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AL CALL] 편집위원 띵동
하루에도 수백만 명이 오가는 수도권 지하철역. 당신은 등교하거나 출근하기 위해서 지하철 개찰구를 지난다. 승강장으로 내려와 보니 한편에서는 시위와 농성이 이어지지만, 당신은 갈 길이 바쁘기에 그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적당한 자리에 선다. 그런데 누군가 당신의 앞을 막는다. 그는 당신이 시위대의 일원일 수 있으므로 지하철에 타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런 법이 어디 있냐며 거세게 항변해도 열차에 탑승하지 못하도록 당신을 붙잡는 손길은 도저히 뿌리쳐지지 않는다. 항변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을 밀치자 그와 비슷한 형상의 사람들이 몰려와 당신의 왼쪽 다리를 부러뜨린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고통에 주저앉는다. 수도권 한복판의 수많은 이목 앞에서 버젓이 벌어지기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언제든 자기에게 벌어질 수 있다는 위협을 느낀다. 혹자는 이를 가리켜 기우나 피해의식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담담히, 그리고 엄중히 묻는다. 손가락이 짧다거나 얼굴 모양이 각지다거나 발이 크다거나 혹은 보이는 것이 제한적이거나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없거나 휠체어를 타고 있다는 이유로, 그것이 국가가 주장하는 ‘불법’ 시위 참여자와 같은 특징이라는 명목으로, 어떠한 권리를 박탈당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자신에게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보았는가? 이런 가정이나 상상을 하는 사람의 입장은 한 번이라도 헤아려보았는가? 공권력이 자행한 신체 파괴를 매체로 수천 번 접하고도 일체 두려움 없이 지하철을 타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이는 본질적으로 누군가가 시위 참여자이고 아니고의 문제와 무관하다. 서울시, 경찰, 서울교통공사, 중앙 정부를 포함한 ‘국가’라는 주체가 나서서 불법이라는 낡고 고리타분한 명명으로 특정 시민(국민)의 이동권을 박탈한 것이 핵심이다. 나아가 국가는 탑승권을 소지한 사람 누구나 이용 가능한 것이 마땅한 대중교통에서 손수 국민 개개인에게 탑승 자격을 부여하는 작업에 나섰다. 지하철에 탑승할 수 있는 사람과 탑승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경계를 그어놓고, 누군가를 지하철에 태우지 않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열차는 정차하지 않은 채 지나가며, 경찰은 승강장에서 휠체어의 앞을 가로막고 휠체어 이용자가 저항하면 휠체어를 훼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휠체어가 이용자에게 단순한 이동 수단일 뿐만 아니라 연장된 신체라는 점에서 국가가 행하는 ‘진압’이라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는 감히 헤아릴 수도 없다. 휠체어를 타고 시위에 참여한다는 이유로 기본권 중 하나인 이동권을 빼앗고 국민의 신체를 망가뜨리는 국가가 정한 선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놓였다. 무대응으로 일관해오다가 특정 국민의 목소리를 누르고자 임의로 그 선을 지정한 국가의 폭력을 목격한 국민은 국가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앞서 여는 글에서 언급되었듯이 이번 공동기획 <국가를 묻는다>에서는 티모시 미첼의 관점에 근거하여 ‘단일한 이념적 구성체로서 국가를 조명하는 시각에서 벗어남’으로써 ‘국가의 물질적인 실재를 발견하고, 나아가 정치적・사회적 과정으로서의 국가에 대한 논의를 모색’하는 데 방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달리 국가를 바라보려고 노력하여도 국가가 단일한 이념적 구성체로밖에 보이지 않을 때는 어찌해야 할지 의문이 든 것도 사실이다. 중앙정부, 서울시, 서울교통공사, 경찰 등이 한데 모여 마치 하나의 유기체라도 된 것마냥 특정 사안과 담론에 관해서 조직적으로 그리고 독선적으로 행위 하는 주체로서의 국가를 다르게 보기 이전에 그것을 다룰 어떠한 단계가 필요하지는 않을까? 무엇보다도 ‘국가를 행위자로 보이게 만드는 현대의 통치 기술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작동 방식과 발휘 양상에 대하여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고로 이러한 의문을 바탕으로 한 필요성 하에 국가 및 통치 기술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졌음을 먼저 밝히는 바이다.
