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불라불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우 Oct 17. 2022

환생 일기 (4)

호접지몽



   하늘과 맞닿을 만큼 높다란 담장 너머에 잔디가 이처럼 푸르게 펼쳐져 있을 줄은 몰랐다. 그 넓이란 월드컵 경기장 백 개를 나란히 붙여놓은 듯,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까지 루시와 걸어온 환계換界의 오솔길도 어쩌면 이 마당 안에선 그저 작은 한 구석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철을 잊은 꽃들이 저마다 활짝 핀 채 여기저기서 꽃무덤을 이뤘고, 그 사이로는 벌과 나비,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졸졸졸 냇물 소리가 쉼 없이 들렸으며 바람은 또 얼마나 선선하게 불어오는지, 유명 화가들을 모두 불러 낙원의 모습을 그리라 한들 이렇게까지 멋진 작품은 결코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넋을 잃고 멍하니 서 있는데 몇 걸음 앞장섰던 루시가 돌아와 나지막이 속삭였다.

   “진우야, 여기에서의 한 시간은 인간계의 백 년이야. 서둘러야 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꽃길 사이의 돌 받침을 밟아 루시의 뒤를 얼마간 따라갔다.

   오분 즈음 걸었을 때 저만치에서 무언가가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몇 걸음 다가가니 그것은 다름 아닌 하얀 광목廣木이었다. 햇살 좋은 날, 마당에 널어놓은 홑이불처럼 그저 눈부시게 하얗고, 바스러질 듯 고운 천들이었다. 코를 갖다 대면 금방이라도 하얀 햇살이 묻어날 것 같았다.


   루시가 갑자기 원래의 모습대로 땅에 엎드리더니 네 발로 곧장 뛰기 시작했다.

   “서, 선배님.”

   나도 함께 달려야 하나 어쩌나 잠시 망설이는데, 바람에 나부끼는 흰 광목천 사이로 누군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루시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그에게 풀썩 안기는 실루엣이 보였다. 그가 누구인지는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잠시 후, 늘어진 천을 살짝 젖히며 마침내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도 모르게 털썩 무릎을 꿇고 넙죽 고개를 숙였다.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나온 동작이었다. 곧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우구나. 오랜 여정에 고생 많았다. 루시를 업고 왔으니 그전에 올 때보다 더 힘들었겠구나, 하하하.”

   난생처음이 분명한데,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였다. 데자뷔였을까. 조금의 꾸밈도 없는 자상함과 따뜻함이 고운 음성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여전히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환주님, 그게 아니라 진우가 어찌나 궁금한 것이 많은지 일일이 답해주느라 제가 더 힘들었다구요.”

   어쩔 수 없는 루시의 장난이자 어리광이었다. 짧은 웃음 뒤에 환주님이 말을 이었다.

   “진우야, 오래간만에 얼굴 한번 보자.”

   용기를 얻은 나는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환주님의 뒤에서 햇살이 빛났다. 그것은 마치 후광과도 같았다. 역광逆光의 눈부심을 애써 참았다. 환주님의 얼굴이 서서히 또렷해졌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범하다는 말조차도 평범한, 그저 어디서나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곱게 나이 든 동네 할머니의 얼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곱게 누빈 한복 차림이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하게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분을 어디서 뵈었더라? 강남역 지하철 안? 홍대 앞 포장마차? 가락시장 좌판?’

   머릿속 여기저기에 흩어진 기억들을 뒤적였다. 익숙한 얼굴임이 분명했지만 명확하게 딱 꼬집어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쉽게도 당장 소환되지 않았다.


   환주님이 허공에다 손을 들고 두어 번 흔들었다. 그러자 저쪽 꽃밭에서부터 한 떼의 꽃무리가 두둥실 날아왔다. 그것은 곧 의자로 바뀌었다. 꽃 의자 끝에 환주님이 살포시 걸터앉았다. 루시는 환주님의 품에서 무릎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여전히 땅에 엎드린 채였다.

