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18호 15화

[공동기획_나가는 글] 국가를 묻는다

[FINAL CALL] 편집위원 심술

by 연희관 공일오비

어느 날 나와 동료 시민들의 삶에 뻥 뚫린 커다란 빈칸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한 공동 기획의 여정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커다란 빈칸에서 ‘국가’라는 실체 없는 존재를 길어 올려 질문을 마주했다. ‘국가’의 물질성을 포착하고, 자율적 행위자이자 시장과 사회의 바깥에 존재하는 단일한 주체로서의 국가가 감추고 있는, 과정이자 효과로서의 국가를 발견할 채비를 했다. 국가의 물질성을 발견하는 일은, 국가를 정부와 집권당으로 대표되는 단일한 정치권력으로 상상하기를 멈추고, 나와 동료 시민들이 발 딛고 살아가는 삶의 기반 및 물적 조건을 포괄하는 사회적 환경으로 사유하는 데 중요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실체 없는 국가라는 존재가, 존재라기보다는 토대, 기반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면 이제 그 기반에 두 발을 단단히 붙여보자. 시민의 몸은 국가의 물질적 작용과 접합되는 장소로서, 정치적 영역으로서 부상한다. 정치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국가의 작용은, 시민의 몸을 향하고, 시민의 몸은 이러한 정치적 과정에서 숨과 물질이 들고나는 장소이자 통치에 복종하기도 하고 맞서기도 하는 종속과 저항의 장소가 된다.


공동 기획 세 번째 글, <입구가 필요하다>를 쓴 흥구는, 우리의 질문을 다듬어 나가는 길목에서 ‘과정으로서의 국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메모를 출구 삼아 시공간을 마구 오가며 조각조각 덧대어지고 배열된 영원, 흥구, 띵동, 심술의 글을 하나로 꿰어보고자 한다.


“과정으로서의 국가” 국가를 하나의 집합체로 바라보지 말고, 국가를 구성하는 다양한 과정에 집중하자. 과정으로서의 국가를 상상할 때, 권력의 재배치를 통해 국가 내 새로운 공존과 개입의 지점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그것이 정치라고 믿어. [1]

국가를 구성하는 여러 겹의 물질들, 셀 수 없이 많은 기관과 행위자들은 ‘국가’라는 매끄럽고 강력한 이미지에 가려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국가는 어떤 사건 이전에 존재하는 선험적이고 자율적인 주체가 아니라, 법과 제도, 이데올로기, 시장을 넘나들며 움직이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시민의 몸에 들고 나는 숨과 물질로 가시화된다. 그렇다면, 과정으로서의 국가, 정치적 영역에 접합된 시민의 몸을 발견한 우리가 향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 국가가 과정임을, 그것도 시민의 몸에 작용하는 과정임을 발견했다면, 끊임없이 어디론가 굴러가는 국가는 어떤 가치를 향해야 하는가? 공존의 과정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시민의 몸에 들고 나는 숨과, 시민의 몸 곳곳을 흐르는 뜨거운 피, 그리고 살을 지켜내기 위해 어떤 말과, 어떤 흙이 필요한가?[2]


세 번째 이야기: 무명(無名)의 유모, 슬퍼하는 어머니


마지막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시 한번 『메데이아』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국가를 묻는다> 두 번째 글에서 필자는 『메데이아』를 통해, 메데이아의 자식 살해라는 비극을 고대 그리스의 정치, 경제적 맥락 위에 놓아보았다. 이로써 메데이아의 자식 살해를 통해, 친족애로 맺어진 상생의 관계를 적대의 관계로 왜곡하는 정치·경제적 지형에 주목해볼 것을 제안하였다. 더불어 여성 범죄가 구성되는 자리와 여성이라는 범주의 삶이 구성되는 자리가 중첩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메데이아에게는 자신이 혼자서 독자적 오이코스의 주인이 될 수 없고, 성인 남성 가부장의 오이코스 내로 포섭되지 않고서는 폴리스라는 정치 공동체 내에서 살아 숨 쉴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다. 이러한 제약 속에서 맞닥뜨린 이아손의 배신은 치명적이었다. 메데이아는 살고자 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이아손이 자신을 버린 순간, 메데이아에게 이미 아이들은 죽은 존재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죽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에게 선택이 아니었다.