‘무정차’로 지나가는 열차들, ‘무관용 원칙’으로 대응하는 국가, 무참히 파괴되는 휠체어-몸. 이번 겨울을 지나오면서 유난히도 자주 귓가를 파고든 것들이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승하차 시위는 2021년 12월 3일부터 이어졌고, 중단과 재개를 몇 차례 거듭하였다. 출근길 지하철 시위 이전에는 비교적 한산한 오후에 시위가 진행되었는데, 열차 승하차, 지하철 선로 점거, 삭발 등 쓰이지 않았던 방법이 없을 정도였으나 이들의 투쟁은 국가와 사회에 조금도 닿지 못했다. 국가의 대응은 출근길 지하철 시위 이전이나 이후나 한결같이 정적이었으며 수동적이었다. 전장연의 대화 시도는 대부분 국가로부터 외면되었고 응답받지 못했다. 몇 번 열리지 않는 대화의 장에서조차도 그저 번거롭고 피곤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무의미한 언약을 내세울 뿐이었다. 진지한 검토 없이 무심하게 내뱉어진 언약이 지켜질 리는 없었다. 2001년 이후로 중앙 정부와 서울시는 전장연의 무수한 장애인권리예산 확대 요구에 여러 번 내용도 의지도 없는 약속을 했고 한 차례도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장기간의 투쟁에도 국회와 정부는 장애인권리예산 증액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효율과 형평성이 이들의 명분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가는 이들에게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국가는 부재함으로써 장애인을 짓밟아온 셈이다.
장애인복지법 제1장 제1조(목적) 이 법은 장애인의 인간다운 삶과 권리보장을 위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등의 책임을 명백히 하고, 장애발생 예방과 장애인의 의료ㆍ교육ㆍ직업재활ㆍ생활환경개선 등에 관한 사업을 정하여 장애인복지대책을 종합적으로 추진하며, 장애인의 자립생활ㆍ보호 및 수당지급 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정하여 장애인의 생활안정에 기여하는 등 장애인의 복지와 사회활동 참여증진을 통하여 사회통합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5조(장애인 및 보호자 등에 대한 의견수렴과 참여)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장애인 정책의 결정과 그 실시에 있어서 장애인 및 장애인의 부모, 배우자, 그 밖에 장애인을 보호하는 자의 의견을 수렴하여야 한다. 이 경우 당사자의 의견수렴을 위한 참여를 보장하여야 한다.
제16조(법제와 관련된 조치 등)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이 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법제(法制)·재정과 관련된 조치를 강구하여야 한다.
국가의 판단・결정・권력 행사에서 명분으로 이용되는 법에서는 이처럼 국가가 장애인의 인간다운 삶과 권리보장을 위해서 장애인 당사자의 의견을 수렴하여 법제를 마련하고 재정적 조치를 강구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한다. 즉, 장애인권리예산을 확대하는 것은 시혜적 복지가 아니라 국가로서 마땅히 국민의 인간다운 삶과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기본적 의무이다. 국가는 이러한 의무를 이행하는 역할에서 지금까지 부재해왔다. 탈시설화라는 의제 역시 마찬가지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수많은 장애인이 시설에 ‘보호’되어 온 이유는 무엇인가. 시설화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이 설 자리가 매우 한정적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쉽게 비가시화되는 시설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유조차 억압당한 채로 존재가 지워진다는 것이다. 개인의 삶이 존중되지 않고 시설 거주자가 장애인-이라는 단어 뒤에 감춰진 무능, 비인간의 맥락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단편적인 집단으로 취급되는 공간으로 장애인이 내몰리게 된 책임은 국가에 귀결된다. 예산 확대 없이 실질적인 지원이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거를 선택할 수 없고, 정당한 편의 제공을 받으면서 배우거나 일할 수 없고, 이동할 수 없고, 인파 중 일부분으로 어우러질 수 없는 존재. 국가의 부재 속 장애인의 권리보장 요구에 응답하는 이는 없었다.
