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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Oct 18. 2022

오지랖의 끝

드디어 악플러가 되었습니다


   글을 쓰는 것과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일정 거리를 두고 생각해야 하는 별개의 문제다. 특히나 남을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자기 계발 전문가 유정식 선생님은, ‘잘 가르치는 사람은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이며, 올바른 가르침은 배우는 자가 습득할 시간을 기다려주는 인내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또한 이어령 교수님은, 당신의 저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결국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엉터리라네. 남을 가르칠 수도 없고 남에게 배울 수도 없어. 인간이 그런 존재야. 거기부터 시작해야 하네. 그게 실존이야. (중략) 궁극적으로 인간은 타인에 의해 바뀔 수가 없다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만족할 수밖에 없어. 그게 자족이지. 자족에 이르는 길이 자기다움이야.’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작년 봄부터다. ‘심사’를 거쳐 ‘작가’가 되었고, 이후로 글을 ‘발행’하는 과정은 나름 재미있었다. 글을 쓰는 빈도가 점점 늘어나면서 졸문拙文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읽어주는 분들이 생겨났다. ‘구독’자와 ‘라이킷’ 패밀리들은 글쓰기의 재미를 배가시켜주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들이 남겨주는 정성스러운 감상들은, 앞으로 더욱 열심히 글을 써야겠다는, 기분 좋은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열혈’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겠으나 그도 역시 내 글을 빠짐없이 읽어주는 독자 중 한사람이었다. 새 글이 발행되고 나면, 매번 댓글을 통해서 소감을 전해왔다. 물론 나도 감사의 답글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댓글에는 하나같이 이러한 구절이 따라붙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나요?’ ‘작가님은 이렇게 글을 잘 쓰시는데 저는 대체 왜 그럴까요?’ ‘저는 정말 형편없어요.’

   처음엔 그저 겸손의 표현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부정적인 푸념이 필요 이상으로 반복된다 싶었을 즈음에 그가 쓴 글을 처음으로 읽어보았다. 달리 해 줄 말은 없었다. 문제점이 없어서가 아니라, 글의 내용이 아닌, ‘기본’과 ‘형식’에 대해서는 함부로 언급해선 안된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부족한데 남을 어떻게? 더구나 국문학과를 나왔다는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지 말자, 진우야.


   질문으로 보이는 요청에 답을 하지 않았더니 구독하기와 구독해제를 수없이 반복하며 알림창을 정신없이 만들었다. 결국 어떤 말이든 해야했다. 그렇지 않다고, 충분히 잘 쓴다고, 내용에 방점을 둔 답글을 우선 전했다. 그러나 그는 점점 더 자기 글에 대해 비관적으로 말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그것은 자조를 넘어섰다. 그대로 두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그때를 즈음해서 글을 함께 나누는 교수님 한 분도 그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도움 요청을 받기는 교수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댓글과 답글을 통해 그를 격려하기도 하고, 짤막한 작문 팁을 전하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그가 발행한 글의 일부를 첨삭해서 전하기도 했다.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언제나 전달 방식과 표현에 신경을 썼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전한 조언을 좀처럼 자신의 글에 반영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징징거린다 싶은 요청은 꾸준 반복되었다. 소재와 주제는 주관적인 것이어서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글의 형식에 대해선, 고칠 점을 적시해가면서 수정하기를 계속 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쓰기 태도와 결과물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강조했던 것은, 자유로운 글쓰기도 중요하지만 본인 스스로 글의 완성도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면, 다작多作을 피하고 글의 발행 주기를 늦추며 더욱더 세심한 퇴고를 하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글은 전반적으로 비문, 오탈자, 동어반복, 이중 주어, 호응 부조화 등 기본적인 퇴고조차 거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여러 편의 글을 주르륵 발행했다. 음식을 주제로 하면 포털 노출 빈도가 높아진다는 낭설을 믿었던 것인지 하나같이 죄다 먹거리를 소재로 했다. 글의 상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생각없이 쓴 티가 역력했다. 순간, 너무나 화가 났다.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

   “조언을 받아들여 개선할 생각이 없다면 더 이상 가르쳐달라는 말을 말기 바랍니다.”

   답신이 곧 돌아왔다. 나름의 항변이었다. 며칠 동안 출장을 갈 거라서 미리 한꺼번에 올린다고 했다. 물론 조금도 동의할 수 없는 변명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다음날, 그는 브런치를 탈퇴했다.

   교수님과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우리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도와주려고 했는데, 탈퇴를 해 버리다니. 공연히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처음부터 그냥 그의 도움 요청을 무시했어야 옳았던 것일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가 브런치에 모습을 나타냈다. 심사를 거쳐 다시 작가가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내심 반가웠다. 그래도 용기를 냈구나.

   반가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내 눈을 의심하는 구절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탈퇴했던 이유는, 다른 작가들의 계속되는 악플과 비방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구절이었다.

   사정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기계적인 동정과 옹호, 그리고 ‘다른 작가들’에 대한 험담을 이구동성 퍼붓고 있었다. 적시摘示한 것은 아니었으나 저간의 상황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 ‘다른 작가들’이 누군지 쉽게 알 터였다.

   반복되는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고민 끝에 남을 도왔던 결과는, 뜻밖에도 악플러라는 달갑지 않은 호칭이었다. 도와달라고 해서 도왔고, 악플러라 니 악플러가 되었을 뿐이지만, 애초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면 그런 별칭別稱 을 받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도와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냥 모른 체 할 수 있을까? 역시 그것은 나의 만용이었고 오버였던 것이다. 교수님과도 유쾌하지 않은 후일담을 나누었다.




