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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민 Aug 23. 2023

생, 삶 그리고 死

조금 특별한 "아버지"

나에게는 조금 특별한 아버지가 있다.

피를 나눴다거나, 나를 양육해준 아버지가 아닌 그야말로 조금 특별한 아버지.




이 분과의 인연은 약 10년을 거슬러 올라가 일본 유학시절에서 부터 시작된다.

일본어에 대한 공부, 물질적인 대비도 없이 무작정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나는 늘 가난하고 배가 고팠다. 운이 좋게도 그 학교는 장학금이 나왔지만, 기숙사비, 공과금, 교통비를 내고 나면 당장 먹을 김밥을 살 돈도 없었다. 그렇게 늘 배가 고팠던 유학 시절, 한 줄기 빛나는 손길이 있었으니, 바로 이 "아버지"였다. 바로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준 분이다.


그분은 지금은 "아버지"라고 하지만, 이 글에서는 아저씨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 아저씨는 한국의 아이돌 그룹인 카라의 깊은 팬이었다. 먼 일본에서, 카라가 진행하는 온라인 이벤트에 참여하고 싶지만, 짧은 한국어로는 번번이 기회를 놓쳐 조금의 일본어와 유창한 한국어가 가능한 나에게 도움의 손을 뻗은 것이다.


이 아저씨는 원래 알던 지인이 아니라, 유학을 가서 만든 친구와 함께 일을 하던 사람이다. 아마 아저씨가 한국인의 도움이 필요한데 마침 그 친구의 주변에 내가 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일본인 친구와 "아저씨"를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일본어가 서툴러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열심히 설명을 했다.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그렇게 몇 번이고 고기를 사주고 카라 이야기, 인생 이야기 등을 나누며 친해진 우리. 하지만 짧은 유학 기간이 예정돼있던 나는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고 정신없이 살다 보니 어느덧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그 사이에도 아저씨는 몇 번 정도 한국에 방문할 때 마다 나에게 연락해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지만, 코로나로 인해 하늘길이 닫히고 우리의 연락도 SNS에 올리는 아저씨의 음식 사진, 낚시 사진에 좋아요 혹은 댓글로 안부를 묻는 것이 전부가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다시 한국에 방문하겠다며 나의 시간을 묻는 아저씨. 가난한 유학생에서 지금은 넘치지는 않아도 안정된 가정을 갖고 있는 나를 대견해 하며, 나는 "이번에는 제가 차로 모실게요!, 가고 싶으신 곳 말씀 해주세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아저씨는 카라의 멤버인 "구하라"님의 납골당에 가서 인사를 하고 싶으시다고 하셨다. 검색해 보니 분당의 한 납골당에 모셔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거리를 확인하니 대략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흔쾌히 나는 "오케이!"를 외쳤고, 우리는 약 7년 만에 재회를 하게 되었다.


늘 말로만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던 나의 아내도 함께 가고 싶어 했지만, 당시 아내의 몸 상태가 썩 좋지 못했고, 아저씨도 워낙 개인적인 일이라 "아내는 저녁 식사를 같이 하는 게 좋겠어요~"라며 돌려 말했다. 아내와 나는 공감을 했고, 나와 아저씨 둘이서 만나 납골당을 향했다.


우리는 합정역 앞 메세나폴리스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아저씨가 홍대에서 길을 잃고, 합정에는 차 세울 곳이 마땅치가 않아 만남에도 진을 빼야 했다. 오랜만에 만난 아저씨는 멋있게 나이가 들어있었고, 더운 날씨 탓에 땀 범벅이 되어 있었다. 한 손에는 찌그러진 햄버거와 포장 비닐 그대로 마시고 있는 맥도날드 콜라를 들고 내 차에 올라탔다. 차를 타자 마자 하는 말이 "오~ 돈 좀 벌었나 보네~?"라며 그 간 7년이라는 공백이 무색할 만큼 자연스러운 만남으로 이끌었다.




납골당은 근처 역에서 30분 간격으로 셔틀버스가 있었지만, 우리는 차로 이동하기 때문에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도착을 하였다. 멋들어진 주변 경치와 화려한 외관과 인테리어가 눈을 끌었다. 원래라면 아저씨 혼자 다녀오시라고 하고 나는 밖에서 있을 생각이었지만, "기왕 온 거 나도 구경이나 해볼까?"생각하며 아저씨랑 함께 들어가게 되었다. 꽃을 파는 곳이 없어 아저씨가 당황하였지만 이내 꽃을 파는 곳을 발견하여 안도하였다. 마음에 드는 꽃을 골라 계산을 하려고 하자 점원이 꽃에 걸 수 있는 메모지를 함께 주며,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그러자 한글로 "구하라"를 적으려고 하는 아저씨는 "그" 한 글자를 적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들어 메모장을 켜 "구하라"를 적어 보여주었다. 이름을 다 적고는 나에게 "메시지를 적어도 되나?"라고 물어봤다. 점원에게 물어보자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러자 아저씨는 "사랑해요"를 쓰고 싶다고 했다. 다시 핸드폰을 꺼내 적어서 보여줬고 아저씨는 흡족한 표정으로 펜을 놓았다.


