다. 책장 밑, 서점 구석, 사람들이 지나는 길목까지도 크고 작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누구나 그곳에 앉아 원하는 만큼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심지어 2층은 판매 서적 대신 누구든 꺼내 읽을 수 있는 고서로 가득 찬 책장들과, 다양한 형태의 의자만 있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지만 여전히 빈 의자는 많았다.
적잖은 충격이었다. 아무리 서점이라도 회전율을 전혀 상관하지 않는 관광지라니. 서점 안이 이렇게나 꽉 차는데 책 읽을 자리를 이렇게나 많이 내어주다니. 어느 나라의 유명 서점은 입장료까지 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충격을 받고도 남을 일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나도 푹신한 소파에 앉아 비치된 책을 집어 읽었다. 책의 언어는 상관없이 그저 그곳의 책이 궁금했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책장의 책을 죄다 꺼내 보며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서야 서점에서 나올 수 있었다. 곧장 집으로 돌아와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 대해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눈앞에 펼쳐진 서점의 이야기는 그날 서점에서 느낀 감정들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했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1919년 프랑스 파리로 넘어온 미국인 실비아 비치가 세운 영미문학 전문 서점으로, 어거스트 헤밍웨이와 제임스 조이스 등 문학계의 거장들이 거쳐 갔다. 특히 헤밍웨이는 파리 생활을 담은 자서전 에서 이 서점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찬사를 보냈다.
너무나 가난하여 책을 살 돈은 물론이고 대여할 돈도 없던 헤밍웨이에게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의 주인 실비아 비치는 무료로 책을 읽게 해주었다. 이 책방 덕분에 좋은 책들을 많이 읽을 수 있었다고 헤밍웨이는 서술했다. 이미 그때부터 책방의 목적이 단순한 '책장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알고 있는 곳이다.
현재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공동대표 ‘다비드 들라네’는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당신이 그저 책으로 가득한 벽을 본다면 그것이 전부라면 다시 찾아가진 않겠죠. 그냥 인터넷으로 사면 되니까요. 많은 서점이 책을 둘러싼 서비스를 제공해요. 책을 둘러싼 이야기, 공간, 느낌, 경험 당신이 믿는 것에 관한 것을 제공하잖아요. (중략) 진열된 책들은 서로 조화되고 당신이 그걸 봤을 때 ‘나는 이 책을 읽고 싶어’ 아니면 ‘저 책을 읽고 싶어’라고 생각할 수 있죠. 서점에 오면 책을 읽고 싶고 이야기를 알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마음이 더 강해질 겁니다.“
- tvN 인사이트 특별기획 다큐, 김영하의 ′책의운명′ 中
이 인터뷰를 보니 책방 곳곳에 붙어있던 하트 모양 포스트잇이 떠올랐다. 포스트잇에는 책방 지기들이 직접 손글씨로 적은 책 추천 글이 적혀 있다. 소설의 줄거리나 추천 대상 등의 짧은 문장들로 책을 소개한다. 방문객을 대하는 서점의 태도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를 보면 과거부터 지금까지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책’이 아닌 ‘책을 읽는 행위’, 즉 독서를 다루는 서점이라고 느껴진다. 그저 책을 판매하는 것보다 책을 읽는 사람의 마음을 아는 서점, 책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고 있는 서점. 결국 아무리 좁아도 의자가 많을 수밖에 없는 서점인 것이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가 특별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1922년, 영문 현대 소설의 대표작인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바로 이곳에서 출판되었다. 당시 연재하던 미국의 문예잡지에서 내용이 부도덕적이라며 게재 금지를 당하자, 책방의 주인 실비아 비치는 조이스를 지원하여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서 소설을 출판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율리시스>는 현재까지도 '가장 위대한 영어 소설'이라고 불린다. 이곳의 역할이 서점에서 그친 것이 아닌, 예술가의 창작 활동을 아끼지 않고 지원한 예술의 공간으로 작용한 것이다.
현재 이곳은 실비아 비치의 정신을 이어가는 듯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며 그들의 예술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서점의 2층이 현재는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있지만, 원래는 예술가들이 지내는 공간이라고 한다. 같은 건물의 다른 두 층은 예술가가 묵을 수 있는 레지던스로 사용 중이다.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파리에서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헤밍웨이와 제임스 조이스에게 그랬듯 말이다. 이에 대해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우리가 모두 알맞은 때(right moment)에 알맞은 사람(right person)을 만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만약 당신이 알맞은 시기에 알맞은 사람을 만난다면 당신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죠. 그게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의 생각입니다.”
- tvN 인사이트 특별기획 다큐, 김영하의 ′책의운명′ 中
알맞은 때와 알맞은 사람. 그것이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아는 이 작은 서점은, 기꺼이 ‘알맞은 만남’이 되어준다. 비단 가난한 예술가에게뿐만 아니라, 책방을 찾은 모두에게 말이다. 책방에 방문한 당신의 삶이 극적으로 바뀌진 않더라도 당신의 마음 속 작은 변화는 생길 것이다. 당장 앉아 책을 읽고 싶은 마음으로, 더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으로.
나 또한 이 아름다운 공간에 매혹되어 짧은 파리 생활 동안 틈만 나면 찾아갔다. 진열된 책을 보기 위해, 책에 둘러싸이기 위해, 나처럼 서점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구경하기 위해 갔다. 갈 때마다 책과 의자의 위치는 조금씩 바뀌어 있었고, 그래서 눈에 들어오는 책도 매번 달랐다. 게다가 서점 안에 있는 손님들도 매일 달랐으므로, 매 방문이 새로웠고 고유했다.
그렇기에 당신이 언제 어떤 식으로 이곳을 방문하든 그것은 ‘알맞은 만남’일 것이다. 당신을 만날 ‘알맞은 때’를 기다리던 작은 책방 안에서 당신은 속수무책으로 이곳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책과 하트 포스트잇, 그리고 읽을 자리가 당신을 맞아줄 테니 말이다.
덧. 2층엔 귀여운 고양이 Aggie가 살고 있다. (이름마저 ‘애기’라니!) 워낙 사람을 좋아해 책을 읽는 당신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오를 테지만, 혹 그가 자고 있다면 깨우지는 말 것. 밤새 책을 읽느라 못 주무셨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