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near future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서류 작업을 하느라 다른 날보다 늦게 잠들었지만 굿슬립 침대 덕분에 그렇게 피곤하지는 않았다. 암막 커튼이 자동으로 걷히면서 방이 금세 환해졌다. 곧 스피커에서는 미리 선곡해 두었던 음악이 흘러나왔고, 첫 노래가 끝날 때 즈음엔 로봇 청소기 헤비스톤이, 아침 청소를 마쳤다며 거실로 나와도 된다는 안내 멘트를 전했다.
방문을 열고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역시나 포근한 아침 햇살이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발소리를 들은 커피 머신 코스모가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로, 남아있는 잠때를 벗기려는데 스케쥴러 마마뮤가 경쾌한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건넸다.
“2025년 11월 10일 월요일, 오늘은 글을 발행하는 날입니다.”
벌써 일주일이 지난 거야? 시간 참 빠르다. 글 발행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니까 이것부터 해야겠다 싶었다.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첫 화면에서 브런치 앱을 눌렀다. 공식 시그널 멘트가 나를 반겼다.
웰컴 투 브런치, 이츠 타임 투 라이트 Welcome to Brunch. It’s time to write!
지난달, 브런치 십 주년 특별 프로모션을 했는데 그때 가입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와 관련된 여러 가지 다양한 혜택을 구만 구천 원에 전부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 적힌 것은 구만 구천 원이었지만 쿠팡 마일리지와 배민 포인트를 사용하고 카카오 제휴 사이트에 가입을 했더니 실제 지불된 금액은 겨우 삼만 육천 오백 원에 불과했다. 일 년 동안 회원 자격이 유지되는 것이니까 한 달로 계산한다면 삼천 원, 하루에 백 원 꼴이었다. 고작 하루 백 원으로 근사한 작가 타이틀까지 가질 수 있으니 굳이 그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작가님, 좋은 아침입니다.
브런치의 인사다. 나를 작가라고 부른다.
2023년도에 업데이트된 내용 중에서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던 것은, 별도의 심사 없이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전에도 약간의 관심은 있었지만 굳이 심사까지 거쳐가면서 글을 쓸 생각은 없었다.
심사를 통과해서 자칭타칭 작가가 되었다는 이들이 쓴 글을 몇 편 읽어봤지만 기대 이하, 수준 미달의 글들이 수두룩했다. 최소한의 문법과 맞춤법, 띄어쓰기조차 시원찮은 글 또한 너무도 많이 눈에 띄었다. 작가가 되기 위한 심사의 절차와 수준이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이제 구만 구천 원만 결제하면 그런 의심을 할 필요도, 의심의 대상이 될 까닭도 없다.
글쓰기 버튼을 눌렀다. 선정된 소재를 알리는 안내 메시지가 떴다.
다음 중 어떤 소재로 글을 쓰시겠습니까?
① 선물 ② 가을 ③ 코트 ④ 자유 소재
어제저녁 어머니에게 보낼 생신 선물을 고르느라 쇼핑 사이트 몇 군데를 잠시 둘러봤는데 그것이 반영된 것 같다. ‘자유 소재’를 선택하면 추가로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다. 코트나 선물을 선택하면 혹시나 수준이 낮아 보일 것 같아서 ‘가을’을 클릭했다. 그 즉시, 화면 가운데에 바람개비가 열심히 돌기 시작한다.
가을을 소재로 어떤 형식의 글을 쓰시겠습니까?
① 시 ② 소설 ③ 에세이 ④ 디카시
지난번엔 소설을 선택했다. 분량이 조금 길어서인지 반응이 시원찮았다. 에세이도 꽤나 긴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은 긴 글을 싫어한다. 유튜브 쇼츠가 인기를 끄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디카시를 선택하면 사진에 대해선 돈을 내야 한다. 다음 달에 배민 포인트가 쌓이면 그때 선택하기로 하고 그냥 시를 클릭했다. 또 바람개비가 열심히 돈다.
가을을 주제로 하는 시 726,345편이 준비되었습니다. 표절률 구간을 정해주십시오.
① 100% ② 99~50% ③ 49~8% ④ 7% 미만
가장 민감한 부분이다. 몇 년 뒤에 시의회 의원 출마를 생각하고 있는 나로서는 표절률이란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유료 서비스긴 하지만 7% 미만을 선택했다. 결제하겠냐고 물어본다. 당연히 ‘예’를 눌렀다. 당장 계좌에서 오십 원이 빠져나갔다는 알림이 떴다.
겨우 오십 원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지난달 발표된 브런치 수익 자료에서 두 번째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 것이 표절률 유료 과금이었다. 가장 많은 이익을 가져다준 것은 자동 댓글이었다. 구독하는 작가가 글을 발행하면 그 즉시 ‘대단해요, 존경해요, 멋져요’라는 댓글이 자동으로 입력되는 서비스다. 물론 백 원의 과금이 발생한다.
가을을 주제로 표절률 7% 미만의 시 4,976편이 준비되었습니다.
표지에 사진을 삽입하시겠습니까?
굳이 사진까지 넣을 필요가 있을까. 아니오를 클릭했다. 백원이 아까운 것은 절대 아니었다. 또 바람개비가 나타났다.
일치율 조절을 하시겠습니까?
그전에 내가 발행했던 글들과 수준을 맞추려는 것이다. 이 단계를 거치면 누가 보더라도 내가 썼다고 생각될, 글 한 편이 최종적으로 선택되는 것이다. 당연히 유료 서비스다. 이백 원이 아깝지 않다.
퇴고를 하시겠습니까?
