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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20호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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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Mar 15. 2024

젠더 횡단 열차

편집위원 연잎

  늦은 새벽, 여행객 한 명이 조심스레 기차역 플랫폼에 들어선다. 긴장한 듯 움츠린 어깨와 달리, 그의 얼굴에는 설렘과 기대감이 한껏 담겨 있다. 먼 길을 떠나는 것치고는 제법 가벼워 보이는 짐을 들고서, 그는 기차가 서 있는 선로 쪽으로 향한다. 열차에 오르기 전, 그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본다. 일생을 살아온 고향 기차역의 풍경을 눈에 가득 담고서, 그동안 매일같이 꿈꿔왔던 여정을 도와줄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그를 포함하여 플랫폼에 있던 몇 사람이 모두 탑승을 마치자,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차는 역을 벗어나자 속도를 내고, 선로가 향하는 지평선 너머에서는 여명이 밝아와 하늘을 물들인다.


트랜스젠더란?

  ‘건너다’라는 의미를 지닌 영어 접두사, ‘trans(트랜스)’.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아마 한 번쯤은 이 접두사가 포함된 단어나 표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예컨대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영어로 ‘Trans-Siberian Railway’라고 표기하고, 미 대륙을 관통하는 철도라든지 대서양을 건너는 비행기 노선은 ‘Transcontinental Railroad’, ‘Transatlantic Flight’라고 부른다. 자동차에서 인간형 로봇으로, 또 그 역으로 자유롭게 외형을 바꿀 수 있는 외계생명체가 등장하는 영화의 제목은 <Transformer(트랜스포머)>다. 이밖에도 접두사 ‘트랜스’를 사용하는 영어 어휘의 수는 무궁무진하게 많다.


  ‘트랜스젠더(transgender)’. 방금 이야기한 내용을 참고해 문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젠더를 건너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때 ‘젠더(gender)’란, 보통 영어에서 생물학적 성(性)을 의미하는 ‘섹스(sex)’에 대응하여 ‘사회적 성별’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단어인데, 실제 의미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복잡하다. 생식세포의 역할이라든지 생식기 모양, 성염색체 형태 등 생물학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섹스와 달리, 젠더는 전적으로 ‘사회적인’ 구성물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젠더의 구체적인 결정 요인은 어떤 면에서 아직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그것이 전적으로 사회 구조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생물학에서 단서를 찾으려 애쓴다. 하지만 오늘날 대다수 학자는 젠더가 단일한 결정 요인을 가지는 절대적 기준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압력과 개인의 자아 인식, 생물학적 요인 등이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형성되는 일종의 정체성(identity)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젠더는 ‘개인과 사회가 성(sex)을 해석하는 종합적인 방식 또는 체계’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이와 함께 트랜스젠더에 대해 논하기 위해 알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성별 지정(Sex Assignment)이다. 인간 사회는 동서를 막론하고 예로부터 아이가 태어나면 외적으로 드러나는 생식기의 형태에 따라 남성과 여성 중 하나의 성별을 부여한 후 그에 어울리는 역할을 요구해왔는데[1], 이것이 바로 성별 지정이다. 간단하게 말해, 이분법적 젠더 기준에 모든 사람을 끼워 맞추는 작업인 셈이다. 근대 이후 과학이 발전하고 국가의 기능이 확대되면서, 이 성별 지정 작업에 생물학적 연구 결과부터 법적 제도까지 온갖 화려한 장치들이 동원되기 시작하였지만, 인간을 외적 요인에 따라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한다는 본질은 그대로 남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 이 성별 지정은, 트랜스젠더가 젠더를 가로지르게 되는 가장 중요한, 어쩌면 유일한 이유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을 토대로 트랜스젠더를 정의한다면, ‘태어날 때 지정받은 성별이 스스로 인식하는 실제 성별 정체성과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 싱겁게 들릴 수 있는 점은 이해하지만, 정말로 이게 전부다. 인간이 하는 일이 으레 그렇듯이 성별 지정 작업 역시 허점투성이이고, 트랜스젠더는 단지 그로 인한 피해를 우연히 떠안게 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한편, 트랜스젠더라는 하나의 범주 안에도 제각각의 다양한 사람들이 아주 많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같은 트랜스젠더로 묶인다고 해서, 모두가 다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트랜스젠더라는 큰 범주 아래에는 다양한 세부 분류들이 존재한다. 먼저 가장 상위의 분류는 바이너리(binary)와 논바이너리(non-binary)이다. 각각 ‘이분법의’, ‘비(非)이분법의’라는 의미인데, 전자는 남녀라는 이분법적 기준 내에서 젠더를 가로지르는 사람들을 지칭하고, 후자는 전통적 성별 기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바이너리 트랜스젠더는 두 개의 하위분류로 다시 나누어지는데, ‘MTF(male to female)’와 ‘FTM(female to male)’이다. 직관적인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전자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향하는 이들을, 후자는 여성에서 남성으로 향하는 이들을 지칭한다. 다만 이 두 용어는 트랜스젠더들이 성을 ‘전환’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줄 수 있기에[2], 최근에는 당사자들이 스스로 인식하는 젠더에 맞춰 각각 트랜스 여성(trans female), 트랜스 남성(trans male)이라는 용어로 대체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경우에 따라 지정 성별 남성(AMAB; Assigned Male At Birth), 지정 성별 여성(AFAB; Assigned Female At Birth)이라는 표현 또한 사용할 수 있다.