박경석 전장연 대표는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하게 된다면 ‘맞아 죽을까 봐 두려웠’다고 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장연이 맞아 죽기를 각오하고 출근길 시위를 감행한 것은 국가의 철저한 무대응 때문이었다. 국가가 변함없이 예산 확대 편성을 수용하지 않아서였다. 인파가 밀집한 출근길 서울 지하철역 승강장 한복판에서 휠체어 여러 대가 열차를 오르내리자 이들의 투쟁은 비로소 메가폰을 탔다. 여태껏 소거되었던 목소리가 담론장에 퍼지고 투쟁 목적이 널리 알려진다는 것은 무응답에 저항해온 투쟁의 역사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뉴스 사회면을 장식하는 지하철 시위가 더는 낯설지 않은 것만으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봐야 할까.
그러나 이들의 목소리가 수면 위에 떠오르자 국가는 예전과는 다른 접근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대화를 거부하면서 침묵하고 부재하는 기조는 그대로 유지한 채 노골적으로 투쟁을 가로막는 일종의 개입을 시도한 것이었다. 국가는 국민이기도 한 장애인의 권리보장에 이바지하는 대신 표면에서도 폭력적인 대응을 서슴지 않기를 택하였다. 새 중앙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도 국가와 전장연의 대치로 표상되는 국가의 폭력은 그 정도가 점점 심화하였고 폭력의 작동 방식은 다각화되었다. ‘약자’와의 동행을 강조하던 서울시장은 무관용 원칙을 내세운 채 전장연을 두고 ‘사회적 강자’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서울교통공사는 6억 원이 넘는 배상금을 청구했으며 경찰은 지하철 탑승을 막기 위해 물리적 폭력을 불사했다. 국가는 시위의 내용을 검토하여 이를 재정과 정책에 반영하기보다 ‘엄중 대응’함으로써 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이들을 폄하하고 짓밟는 데 자신이 가진 무게감과 존재감을 과잉으로 발휘했다.
“과연 그는 비장애시민들에게도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당신은 서울의 15개 역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전체 역사들 중 5%에 불과하죠. 이 정도면 훌륭한 거 아닌가요?’ 누구나 이용하지만 내게는 허용되지 않는 역이 있다면 단 한 개여도 문제가 아닐까. 정부든 서울시든 당장 문제를 시정할 것이고, 당장 해결할 수 없다면 책임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할 것이다. 그러나 장애시민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시민이 아니라고 차마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시민이라고 보기에는 많이 모자란 존재인 것이다.”[2]
선술 하였듯이 국가의 눈에 비친 장애인은 그저 허울뿐인 국민이고 사회적 약자로서 국가의 어떤 결정에도 순종해야 하는 존재이다. 이들이 부조리한 정책 시행과 예산 편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것은 감히 용납될 수 없다. 비장애인 시민에게는 차마 할 수 없을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힘을 가지고 떳떳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국가다. 국가는 비국민으로 여기는 장애인을 강력히 제압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과시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소리 소문도 없이 죽어가는 것이다.
장애와 관련된 담론에서 국가의 치밀함과 교활함이 극에 달하는 것은 바로 국가의 정치 방식이다. 국가는 폭력을 가할 때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국민을 서로 와해시킨다. 장애로 지하철을 탈 수 있는 사람과 탈 수 없는 사람으로 구분 지었듯이, 사소한 어휘와 문장 표현에서도 집단을 나누는 프레임을 끌어들여 사회를 분열시킨다. 셀 수 없이 사회 통합을 강조해온 이력과는 정반대의 태도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일반 시민’이 시위로 불편해한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장애인과 비장애인, 그리고 시위 참여자와 그 이외의 사람으로 대립 구도를 설정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는 대중이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장애인을 민폐이자 사회악으로 인식하게 하고, 앞서 짚었던 발언처럼 무능・약자 이미지를 장애인에게 뒤집어씌워 노골적인 혐오까지 유도해낸다. 다수로부터 혐오의 시선과 언어와 행위를 마주한 장애인은 가뜩이나 어려운 지역사회에서의 삶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철저히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이쯤이면 국가가 자신의 역할이 장애인의 분리로 아는 것은 아닌지 헷갈릴 지경이다.