① 문법 ② 맞춤법 ③ 띄어쓰기 ④ 전체
몇 줄 안 되는 시詩에다 굳이 퇴고를 해야 할까? 지난번 에세이를 쓸 때는 백 원을 아끼려다가 오타에 대한 지적을 너무도 많이 받았었다. 부모님의 교육 수준을 언급하는 패드립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인공 지능이라 하더라도 실수가 없다고 무조건 장담할 수는 없다. ‘그때그때’를 어떻게 띄어 쓸 것인가를 두고 온라인에서 논쟁을 벌이던 사람들끼리 결국 살인 사건까지 벌였던 일이 떠올랐다. 기꺼이 백 원을 써서 전체 퇴고를 하기로 한다.
바람개비가 제일 부지런하다. 대기 화면 디자인 옵션을 물레방아나 풍차로 바꿔야겠다. 바람개비도 자꾸 보니 지루하다.
작가님의 글이 최종 발행을 앞두고 있습니다. 다음 사항이 맞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주제 : 가을 / 형식 : 시 / 표절률 : 7% 미만 / 일치율 : 99% / 사진 : 없음 / 퇴고 : 전체
이상 없다. 항목별로 클릭을 했다. 그런데 다시 한번 팝업창이 떴다. 슬슬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 했으면 그냥 발행하지, 뭘 자꾸 묻고 또 확인해? 그냥 발행하지 말아 버릴까? 이깟 글? 하지만 애써 참기로 했다. 골프나 등산이 아닌, 글쓰기를 취미로 한다는 말에 돌싱 클럽에서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 귀찮음은 당연히 참아야 했다. 안내문 읽기를 눌렀다.
ㅁ 이 작품은 작가님께서 브런치와 함께 쓰신 것입니다.
ㅁ 일차적인 저작권은 작가님께 있으나 이차 저작물이 생성될 경우. 브런치는 작가님께 일정 수익의 배분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ㅁ 발행된 작품의 퀄리티에 대해서는 어떠한 문제 제기도 하실 수 없습니다.
ㅁ 작품과 관련된 모든 질문은 브런치 고객 센터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탁탁탁탁 클릭을 했다. 그리고 발행하기 버튼을 눌렀다. 즉시 메시지가 떴고 동시에 알림이 울렸다.
“브런치에 글이 발행되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발행하는 옵션을 선택했으니 이번이 다섯 번째다. 브런치가 먼저 발행한 다음에야 내 글을 처음으로 읽게 된다. 조금은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슬슬 적응이 되는 것 같다.
나쁘지 않다. 오오, 내게 이런 감성이 있었던가? 오타가 하나 있다. ‘이제 곧 가을이 되’. 되? 돼? 글자를 드래그해서 복사하기를 누른 다음, 고객 센터에 신고하기를 눌렀다. 일부 환불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글을 확인하는 사이, 구독자 500, 조회수 500, 라이킷 500이 자동으로 찍혔다. 브런치에 가입할 때 선택한 옵션이다. 잘한 선택이었고 현명한 판단이었다. 아무리 잘 썼다는 글도 라이킷이 적으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구독자가 만 명이라는데 라이킷이 열 개고 댓글이 달랑 한 개면 그만큼 글에 공감하는 사람이 적다는 뜻이고, 그것이 곧 글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다시 알림이 떴다. 이번 주 목요일에 다음DAUM의 첫 화면 홈&쿠킹 카테고리에 노출될 예정임을 알려준다. 포털 메인 노출 옵션이다. 아마도 다음날인 금요일 오후에는 조횟수와 댓글이 폭발할 것이다. 일정을 미루고 그날은 댓글을 달아야겠다. 자동 답글 옵션을 선택했지만 최소한 몇 개는 내가 직접 써야 인간미가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번 에세이 발행 직후에는 세 군데의 출판사로부터 미팅 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회의 자리에선 꿀 먹은 푸우처럼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처 내 글을 내가 다 읽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긴 글 발행을 꺼려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를 발행했으니까 그때보다는 나을 것이다.
새 글을 발행하는데 오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바야흐로 인공 지능이 주도하는 시대다.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모든 것들은 저절로 도태될 것이다. 글쓰기도 그것에서 예외일 리 없다.
브런치 어플을 닫으려다 자기소개 메뉴를 눌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내 소개는 너무나 밋밋하다. 글보다 자기소개가 더 화려한 사람들을 브런치에서 많이 보았다.
여러 항목 중에서 괜찮아 보이는 것들 몇 가지를 클릭한다. 유학, 박사 학위 보유, CEO, 강남 거주, 문학 관련 수상 여러 번, 국내 대기업 자문으로 활동 중. 좋아하는 주제. 이혼, 퇴사, 시어머니, 김밥.
결제하기를 눌렀다. 이 정도 옵션에 만원 과금이라면 그리 나쁘지 않다. 오히려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싶어 ‘이용 기간 만료 후 즉시 자동 갱신’에도 체크를 했다. 이렇게 해도 남들이 사실 여부를 확인할 방법은 절대 없다. 브런치에서도 그러지 않았던가? 번지르르한 자기 소개,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내가 발행하면 일단 내가 쓴 글이다. 표절률과 일치율을 그래서 관리하는 것이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알림이 쉬지 않고 울려댄다. 조횟수, 라이킷수, 댓글수가 치솟고 있다는 내용일 게다. 전화기를 묵음으로 바꾸려다 말고 그냥 내버려 둔다. 그 소리를 잠시 즐기고 싶다. 햇살은 따스했고 커피는 여전히 구수했다. 아무래도 다시 잠이 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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