   “편히 앉으려무나.”

   갑자기 내 몸이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더니 잔디 위로 다시 천천히 내려앉았다. 시원한 바람이 귀 밑으로 불었다. 만일 소나무 정자 아래였다면 그대로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환주님과의 대화는 그 뒤로 두어 시간 동안 이어졌다. 중간중간 내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루시가 놀리기도 했지만 시종일관 웃음이 끊이지 않는 즐거운 대화였다. 그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질 않는다. 메모라도 해 두었어야 했다. 만일 그랬다면 브런치의 글감으로 삼 년은 족히 우려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환주님, 이제 보내줄 시간이 되었어요.”

   두 발에 턱을 괸 채 엎드려 있던 루시가 환주님의 말 틈을 가로챘다.

   “내 정신 좀 봐. 웃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구나.”

   한복의 옷고름을 다듬은 환주님은 갑자기 팔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 손길이 너무도 따뜻했다. 환주님이 내 손바닥을 천천히 펼쳤다. 손금을 보는 것일까? 분명하지는 않았다.

   “음, 어쨌거나 이별의 시간이구나. 환신을 하기엔 아직 덕력德力이 부족하고…”

   “……”

   루시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환주님은 과연 나를 어떤 시간으로 보내려는 걸까? 다시 한번 긴장이 되었다.

   “진우야.”

   “네.”

   환주님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맑은 구슬이 세상에 또 있을까? 반짝이는 눈동자 안에 밤하늘의 모든 별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인간의 삶이란 유한有限한 듯해도 끝이 없으며, 무한無限한 것처럼 보이지만 길이 정해져 있단다. 유한과 무한의 중간 즈음으로 너를 보내려고 하니, 아쉽기도 하고 또 미안하기도 하구나.”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그저 어려운 말이었다.

   “사고事故는 네가 초래한 것이 아니지만 네 운명이며, 운명 또한 네가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니 운명과 도전을 더 즐기다가 다음에 다시 보자꾸나.”

   묻고 싶은 것이 많았고, 부탁할 것도 있었다. 그러나 단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단다.”

   환주님이 소매 깃 안에서 무언가를 조용히 꺼냈다. 작은 찻잔이었다. 가득 담긴 차茶가 찰랑거렸다. 환주님이 건넨 잔을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받아 들고 입 언저리께로 가져갔다. 역시나 처음 맡아보는 신기한 향부터 먼저 코로 전해졌다. 루시가 말했던 정수淨水가 바로 이것인 듯했다.

   마시려다 말고 우선 찻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천천히 일어섰다. 환주님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두 손을 이마에 붙이고 큰절을 올렸다. 환주님이 환하게 웃었다. 찻잔을 다시 들었다. 향도 온기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루시가 못내 아쉬운 듯 앞발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진우야, 잘 가. 다음에 만나게 되면 날 좀 기억해주면 좋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넘어 들어온 차가 혀를 살짝 적셨다. 그러자 눈앞이 천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환주님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지 천천히 생각해보렴.”

   미리 생각해둔 대답이 있었지만 끝내 말할 수 없었다.


   어둠은 더욱 짙어졌다. 어둠보다 더 어두운, 칠흑 같은 어둠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면서 이내 바스러졌다. 눈을 떠보려고 애썼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다. 나는 속절없이 어둠의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환주님의 웃음도, 루시의 기억도 그렇게 서서히 지워졌다.




   “지금은 라디오 시대!”


   아까부터 깨어 있었다. 꿈을 꾸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기엔 모든 것들이 너무나 생생했고, 너무도 또렷했다.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데 방송 진행자가 호들갑스러운 오프닝 멘트를 던졌다. 태풍 이야기였다.

   이어폰에서 들려오던 노래는 곧 끝났고,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순서를 기다렸다는 듯 부르르 떨었다. 전화기의 발신 번호를 확인했다. 역시나 아내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이 전화를 받으면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정말 꿈이었을까? 태풍, 폭우, 먹구름, 루이, 사료, 횡단보도, 노란 우산, 신호등, 트럭, 헤드라이트, 어두운 공간, 루시, 오솔길, 푸른 잔디, 그리고 환주님.