그 메모장 같은 편지의 용도는 꽃이 다 시들어도 메모장은 걸어두신다고 한다. 세심한 배려에 가슴이 몽글해졌다. 그렇게 우리는 5층으로 향했다. 5층에 올라가자마자 보이는 이곳에 안치되어 있는 연예인들의 입간판들. 학창 시절 좋아했던 SG워너비의 채동하 가수님,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레이디스 코드의 멤버 "리세, 은비님" 그리고 "구하라"님이 있었다.


"구하라"님의 안치실을 들어가 슥 둘러보고는 나는 아저씨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었다. 그동안 나는 다른 안치실들을 둘러보기로 결심했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연예인들의 안치실에는 많은 팬들의 편지가 가득 넘쳤다. 너무나 젊고 멋진, 아름다운 사람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 이렇게 만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고, 위로를 주는 것에 나는 마음이 숙연해졌다.


이내 나는 연예인들이 아닌 분들의 안치실도 둘러보았다. 나이가 그득한 어르신들 사이에 중학생 정도 돼 보이는 아이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그 사진을 보자마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려 오래 보지는 못했다. 어르신들의 사진과 함께 들어있는 생전에 좋아하시던 물건들을 보았다. 골프 백, 시계, 야구공, 사진첩, 편지 등이 함께 보관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나의 죽음 뒤엔 어떤 것들이 함께 놓여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이런 식으로 그들을 기억하고 추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인터넷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몇 년이 되었는데, 어머니 목소리가 생각이 안 난다 라는 말을 듣곤 엄청 슬퍼했던 것이 떠오르며, 이렇게 직접적으로 추억할 수 있는 매개체가 함께 있다는 것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이내 나의 사랑하는 아내 보다 너무 빨리 가지 않기를 바랐다. 가능한 건강하고 오래오래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내 안치실에는 가족사진, 결혼사진, 부대찌개(모형), 아내에게 받았던 편지 등을 함께 두고 싶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생각이 깊어지던 와중, 아저씨가 나왔다. "좋은 시간 보내셨어요?"라며 묻자 아저씨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간단히 쇼핑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몸 상태가 좋지 않던 아내는 외출 준비를 마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주차를 하고 아내, 아저씨와 함께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보쌈, 비빔면, 된장찌개를 주문하고 맥주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내도 말로만 듣던 상상 속의 존재인 아저씨를 실제로 만나니 신기해하면서도 쑥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식사를 하며 우연히 아저씨의 가정사를 듣게 됐다.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를 들으며 끄덕이고 있었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나를 가리키며 아내에게 "얘는 내 아들이야"라며 웃었다. 사실 그 말을 듣고 한 동안 벙찐 표정으로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던 터라 어머니 그리고 형 이렇게 셋이서 자라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자리를 옮겨 맥주 한 잔을 더 하고 집으로 향했다.


아저씨가 숙소에 무사히 도착했으면 해서 나는 카카오 택시를 부르고 아저씨 짐을 챙기러 차로 향하였다. 그러자 아저씨는 아내를 붙잡고 봉투를 내밀었다. "결혼 축하해요, 일본 축의금 봉투에요"라며 말이다. 이내 택시가 도착했고 우리는 인사를 하며 헤어졌다. 아내는 아저씨의 선물에 감동을 받고, 나에게 "아들"이라고 부른 것에 감동을 받은 눈치다. 나는 벙찐 표정을 숨겼지만, 감동이 나중에 몰려와 뭉클하고 따듯한 감정이 올라왔다.


아저씨가 숙소에 잘 도착했는지 연락을 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오늘 정말 고마웠어~"라며 답장을 했다. 아들이라고 불러준 마음을 보답하기 위해 나는 "일본의 아버지니까 괜찮아요!"라며 답장을 이어 나갔다. 아저씨는 "너와 너와 아내는 나의 아들, 딸이야~"라며 답장을 보내왔다. 그렇게 나는 조금 특별한 일본인 아버지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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