“[서울교통공사] 4호선 삼각지역 상선 당고개방면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타기 불법시위로 무정차 통과되고 있습니다. 열차 이용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3]
일명 ‘재난문자’로 통칭하는 안전안내문자가 시시때때로 날아오고는 한다. 그런데 지난 1월 2일에는 느닷없이 위와 같은 내용의 재난문자가 등장했다. 인근 지역의 시민에게 광범위하게 발송되는 재난문자의 특성상, 지하철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러한 문자를 수신했다. 행정안전부 ‘재난문자방송 기준 및 운영규정’에 의하면, 지방자치단체는 관할 구역에서 자연재난이나 사회재난이 발생하면 재난문자를 송출할 수 있다.[4] 그렇다면 국가에 묻는다. 전장연 시위와 무정차 통과 대응이 신속한 초동 대응이나 주민 대피가 필요한 사회재난에 해당하는가? 전장연에 ‘엄정 대응’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정차 통과 조치까지 감행한 국가이지만, 대중의 비난을 감수하기는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무정차 통과라는 방법을 택하여 시민의 불편을 초래한 주체는 다름 아닌 국가임에도, 국가는 ‘재난을 만든 시위’에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교묘히 이들을 향한 사람들의 혐오를 조장하는 행태를 보인다. 무정차 통과를 안내하는 수많은 방법이 존재하지만, 지하철 이용객이 아닌 시민에게도 안내를 전파하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불필요하게 확대된 스피커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는 국가가 장애인을 사회에서 고립시키는 수많은 방법 중 한 가지에 불과하다. 재난문자 한 통에도 쉽사리 밀려날 수 있는 이들이 과연 사회적 강자인가.
한편, 국가는 이 ‘불법시위’를 억누르고자 탈시설화 의제와 이와 관련된 예산 요구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당장 모든 장애인을 시설에서 나오게 하자는 주장이 아닌데도 그것이 전장연의 터무니없는 요구인 듯이 그 의미를 교묘히 왜곡하여 해석하고 비난했다. ‘장애인권리예산에서 70~80%는 탈시설 예산이다’, ‘탈시설한 장애인을 위해 연간 활동지원 예산만 인당 1억 5,000만 원이 든다’라는 비용적인 프레임-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5]-을 앞세워 탈시설 정책에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쳤을 뿐만 아니라, 시설 환경 개선을 우선해야 한다면서 장애인도 시설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아무리 시설 환경을 개선한다고 하더라도, 시설에서 거주하는 순간 마주해야 하는 강제와 억압, 부자유는 사라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지역사회에서의 생활이 불가능해 탈시설이라는 선택지 부재로 시설로 떠밀리는 장애인이 절대다수임을 고려한다면 현실과 상당히 동떨어진 발언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탈시설할 권리는 어디에 있는가? 선택지가 하나뿐인데 그것을 고르는 것이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모든 발언의 바탕과 행간에는 그들이 ‘낯설고 귀찮으며 비생산적인 자’로 바라보는 장애인의 출현을 불편하게 여기면서 여전히 지역사회 바깥으로 추방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 국가에 장애인은 국민의 이름표를 단 비국민이고 완전한 외부인인 셈이다.