  보통 트랜스젠더는 동성애자, 양성애자, 무성애자 등과 함께 성 소수자(sexual minority)로 분류되며, 성 소수자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표현 중 하나인 LGBT에서 T가 바로 트랜스젠더를 의미한다. 다만 해당 약어에서 함께 지칭되는 다른 성 소수자 집단(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과 트랜스젠더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의 차원에 속하고, 후자는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의 차원에 속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동성애나 양성애는 ‘내가 어떤 성별의 타인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는지’의 문제이고, 트랜스젠더는 ‘나 자신을 어떤 성별로 이해하는지’의 문제이다.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은 완전히 무관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 관계가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트랜스젠더 집단 내에서도 여성을 좋아하는 트랜스 여성(트랜스 레즈비언), 남성을 좋아하는 트랜스 남성(트랜스 게이) 등 다양한 성적 지향이 나타날 수 있다. 한편, 성 소수자 집단 전체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과 같이, 트랜스젠더들은 하늘색, 분홍색, 흰색 줄무늬로 이루어진 고유한 프라이드 플래그(pride flag)를 상징으로 사용한다.




  바퀴가 선로와 마찰하면서 일어나는 낮은 진동이 차내에 부드럽게 울린다. 들고 온 짐을 여전히 품에 안은 채로, 여행객은 창가에 기대어 익숙한 풍경들이 지나가는 바깥을 내다본다. 어느새 모습을 다 드러낸 태양은 땅 위의 모든 것들을 선명하게 비추고 있다. 객실 앞쪽 통로의 문이 열리고, 제복을 입은 차장이 들어와 좌석 순서대로 검표를 시작한다. 승객이 많지 않기에, 금세 여행객의 차례가 되고, 그는 조심스레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승차권을 꺼내 보인다. 검표를 마친 차장이 승차권을 돌려주자, 여행객은 그것을 얻기 위해 겪어야 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젠더 디스포리아

  트랜스젠더들이 자신의 성별 지정 과정에 무언가 착오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는 제각각이다. 가볍게는 다른 성별의 패션이 자신의 자아를 더 잘 표현한다는 생각이 들거나,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서 어색함을 느끼는 경우부터, 심하게는 남/여학교나 군대와 같은 동성 집단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2차 성징 시기 신체적 변화로 인하여 자기 몸에 심한 거부감을 가지는 경우까지 그 유형과 강도가 다양하다. 이처럼 트랜스젠더가 성별 정체성과 관련하여 경험하는 부정적 느낌을 젠더 디스포리아(gender dysphoria), 또는 성별 불쾌감이라고 부른다.