   며칠 전,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브런치의 알고리즘이 그의 글을 내 휴대폰 화면에 가져왔다. 건너뛰면 될 것을 그래도 읽어보자 싶었던 것은, 일말의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글의 만듦새는 여전했고, 더 심각한 것은 리뷰라는 이름으로 정작 잘못된 정보를 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독자의 이해와 사실 판단에 관련된 심각한 문제였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것이 잘못된 정보라는 댓글을 남겼다. 물론 그 댓글은 빠르게 삭제되었다.

   앵그리 버드의 기질이 있는 건지 뒤늦게 화가 났다. 삭제의 이유를 물었다. 그리고 전공학과의 명예를 생각한다면 바른 글, 옳은 글을 썼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참, 하나가 빠졌다. 이 댓글 역시 기분 나쁠 테니 얼른 지우라는 말도 썼다. 옹졸하기 짝이 없지만 그날 아침, 나는 그 정도로 화가 났다. 원문도 곧 당연히 삭제되었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오늘 아침, 브런치 알고리즘 개발자를 납치하고 싶은 일이 또 일어났다. 그의 글이 또다시 내게 배달된 것이다. 절대로 읽지 말았어야 했다. 중요한 계약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런 날은 좋은 기분을 유지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머리는 그러한데 손가락이 제멋대로였다. 글을 열었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 아니 이전보다 더욱 심각한 내용이 또렷이 보였다. 그의 글에서 나는 상습적인 악플러이며 그의 첫 탈퇴를 유발한 전과자이자 최근에 또 한 번 도발을 시도해서 그에게 트라우마를 일으킨, 나쁜 놈이 되어 있었다. (그는 나를 비난하는 표현을 계속 수정하다가 결국 또 원문을 지웠다. 스스로 당당하다면 굳이 글을 지울 이유가 있을까? 그는 항상 이런 식이다. 동정을 구하다가 궁지에 몰리면 원문을 바이든 해버린다.)


   댓글 독자들 역시 그의 글에 동조해서 지금도 여전히 나를 신나게 비방하는 중이다. 발단과 전개에는 애당초 관심도 없을 몇몇 구경꾼들은 사실 확인도 하기 전에, 어쩜 그런 나쁜 인간이, 하며 일단 화살부터 날리고, 힘내세요, 전 작가님 글이 좋아요 하며 입에 발린 폭탄을 던지고, 우리끼리 잘 지내자고요, 지뢰를 슬쩍 묻어둔다. 그들을 불러 사실은 이렇다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들은 처음부터 사실 확인보다는, 어머 어떻게 그런 일이, 작가님 파이팅, 우리는 같은 편, 하며 동정표 날리는 것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심쩍어 하는 몇몇 이들의 질문에 대해선 팩트 체크네, 자기 불찰이네 하며 착한 사람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이런 걸 가리켜 우리는 위선이라고 부른다. 그의 글에 조금의 진실도 담길 수 없는 근원적 이유다. 허탈 나머지, 결국은 웃음이 나온다.


   반성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요청을 받아들여 남들이 도와주었던 사실조차 비방과 악플이라고 매도하고 있다는 것이 그저 한심스러웠다. 그렇게 해서, 사정을 모르는 다른 이들로부터의 무근본 동정을 얻는 것이 과연 자신이 터득한, 따뜻하게 사는 삶의 방식인가? 스스로의 부족함을 타인의 동정으로 대충 덮으려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글의 부족함을 늘 부끄러워하고,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며, 그래서 부족하고 모자란 글이지만 글자수 이상의 퇴고를 한 다음, 조심스럽게 발행 버튼을 누르는 내가, 발행 후에도 수시로 글을 손 보는 내가, 나와 인연이 없는 남의 글에다 대고 어떻게 제멋대로 비문이니 엉터리니 하는 악플을 달 수 있을까? 고등학교 시절 글쓰기를 가르쳐 주셨던 천정국 선생님은 백일장에서 상을 받아온 내게 어김없이 매를 들었다. 내가 쓴 것은 참된 글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여전히 눈물을 찔찔 흘리고 있는데 한참 뒤에 오셔서 한마디 툭 던지는 것이 그 날의 가르침의 전부였다.

   "최선을 다해 진실할 자신이 없으면, 글 따위는 아예 쓰지마라."

   나는 글은 쓰지 않더라도 그저 진실되게 살게 해달라고 매일 아침 기도를 하는 못난 오십이다.




   이 대목에서 동료 악플러 교수님마저 등판하신다면 그는 두번째 탈퇴를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바라건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좋은 글, 훌륭한 작가, 이성적인 독자들만 브런치에 있어야 된다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모든 문제의 원인은, 결국 내 오지랖인 것이다. 도움을 거절하지 못했던 밀양 오 씨吳氏 십팔 대손十八代孫 지랖이! 네 놈이 지금의 내 씁쓸함을 유발한 주범인 것이다. 남들이 무슨 글을 쓰든 간에 그냥 읽고 스쳐 지나가야 한다.

   성 추행 전력이 있는 국회의원 출마자를 응원하는 글을 보더라도 댓글 달 생각 말고 그냥 지나가고, 일제 덕분에 우리가 잘 살게 되었단 내용을 읽더라도, 그냥 미친 사람인 거니 하며 넘어가자. 그저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들 글에만, 잘 읽었다는 감사만을 열심히 남기면 될 터이다. 명심하자!


   안되겠다. 오지랖, 너 오늘 벌 좀 받아야겠다. 저 구석 독방에 들어가서 앞으로 두 번 다시 나오지 마, 절대로! 그리고 충분한 반성이 끝날 때까지는 나도 글 안 쓸 테니까, 알겠어?



* Image by Michael Schwarzenberger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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