현재 시설화와 탈시설화라는 이분법적 접근하에 담론이 형성되고 있다. 하지만 탈시설화 의제는 A 또는 B라는 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시설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보호라는 미명 아래 누군가를 수용하고 격리하는 기능을 해왔다. 대부분의 장애인 시설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을뿐더러 야간에는 건물 전체를 소등하여 지역에서 시설의 존재 자체가 은폐되고 사라지게 된다. 낯설고 이상한 존재를 보이지 않는 곳에 가두어 비가시화하는 메커니즘은 오래전부터 암묵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한센병 환자를 수용한 소록도와 유대인, 집시, 장애인, 동성애자 등을 말살하던 아우슈비츠가 있었듯, 잔혹한 폭압과 존재 말살은 우리도 알지 못하는 순간에 어디선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국가가 낯설고 이상한 존재를 수용하는 이유는 지극히 단순해서 허무할 지경이다. 귀찮고 성가시며 보이는 것만으로도 불편해서다. 국가는 ‘약자와의 동행’ 같은 문구로 사회 통합을 외치면서도 효율적 세계의 건설을 위하여 비효율적이라고 여겨지는 존재들은 얼마든지 치워도 상관없는 모순적인 태도를 고수한다. 국가가 장애인의 탈시설 자체와 관련 논의를 비현실적인 문제로 치부하며 봉쇄하려고 하나, 이는 애초에 낯설고 귀찮은 장애인이란 존재는 어디까지나 배제하고 분리하여 고립시킬 수 있다는 기저의 발상을 합리화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와 권리를 박탈하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지도 않으며 사회와 단절시키는 시설은 선택지의 자격조차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시설과 탈시설을 나란히 놓으며 선택을 설파하는 국가의 프레임은 애초에 글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립생활을 할 때 탈시설을 하게 되면 24시간 활동보조를 붙여줘야 자립생활이 가능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24시간 활동보조를 붙이면요. 그건 자립생활이 아니고 24시간 돌봄으로 봐야 되는 거 아니냐 저희들은 그렇게 해석하고 있고요. … (중략) … 또 하나는 아까 24시간 활동보조라고 하는 건 저희들 생각은 돌봄이 필요한 분에 대한 돌봄 서비스가 제공돼야 되는 부분이지. 과연 혼자 생활하시기에 어려운 분이 자립생활을 얼마나 잘할 수 있으며 지역사회에 얼마나 잘 정착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어려움이 있을 것 같고요.”[6]
또한, 국가는 ‘돌봄’을 제공하면서도 그 의미를 곡해한다. 돌봄은 본래 불능하고 병적이고 무력한 대상을 상정하지 않는다. 사실은 무의식적으로 전 지구의 존재들이 서로에게 돌봄을 실천한다. 친족관계에서, 교우관계에서, 애정 관계에서 말이다. 따라서 돌봄은 시혜나 수혜의 측면으로 해석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의존의 함의 또한 무능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 애초에 의존과 자율, 의존과 독립은 각각 상호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다. 사회에서 모든 일을 홀로 하고 타인의 도움 없이 고립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상호의존을 통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독립은 자기 뜻으로 삶에서 권리를 행사하고 선택하는 자율에 의해서 비로소 구현되는 것이다. 개인의 특성과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의존하고 자율성을 가질 수 있으며 독립할 수 있다.
이러한 돌봄의 의미와 맥락을 상기할 때, 김성한 서울시 복지정책실장이 전장연과의 공개 대담에서 밝힌 위와 같은 주장이 얼마나 편협하고 왜곡되었으며 부적절한지 알 수 있다. 활동보조인력 지원 사업은 국가에서 제공하는 대표적인 돌봄 서비스라고 할 수 있는데, 서울시라는 도시에서 관련 정책을 기획하고 시행하는 책임자의 시선에서 24시간 돌봄 지원이 필요한 장애인은 지역사회에서 ‘수용’되기 어렵기에 추방되어도 문제 되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그는 발언을 통해 돌봄을 무력하고 병적인 것과 연결하며 은연중에 드러나는 비장애인은 돌봄과는 무관하다는 왜곡된 시각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돌봄을 받는 것을 자립이 불가능함으로 인식하는 듯한 대목에서 과연 국가가 돌봄이 필요한 장애인 시민을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바라보기나 하는지에 대하여 절로 의문을 품게 한다. 장애인의 권리보장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국가가 정작 요구에는 침묵하면서 장애인 시민에 대한 혐오를 숨기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의 부재와 과잉 존재 속에서도 저항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2월 14일 기준으로 전장연은 기획재정부의 장애인권리예산 요구 반영과 오세훈 서울시장의 ‘지하철 리프트 추락 참사·엘리베이터 100% 설치 약속 미이행’에 대한 사과, 기획재정부에 장애인권리예산 반영 촉구, 탈시설 가이드라인 권고와 관련해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 위원과의 초청간담회 진행, 2024년 서울시 장애인권리예산 답변을 3월 23일까지 요구하며 출근길 승하차 시위를 중단한 채 혜화역 승강장에서 선전전을 벌이기로 했다.-2월 14일 박경석 대표의 깜짝 1인 승차 시위가 있었으나, 경찰의 제지로 실패했다.-승강장에서도 이들의 투쟁은 이어졌다. 장애인의 권리를 의미하는 스티커를 바닥에 붙이고, 노래하고, 일문일답을 하고, 피켓을 들고, 촬영하고, 기록하고, 그림을 보여주고, 삭발하고, 기자회견을 열고……. 어느덧 300일에 가까워지는 이들의 열렬한 투쟁은 오랜 기간만큼 다채로운 퍼포먼스로 형상화된다. 투쟁에 전장연 활동가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과 단체 활동가들이 곁에서 함께 외치고 가창하며 굳게 연대한다. 박 대표는 지난 2월 3일 선전전에서 “시민 여러분, 정치권력과 일부 언론의 갈라치기에 흔들리지 말아주십시오. 저희는 100명 중 99명의 시민이 우리를 욕하고 혐오해도, 1명의 시민 곁에서 지하철행동을 포기하지 않고 외치겠습니다. 전장연과 함께하는 1명의 시민이 되어주십시오. 장애인도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며 지역사회에서 건강하게 함께 살고 싶습니다.”라고 발언했다.[7] 이들은 여전히 찾지 못한 권리를 염원하며 큰 외침으로 아침을 깨울 것이다. 어떤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절박하나 굳건하게.