그런데 『메데이아』에는 메데이아와 이아손의 목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메데이아』가 비극으로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주요 인물의 욕망이 만나고 분기함에 따라 태어나고 살해당해야 했던 아이들의 비명이 들릴 때, 주인 내외를 대신하여 키운 아이들을 죽이지 말라고 애원하는 유모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이다. 유모는, 거듭되는 말하기를 통해 남편에게 배신당한 메데이아의 분노가 복수를 실행하지 않고서는 해소될 수 없을 것을 짚고 있으며 메데이아의 자식 살해를 예견이라도 하듯, 아이들을 염려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지배자들의 성품 혹은 삶의 방식을 동경하거나, 빼앗고자 하는 대신, 생애 주기를 통틀어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메데이아를 향하는 유모의 시선은, 메데이아가 처해 있던 정치·경제적 맥락에 터잡아 메데이아의 분투에 흠뻑 빠져 있던 독자를 돌려세워, 극에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발견할 계기를 제공한다. 여기서 메데이아의 분노와 자식 살해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획득할 것이다.


감춰져 있는 ‘유모’를 발견하기


유모: 아, 내 신세, 내 신세여, 아, 불행하구나! (아이들의, 괄호 인용자)아버지가 당신께 잘못한 것에 대체 아이들이 무슨 몫을 가졌단 말인가요! 왜 그대는 이들(아이들, 괄호 인용자)을 미워하나요? 아아, 얘들아, 행여 너희가 고통을 당할까 얼마나 걱정되는지! 지배자들의 성품은 무서워요, 그들은 다스림은 적게 받고, 권력은 많이 휘두르며, 감정을 격하게 바꾸지요. 그저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버릇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그러니 나로서는 높은 분들 가운데서 말고 그저 평온하게 늙어갔으면 좋겠습니다. [3]


유모는 메데이아와 이아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양육하는 인물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의 위치로 보자면 폴리스 바깥, 오이코스 바깥에서 기능을 담당하는 자로서 철저히 보이지 않는 존재다. 유모는, 메데이아와 이아손이 이루고 있던 가정을 떠받치는 필수노동에 종사하는 노예다. 그중에서도 아이들을 기르는 유모가 담당하는 영역은 돌봄과 친밀성의 영역이다. 오이코스와 폴리스가 중첩된 고대 그리스의 정치·경제적 지형 어디에서도 지위를 가지지 못하는 유모는 돌봄과 친밀성의 영역이 평가절하되어 온 전통을 드러내는 존재다. 주인 내외와 맺는 관계를 통해, 주인 내외의 아이들과 맺는 관계를 통해 존재하는 유모는, 누구보다 메데이아를 잘 알고, 메데이아의 아이들을 사랑하는 동시에 ‘말과 행위’를 하는 지배자들에 속하는 메데이아와 철저히 거리를 두고 있다. 『메데이아』의 서사 공간 내에서 유모가 점하는 위치와, 메데이아를 비롯한 지배자들에 대해 유모가 보이는 태도를 겹쳐볼 때, 돌봄 노동이 평가절하되어왔던 오랜 전통이 드러난다.


돌봄의 비가시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 하나는 간호나 사회적 돌봄 같은 현대 돌봄노동의 조상뻘이라 할 수 있는 가내 하인의 노동이다. 오랫동안 이들의 노동은 없는 셈 치부되어왔다. (중략)중산층 가정에서 하인은 별도의 출입구, 계단, 거주 공간을 이용했다. 때로 하인들은 존재가 드러나지 않도록 아주 먼 동선으로 다녀야 했다. 주인이나 안주인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문 뒤로 물러서 있거나 벽을 보고 있어야 했고, 하녀들은 발소리가 나지 않는 신발을 신고 조용조용 움직이도록 지침을 받았다. 하인들은 일반적으로 노크를 하지 않고 방에 들어갔고, 가령 쟁반이나 난로에 추가할 석탄을 가지고 방에 들어가도 고맙다는 인사나 알은척도 받지 못했다.(매들린 번팅;2022)