  젠더 디스포리아는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지만, 개인의 지극히 고유한 경험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어 그 경계를 명확하게 설정하기란 어렵다. 다만 오늘날 의학계에서는 젠더 디스포리아가 정신 질환이나 장애가 아니라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있으며, 따라서 트랜스젠더와 젠더 디스포리아는 ‘치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대표적으로 미국정신의학회는, ‘지정 성별과 개인이 경험 또는 표현하는 성별의 현저한 불일치’, ‘자신의 1, 2차 성징에 대한 강한 거부감’, ‘다른 성별의 1, 2차 성징에 대한 강한 욕구’, ‘다른 성별이 되거나, 다른 성별로 여겨지는 것에 대한 강한 욕구’ 등이 6개월 이상 지속되는 상황을 젠더 디스포리아로 정의하고, 젠더 디스포리아를 느끼는 사람에게 지정 성별을 강요하는 ‘전환 치료’ 등은 비윤리적인 행위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3]


  그동안 항상 마음 한편에 존재해왔던 불편한 기분에 마침내 젠더 디스포리아라는 올바른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면, 트랜스젠더는 각자 인생의 갈림길과 마주하게 된다. 한쪽은 새롭게 깨달은 사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서 이전과 같이 삶을 꿋꿋하게 살아내는 길이고, 다른 한쪽은 진정한 자기 모습을 찾기 위해 멀고도 험난한 여정을 마다하지 않는 길이다. 어느 쪽이든 적지 않은 용기를 요구하기에, 이 갈림길을 지나며 모든 트랜스젠더는 어떤 역경이든 이겨낼 단단한 마음을 얻게 된다.




  여행객을 실은 열차는 선로를 따라 나아가다 역을 만나면 멈춰 서기를 반복한다. 정차할 때마다 열차에서 몇 사람이 내리고, 또 몇 사람이 올라탄다. 하지만 여행객은 처음의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점점 이국적으로 바뀌어 가는 창밖의 풍경을 관찰한다. 풀도, 나무도, 심지어는 하늘의 색깔도 달라졌지만, 그는 오히려 그 모습에서 집에 온 듯한 편안함을 느낀다. 무엇인가 떠올랐는지, 여행객은 짐 가방을 뒤지기 시작한다. 곧이어 그는 봉투에 담긴 편지를 꺼내어 읽는다. 고향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건넨 편지에는 여정을 응원하는 따뜻한 말들이 담겨 있다. 그들의 마음에 고마움을 느끼면서, 여행객은 열차가 향하는 곳을 상상한다.


의료적 트랜지션

  트랜스젠더가 젠더 디스포리아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은, 소위 ‘트랜지션(transition)’이라고 부르는 긴 여정의 막이 올랐음을 의미한다. 트랜지션이란 지정 성별과 실제 젠더의 간극을 줄이거나 없애기 위한 작업으로서, 젠더 횡단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트랜지션에는 타고난 신체를 젠더에 맞추는 의료적 트랜지션(medical transition)과, 사회적으로 자신의 젠더를 확정하는 사회적 트랜지션(social transition)의 두 가지가 존재한다. 트랜스젠더들은 경우에 따라 한쪽만 실시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의료적 트랜지션과 사회적 트랜지션을 병행하게 된다.


  만약 한국에서 의료적 트랜지션을 진행하고자 한다면, 트랜스젠더가 가장 먼저 방문해야 할 곳은 정신건강의학과(이하 정신과)이다. 여러 절차가 있는 일련의 의료적 트랜지션 과정에서 정신과는 트랜스젠더를 판별하고 진단하는 제1 관문 역할을 한다. 정밀심리검사와 상담 등을 거쳐 내원자가 젠더 디스포리아를 느끼는 트랜스젠더임을 확인하면, 정신과에서는 한국의 질병 분류상 F64.0 ‘성전환증’이나 F64.9 ‘상세불명의 성 주체성 장애’[4] 등에 해당한다는 진단서를 발급한다. 이 진단서는 이후 추가적인 의료적 트랜지션 과정을 밟을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티켓 역할을 하게 된다.


  정신과 진단서를 통해 젠더 디스포리아의 심각성과 의료적 조치의 필요성이 인정되면, 트랜스젠더는 비뇨기과, 여성건강의학과, 내분비내과 등에서 성호르몬 관련 약물을 처방받을 수 있다. 이를 호르몬 대체 요법(HRT; hormone replacement therapy)이라고 부르며, 트랜스여성의 경우 여성호르몬을, 트랜스남성의 경우 남성호르몬을 투여하게 된다. 이때 호르몬 대체 요법은 개인의 호르몬 수치, 건강 상태 등에 따라 약물의 용량과 종류를 엄격하게 관리하여 실시해야 하므로, 반드시 의료기관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성호르몬제는 근육주사, 경구 복용 약, 패치 또는 연고 등 다양한 형태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효과가 빠른 근육주사 방식이 주로 사용된다.