   손 안의 전화기는 여전히 진동을 보내고 있었다. 짧게 한숨을 뱉은 다음, 통화 버튼을 왼쪽으로 툭 밀어버렸다. 아내에게 전송되었을 메시지가 곧 화면에 떴다.


   ‘지금은 회의 중이니 전화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정류장에 나를 내려준 버스는 치이익 소리와 함께 문을 닫고 떠나 버렸다. 겨우 네 시가 지났을 뿐인데 주위는 이미 꽤나 어두워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한바탕 퍼부을 기세였다.

   파크 타운 사거리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수내역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슬쩍 쳐다보고는 나는 집을 향해 곧장 걷기 시작했다.




   삑삑삐삑 띠리릭. 도어록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어? 형부. 일찍 오셨네요?”

   현관에서 나를 반긴 건 뜻밖에도 처제였다. 처제의 발치 아래에서 루이가 꼬리를 빙빙 돌리고 있었다.

   “응, 처제 왔구나. 언니는? 언니, 어디 갔어?”

   구두를 벗으면서 물었다.

   “좀 전에 루이 먹을 사료 사러 갔어요.”

   사료? 설마… 아냐, 그럴 리가. 그저 우연이겠지.

   “형부가 전화를 안 받는다면서. 통화가 되었더라면 형부 오시는 길에 부탁하려고 했거든요.”

   덤덤하려고 했지만 등으로는 잔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애써 무시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안방으로 가려는데 처제가 나를 불러 세웠다.

   “잠시만요, 형부.”

   “왜?”

   돌아보았다. 처제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나를 다시 돌아서게 했다.

   “형부, 등에 묻은 이것들, 다 뭐예요? 어머? 이거 전부 털이잖아? 형부, 어디서 이렇게 털을 잔뜩 묻히신 거예요? 이게 뭐지? 분명히 강아지 털 같은데?”

   강아지 털, 루시…


   그때 출입문에서 다시 한번 삐비빅 소리가 들렸다. 루이가 재빨리 달려갔다. 곧 문이 열리고 아내가 들어섰다.

   “어? 오빠 언제 왔어요? 좀 전까지 회의 중이라더니?”

   “으으응, 그, 그게…”

   쇼핑백을 내려놓은 아내에게는 뜻밖에도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안겨 있었다. 친구를 만났다 싶었는지 아내를 올려다보는 루이는 아까보다도 더 신나게 꼬리를 흔들어댔다.

   “어머, 언니. 걔는 뭐야? 아이고, 예뻐라.”

   처제가 팔을 뻗은 채로 아내에게 다가갔다.

   “펫 샵 사장님이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 하루만 얘를 맡아달래. 아침에 도착한 유기견이라는데, 루이랑 같이 놀면 되겠다 싶어서 얼른 데리고 왔지. 진짜 귀엽지?”

   아내가 강아지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강아지는 루이에게는 조금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거실을 가로질러 내게로 달려왔다. 그 모습을 본 처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언니, 쟤 좀 봐. 집주인을 먼저 알아보네. 근데 저 아이는 이름이 뭐래?”

   장바구니를 들고 주방으로 가던 아내가 걸음을 뚝 멈추었다.

   “응, 루이랑 비슷한 이름이야.”

   설마…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루시, 걔 이름은 루시야!”


   소파 아래에 꼿꼿이 선 루시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었다. 루시가 슬쩍 웃는 것을 보는 순간, 어쩌면 그 모든 것이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때, 창문을 때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태풍은 이제부터 제대로 비를 퍼부을 작정인 것 같았다.


서, 선배님


환생 일기 끝.



* Image by Genty from Pixabay and Porongi appeared as a Special Appearance.

* 이틀에 걸친 제 꿈을 바탕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전날과 이어지는 시리즈 꿈을 자주 꾸는 편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