[1] 김지혜 기자, “전장연은 지하철 시위로 무엇을 얻었나?[뉴스레터 점선면]”, 경향신문, 2023.02.09., (https://naver.me/Grq4VOgd, 2023.02.09.)
[2] 김지혜 기자, “전장연은 지하철 시위로 무엇을 얻었나?[뉴스레터 점선면]”, 경향신문, 2023.02.09., (https://naver.me/Grq4VOgd, 2023.02.09.)
[3] 유경선 기자, “전장연 시위 ‘재난문자’로 공지한 서울시···시민들 “문자 전송 기준 의문””, 경향신문, 2023.01.05., (https://m.khan.co.kr/article/202301051705011, 2023.01.05.)
[4] 유경선 기자, “전장연 시위 ‘재난문자’로 공지한 서울시···시민들 “문자 전송 기준 의문””, 경향신문, 2023.01.05., (https://m.khan.co.kr/article/202301051705011, 2023.01.05.)
[5] 강혜민 기자, “[전장연-오세훈 팩트체크①] 탈시설하면 1명당 1억 5000만 원 들어간다?”, 비마이너, 2023.02.12.,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4608, 2023.02.12.)
[6] 비마이너, “[전문] 전장연-오세훈 단독 공개 대담 녹취록”, 비마이너, 2023.02.02.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4563, 2023.02.02.)
[7] 복건우 기자, "[승강장일기] 시설은 선택지가 아니다", 비마이너, 2023.02.03.,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4564, 2023.02.03.)
참고문헌
단행본
『돌봄 선언(상호의존의 정치학)』, 더 케어 컬렉티브, 니케북스, 2021
『시설사회(시설화된 장소, 저항하는 몸들)』, 장애여성공감, 와온, 2020
『어른이 되면』, 장혜영, 우드스톡, 2018
신문 기사
김지혜 기자, “전장연은 지하철 시위로 무엇을 얻었나?[뉴스레터 점선면]”, 경향신문, 2023.02.09., (https://naver.me/Grq4VOgd, 2023.02.09.)
비마이너, “[전문] 전장연-오세훈 단독 공개 대담 녹취록”, 비마이너, 2023.02.02.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4563, 2023.02.02.)
강혜민 기자, “[전장연-오세훈 팩트체크①] 탈시설하면 1명당 1억 5000만 원 들어간다?”, 비마이너, 2023.02.12.,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4608, 2023.02.12.)
강혜민, 복건우, 하민지 기자, “2023 승강장일기(시리즈)”, 비마이너, 2023.01.11.~2023.02.14.,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71&view_type=sm, 2023.01.11~2023.02.14.)
나영정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시설화를 넘어서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며”, 비마이너, 2019.09.29.,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13272, 2019.09.29.)
유경선 기자, “전장연 시위 ‘재난문자’로 공지한 서울시···시민들 “문자 전송 기준 의문””, 경향신문, 2023.01.05., (https://m.khan.co.kr/article/202301051705011, 2023.01.05.)
편집위원 띵동(glowingpinky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