  호르몬 대체 요법의 목적은 트랜스젠더의 신체를 실제 성별 정체성에 맞게 변화시켜 젠더 디스포리아에 의한 불편함을 경감시키는 것이며, 이 과정은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먼저 여성호르몬을 투여할 경우, 투여 시작 후 수개월 내로 지방 재분배, 근육량 감소, 피부 유분 감소 등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와 함께 생식 능력 및 성욕이 저하되고 유방이 성장하게 된다. 반대로 남성호르몬의 경우, 역시 지방 재분배와 함께 근육량 증가, 피부 유분 증가, 월경 중단, 목소리 변화, 수염 및 체모의 발달 등이 이루어진다. 다만 변화의 시점과 정도 등은 개인차가 있을 수 있다.


  호르몬 대체 요법은 내분비계를 통한 변화를 유도하기 때문에, 2차 성징 시기가 지난 성인의 경우 효과가 제한적일 수 있다. 따라서 더 분명한 신체 변화를 원하는 트랜스젠더는 외과적 수술을 고려하기도 한다. 트랜스 여성은 얼굴 성형수술이나 목소리를 높게 만드는 성대 수술, 유방 수술 등의 선택지가 있고, 트랜스 남성은 각종 미용 성형수술과 유방 절제 및 남성 흉부 재건 수술 등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외과적 수술은 건강이나 비용의 측면에서 부담이 크고 부작용의 가능성도 존재하기에, 호르몬 투여만을 진행하는 트랜스젠더도 많이 존재한다.


사회적 트랜지션

  사회적 트랜지션은 트랜스젠더가 일상에서 자신의 실제 성별 정체성대로 대우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에는 성별에 맞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 패션을 통한 자기표현 과정에서 성별을 지적받지 않는 것, 자기 성별의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는 것 등을 포함될 수 있다.


  많은 경우 트랜스젠더는 사회적 트랜지션 과정을 커밍아웃으로 시작하게 된다. 커밍아웃은 ‘숨어있던 옷장에서 나온다(coming out of the closet)’라는 영어 관용구에서 유래된 용어로, 성 소수자가 타인에게 자신의 성적 지향 또는 성별 정체성에 대하여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트랜스젠더에게 커밍아웃은 처음으로 진정한 자신으로서 사회에 발을 내딛는 중대한 시도이고, 동시에 깊은 고민을 나누고 힘든 여정을 응원해줄 동료를 얻는 기회이기도 하다. 보통 커밍아웃의 대상으로는 친한 친구, 가족, 학교나 직장의 동료 등이 고려되지만, 만일 트랜스젠더 차별 및 혐오의 분위기가 심해 트랜스젠더 본인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아예 커밍아웃하지 않고 의료적 트랜지션이나 다른 사회적 트랜지션 절차를 진행할 수도 있다.


  커밍아웃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사회적 트랜지션 과정에서는 트랜스젠더 당사자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공동체의 도움 또한 필요하다. 특히 이는 트랜스젠더의 신체적/정신적 건강 및 인권과도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사회 전체가 관심을 기울여 트랜스젠더 차별 철폐, 의료 복지를 통한 트랜지션 지원 등 여러 필요한 조치들을 취해야만 한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열차는 서서히 종착역에 가까워진다. 객실이 하차를 준비하는 승객들로 분주해지자, 잠깐 잠에 들었던 여행객도 깨어나 채비를 한다. 열차는 플랫폼에 들어서며 속도를 줄이다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완전히 멈춘다. 짐을 챙겨 열차에서 내린 여행객이 크게 숨을 들이쉬자, 깨끗한 공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아주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바로 그 장소에 도착했음을 확인한 여행객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성확정 수술

  의료적 트랜지션의 가장 최종 단계에는 성확정 수술(SRS, sex reassignment surgery)이 존재한다. 과거에는 ‘성전환 수술’ 등의 명칭으로도 알려졌던 성확정 수술은, 외과 수술을 통해 트랜스젠더의 성기를 성별 정체성에 맞게 재건하는 작업이다. 만약 성확정 수술을 결정했다면, 트랜스 여성의 경우 음경과 고환을 제거한 후 여성의 성기를 재건하게 되고, 트랜스 남성의 경우 자궁과 난소를 제거한 후 남성의 성기를 재건하게 된다. 물론 구체적인 수술 방식과 내용 등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성확정 수술은 신체에 주는 부담이 크고, 다른 수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험하며,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에, 다른 의료적, 사회적 트랜지션 과정을 마쳤더라도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수술을 망설인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최근에는 후술할 법적 성별 정정을 위한 필수 요건에서 성확정 수술 여부를 제외하는 추세이다.


