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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호 Jan 26. 2021

#2 빨리 달릴 생각은 없었다

[코로나 시대의 밀라노] 멀리 가고 싶을 뿐.

정말 집에만 있을 수는 없다. 


밀라노 시내를 쏘다니며 건축물과 전시를 보고, 쇼룸을 구경하고, 맛있는 식당을 방문하고, 쇼핑하기. 꼬모나 베르가모, 몬챠, 끄레마, 파르마 같은 근교 작은 소도시로 여행 가기. 조금 더 마음먹고 로마, 나폴리, 사르데냐, 시칠리아 같은 남부 도시나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이웃나라에 가서 꺼질 줄 모르는 눈망울을 반짝반짝 켜고 분위기를 흠뻑 담아오기.


같은 것들을 못 해도. 밀라노에서 살아가야 했다. 


최대한 멀리로 뻗어 가려는 마음을 개켜 호주머니에 넣고, 다른 것 필요 없이 내 몸 하나 잘 꾸려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운동을 꿈꾸어 보았다. 이곳에서의 삶은 생활만으로 우려를 일으키는 작은 모험이자 실험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 했을 운동, 하고 싶은 운동 리스트 가장 마지막 줄에 있는 그것을 해보기로 했다.



그것은 러닝이었다. 





러닝 실험기


Introduction


러닝은 어쩌면 가장 간편하고 간단한 운동 중 하나다. 하지만 6년 전 발목을 삐고, 치료 시기를 놓쳐 만성 통증에 시달렸던 필자에게 달리기는 불가능한 운동 중 하나였다. 조금만 빨리, 오래 걸어도 통증이 있었기에 뛸 수는 없겠지, 생각하고 살았다. 

발목에 무리가 없는 수영과 요가, 필라테스를 하며 다친 발목과 여생을 살리라 마음먹었다. 풋살과 배드민턴, 테니스가 아른거렸지만 꾹 잘 참고 살았다. 


나의 러닝 트랙

Method

준비물: 겨울에도 웬만해서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이곳의 날씨 & 달리기 앱 'RunDay'

방법: 밖으로 나간다. 생각 없이. 

목표: 달리기 앱에 있는 비기너를 위한 8주짜리 달리기 프로그램. 완료하면 30분을 뛰게 된다. 


집 근처에 나빌리오가 있다. 좁은 폭의 물가에는 러닝 하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이 많다. 그들 옆에서 느리게 뛴다. 트레이닝 바지와 얇은 운동복을 겹쳐 입는 촉감이 기분 좋다. 가볍지만 든든하다. 이태리 애들이 옆을 뛴다. 마트에서, 길에서 그들과 마주칠 때면 이방인의 이질감이 잔뜩 들지만 그들도 달리고, 나도 달리고 있을 때는 어쩐지 이방인의 수치가 떨어진다. 제멋대로 동질감이 든다. 



러닝 첫 날의 날씨, 빛, 온도, 습도...


벽마다 그래피티. 춥니? 달리다 보면 춥다가도 땀이 나고, 웅크리고만 싶던 기분을 잊는다.


빵 먹는 뉴트리아와 겨울 담쟁이. 생활의 발견 

Results


달린 후로 동네가 넓어졌다. 버스나 메트로를 타고 갈 법한 곳들이 걸어서, 뛰어서 갈 만한 곳이 되었다. 지도를 보고 인근 공원을 하나씩 찾아가 맛보고 오지만, 가는 길에 만나는, 지도로 짐작할 수 없는 골목과 블럭, 동네마다의 분위기와 정취야말로 맛깔났다. 

밀라노 내 관광지도 아니고, 집 근처 도보권도 아니어서 달리기가 아니었다면 굳이 닿지 않았을 무미의 골목길들이 달리기를 가장 즐겁게 한다.




눈, 비 없는 날씨마다 뿌듯하게 찍힌 '참 잘했어요' 도장들



눈, 비 없는 날은 매일 달렸다. 하루는 이곳으로서 아주 이례적으로, 큰 눈이 왔다. 


달릴 수는 없는 도로 사정. 왼쪽은 밀라노 스타벅스 로스터리.

못내 아쉬운 웃음이 났다. 좋아하는 눈이 와서 웃음이 났고, 달리기를 못함에 아쉽다는 사실이 뿌듯해 웃음이 났다. 두텁게 쌓인 눈이 질게 녹고 다시 뛸 수 있는 상태가 되기까지 며칠을 창밖을 내다보며 보내야 했다.



아침에 나가면 잔디는 흰 서리를 입고 있다. 공원에 아무도 없는 시간. 마스크를 벗어 목에 걸고 덜렁거리며 크게 숨 쉬어 보는 호사를 누린다. 


포인트 색깔 창이 귀엽다.

신축단지로 추정되는 새로운 동네에도 흘러들어 갔다. 넓고 단조롭지만 쾌적한 모습. 수도권 신도시의 분위기가 풍겨 어쩐지 잠시 한국에 간 듯한 느낌. 


커다란 나무들은 오랜 공원의 주인이자 증인


동산에 오르면 알프스가 잘 보인다.

이탈리아 북부인 밀라노. 건물 사이로 가끔 알프스가 보인다. 언덕 위에 올라갔을 때는 알프스의 어깨가 더 길게 보였다. 한국과 다르게 생긴 건물, 간판, 도로, 글자, 사람들을 볼 때보다도 저 알프스를 보면 이곳이 정말 외지가 맞는구나. 실감 난다. 알프스산만큼은 나를 구성하는 것들 바깥에 있는 모양이다. 

두껍게, 얇게 스치며 나를 칠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Disccusion


발목은 우려보다 괜찮았다. 자세를 각별히 유의하고, 천천히 달리고, 마사지와 스트레칭으로 관리하며 예의주시해서였을까. 근육이 피로했던 초반 몇 주가 지나자 달리기에 대한 자신감에 든든한 굳은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평생 절대 안 할 것 목록 1위에 마라톤을 올려두었었는데. 어쩌면, 어쩌면, 설마...


이곳에 와서 기분 좋은 취미를 하나 얻으며 못 한다고 여겼던 것들을 돌아본다. 당연히 못 할 것들과 못 하는지도 모르는 것들이 언젠가 불쑥 찾아올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갖지 못한 것, 하지 못하는 것은 쉽게 보이고 자주 엄습한다. 이 때다 싶은 자신감은 걸핏하면 상처입은 얼굴로 구석을 찾는다. 그럴 때면 이곳에서 열심히, 천천히 달리던 아침 날을 생각해야지. 그런 장면들을 차곡차곡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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