메데이아에게는 공동체 내 입지를 갖는 것이 중요했다. 아이들을 기르고 사랑하는 일은 유모의 일이었다. 유모의 일은 비천하고 하찮은 일이었다. 이아손의 배신으로 인해, 이아손의 오이코스 내로 포섭되는 것이 불가능해졌을 때, 메데이아는 신의를 저버린 이아손과 결별하면서도 아이를 지켜내어 독자적인 가정을 꾸리는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다. 한 사람이 감각하는 정치·경제적 제약이란, 과거와 현재에 가해지는 제약일 뿐만 아니라 미래를 상상하는 일마저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아손의 오이코스에서 쫓겨남과 동시에 코린토스에서도 쫓겨나게 된 메데이아가 상상할 수 있는 미래는, 다른 남성의 오이코스 내로 포섭되어 폴리스 내에서 입지를 다지는 것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이게우스에게로 떠나기에 앞서 아이들을 살해했던 메데이아의 이야기와, 아이들의 죽음을 슬퍼하던 유모의 이야기는 두 개로 쪼개어졌던 거울이 맞추어지듯 만난다.


애석하게도 『메데이아』의 서사 공간에서 메데이아와 유모는 접점을 만들지 못한다. 직접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운 적이 없는 메데이아에게, 아이들은 오이코스라는 목표의 좌절이자 새로운 오이코스/폴리스로의 이행을 위해서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유모는 아이들이 살았으면 하지만 메데이아를 말리거나 설득할 수 있는 발화나 행위의 역량을 갖고 있지 않으며, 자신이 그러한 발화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알지 못한다. 유모의 상상력과 역량 또한 폴리스와 오이코스가 맞물려 만들어내는 정치·경제적 지형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시민’의 생존에 필수적인 돌봄과 친밀성의 기능이 인간사의 영역 즉, 정치의 영역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된 곳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을 낳아준 메데이아에 의해 살해된다.


아버지 아이에테스에서 이아손으로, 또다시 아이게우스로 이행하는 메데이아의 여정과 ‘자식 살해’라는 비극은 정치·경제적 지형에 의해 젠더화된 ‘말과 행위’의 결과임과 동시에, 정치·경제 공동체를 실질적으로 떠받치고 있는 기능의 영역을, 의미가 있는 행위인 ‘말과 행위’에서 철저히 배제한 결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젠더 위계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의 위계가 중첩된 자리에서 메데이아의 아이들은 메데이아의 손에 살해됐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우리가 가장 역겨워하는 일, 말 그대로 다른 사람들의 배설물을 받고 치워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 일에 걸맞기’ 때문에 한다고 여기며 마음을 놓으려 할 것이다. 이는 돌봄 노동이 전통적으로 여성이나 하인, 또는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하는 일로 치부되었던 또 다른 이유고, 동시에 열등함inferiority이라는 개념을 강화했다. 열등한 사람들은 바로 ‘비천한’ 육체를—우리는 어쩔 수 없이 육체적 존재이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의 표징인—다루는 일에 적합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열등하다는 것이다.(더 케어 컬렉티브; 2021)


돌봄의 영역에 대한 평가절하는 비단 고대 그리스만의 사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반복되고 강화되었다. 메들린 번팅에 따르면, “프로이센의 한 논평가는 영국 하인들이 “친밀함의 여지를 모조리 제거하고 그토록 완벽하게 존중의 태도를 보이는 것, 그리고 자신이 주인과 동일한 차원의 존재가 아니라 마치 기계처럼 여겨지게끔 행동하는 것”에 크게 감탄했다.”(메들린 번팅; 2022) 고대 그리스 비극에 나오는 유모가 주인 메데이아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설명이 그와는 완전히 다른 장소과 시대를 살았던 이의 말과 겹쳐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돌봄의 영역은, 오랜 역사에 걸쳐 평가절하되었고, 비천한 육체를 다루기 때문에 열등하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국가와 몸의 접합에 대한 이상의 논의로 보건대 몸과 몸을 가진 존재로서 갖는 필요는 결코 하찮은 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삶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돌봄을 되찾기


아이1: 아아, 어떻게 하지? 엄마의 손을 피해 어디로 도망쳐야 하나?

아이2: 나도 모르겠다. 가장 사랑하는 아우야! 우리는 이제 죽는구나!

코로스: 집 안으로 들어갈까요? 내가 아이들을 위해 죽음을 막아주어야 할 것 같네.

아이1: 그래요, 신들의 이름으로, 제발 막아주세요. 정말로 절박해요!