법적 성별 정정

  의료적 트랜지션의 마지막 단계가 성확정 수술이라면, 사회적 트랜지션의 마지막 단계는 법적 성별 정정이라고 할 수 있다. 법적 성별 정정이란 출생 시 국가에서 지정한 성별에 대한 공식 정보를 수정하는 것으로, 한국에서는 법원에서 결정하여 공문서상의 기재 내용을 수정하게 된다.


  현재 한국에는 법적 성별 정정에 관한 구체적인 법률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에, 2024년 현재에도 2006년 대법원이 제시한 사무 지침에 따라 재판부의 재량으로 성별 정정 결정이 내려지고 있다. 이 지침에 따르면 법적 성별 정정을 위해서는 트랜스젠더는 각종 기본 서류와 함께 ‘성전환증’에 대한 정신과 진단서, 성확정 수술 확인서, 생식 능력의 완전한 상실에 대한 의사 소견서, 성장과정진술서와 인우보증서 등을 제출해야 한다. 이후 혼인이나 전과 여부 등을 조회하여 문제가 없는 때에만, 판사로부터 법적 성별 정정 허가를 받을 수 있다. 최근 들어 성확정 수술을 하지 않았더라도 성별 정정 허가를 받은 판례가 몇 번 나오기도 했지만, 여전히 한국은 트랜스젠더의 법적 성별 정정에 상당히 엄격한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법적 성별 정정 허가서를 받으면, 주민등록번호와 각종 면허증을 재발급받을 수 있고, 공문서상에도 바뀐 성별로 기재된다. 이를 시작으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각종 개인정보를 모두 수정하고 나면, 마침내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맞는 삶을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영유할 수 있게 된다. 이와 함께 젠더를 가로지르는 여정도 막을 내린다.




  여행객은 기차역을 나와 사람들이 가득한 길거리로 들어선다. 낯선 공간임에도 떠나온 고향보다 더 편안하고 익숙하다. 물론 그는 이곳이 천국이 아님을 알고 있다. 이곳에서도 수많은 고난을 겪을 것이고, 때로는 여정 이전보다도 힘든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 터를 잡고, 자기 자신의 진정한 삶을 꿋꿋하게 살아갈 것이다. 이제는 여행객이 아니라, 주민으로서.


편집위원 연잎 (planet0428@naver.com)




참고자료

나영정 외, 『트랜스로드맵』, 多씨&희망을만드는법, 2013

로라 마일스 외, 『트랜스젠더 차별과 해방』, 책갈피, 2018

미국정신의학회 홈페이지 (https://www.psychiatry.org/)

세계보건기구 「국제질병분류 제11판」




[1] 다만 오늘날에는 동남아시아, 인도, 북아메리카 등 다양한 문화권에서 남녀 구분 외의 제3의 성을 인정해온 역사가 민속학 연구를 통해 세계 각지에서 확인되면서, 이러한 인식 역시 도전받고 있다.

[2] 트랜스젠더는 성을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성에 맞게 자기 모습을 ‘확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이에 따라 최근에는 기존에 잘 알려진 명칭인 ‘성전환 수술’ 대신 ‘성 확정 수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편이다.

[3] 미국정신의학회 홈페이지, 「젠더 디스포리아란?」

https://www.psychiatry.org/patients-families/gender-dysphoria/what-is-gender-dysphoria

[4] 해당 표현들은 트랜스젠더를 ‘정신 질환/장애’로 분류하던 과거의 잔재로서, 세계보건기구 「국제질병분류 제11판(ICD-11)」이나 미국정신의학회의 「정신 장애의 진단 및 통계 편람 제5판(DSM-5)」 등 오늘날 통용되는 질병 분류 체계에서는 ‘젠더 불일치’, ‘성별 불쾌감’ 등의 표현으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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