아이2: 우리는 이미 칼날의 그물에 바짝 다가 서 있어요.[4]


죽기 직전 도움을 요청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 기획의 여러 장면들이 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단일한 이데올로기의 집합체로서 ‘국가’를 순수하게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삶들이 존재를 부정당하고 스러져갔는가. 여성이 독자적으로 정치·경제적 지위를 가질 수 없는 범주로 구성된 자리에서, 복수의 여성들이 저마다 정치적 발화와 행위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지 못한 채 연대할 수 없는 자리에서, 살고자 몸부림치는 여성의 삶이 범죄의 현장으로 치닫게 되는 정치·경제적 환경에서, 얼마나 소중한 삶과 세계가 파괴되었는가. 국가가 시민의 삶과 맞물리는 과정이 아닌, 자신만의 이해를 갖는 단일한 집합체로 상상된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이가 비국민으로 배제되었는가. 국가를 지킬 자격은, 얼마나 많은 몸과 삶과, 사랑을 부정했는가. 정치적 발화와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으로부터 돌봄과 친밀성이 지워진 그 자리에서, 필요의 영역을 충족하는 것으로는 공동체 내에서 자리를 확보할 수 없는 지형에서, 삶과 죽음이 얼마나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는가.


서로의 삶과 삶을 맞대어 만들어나가는 사회적 과정을 통해 맞닥뜨려야 할 과제는 서로의 삶과 죽음을 허락하는 돌봄[5]이다. 떼어버린 돌봄과 친밀성의 영역을 온몸으로 끌어안아보자. 돌봄과 친밀성의 영역을 지켜나가는 일은 그 자체로 삶을 지켜나가는 일임을 상기하자.


그리하여, 오늘의 이야기 속에서는 아이들을, 여자들의 삶을 잃었을지언정 내일 이어질 이야기에서는 그 누구도, 무엇도 쉽게 잃지 말자. 저마다의 몸과 그 몫의 기쁨, 슬픔, 고통, 불안까지도 지켜나가는 이야기를 만들어가자.


1) 흥구는 다음 논문에서 인사이트를 얻어 이와 같은 메모를 작성했다.

Michel Rolph Trouillot, “The Anthropology of the State in the Age of Globalization: Close Encounters of the Deceptive Kind”, Current Anthropology , Vol. 42, No. 1 (February 2001), pp. 125-138,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on behalf of Wenner-Gren Foundation for Anthropological Research

2) 스테이시 앨러이모 저, 윤준, 김종갑 역, 『말, 살, 흙: 페미니즘과 환경정의』의 제목을 열쇠말로 활용하였다.

3) 에우리피데스 저, 강대진 역, 『메데이아』, 민음사, 2022, 115-124행, 21쪽

4) 에우리피데스 저, 강대진 역, 『메데이아』, 민음사, 2022, 1271-1278행, 88쪽

5) 이 표현은 드라마 <공주의 남자> 마지막 대사에서 차용하였다.

“정이란 대체 무엇이냐? 세상을 향해 묻습니다. 나는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아무런 망설임 없이 삶과 죽음을 서로 허락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이라고.” 조정주, 김욱 극본, 김정민, 박현석 연출, 문채원, 박시후 등 출연, 2011.07.20. ~ 2011.10.06. 방영



참고문헌


심술, 「나가는 글」

단행본

에우리피데스 저, 강대진 역, 『메데이아』, 민음사, 2022

매들린 번팅 저, 김승진 역, 『사랑의 노동』, 반비, 2022

더 케어 컬렉티브, 정소영 역, 『돌봄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 니케북스, 2021

스테이시 앨러이모 저, 윤준, 김종갑 역, 『말, 살, 흙: 페미니즘과 환경정의』, 2018

학술지 논문

MichelRolph Trouillot, “The Anthropology of the State in the Age of Globalization: Close Encounters of the Deceptive Kind”, Current Anthropology , Vol. 42, No. 1 (February 2001), pp. 125-138,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on behalf of Wenner-Gren Foundation for Anthropological Research

드라마

조정주, 김욱 극본, 김정민, 박현석 연출, 문채원, 박시후 등 출연, 『공주의 남자』, 2011.07.20. ~ 2011.10.06. 방영


글. 심술(seosi1230@naver.com)

함께. 흥구, 띵동, 영원

그림. 이슬아(경덕여고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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