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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5호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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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Oct 21. 2021

빛 속을 걷는 법: 재와 사랑의 미래, 미래 산책 연습

[헤엄치기] 편집위원 퓨

[원제목] 빛 속을 걷는 법: 김연덕 『재와 사랑의 미래』, 박솔뫼 『미래 산책 연습』

꼭 각주를 참조하며 읽어 주세요!


 시간이 자꾸만 지나간다. 이런 생각을 언제 했느냐면, 재작년부터. 그때 나는 생활의 대부분을 송도에서 보내는 중이었고 나의 매일을 꾸리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어떤 일을 하는 순간이 즐겁다고 생각한 적은 많았지만 사는 게 재밌다는 생각은 그때 처음 했다. 과외를 하러 주말마다 송도를 뒤로하고 집에 갈 때도 과제 때문에 바빠서 이틀 밤을 내리 새울 때도 심지어는 그토록 싫어하던 시험기간에도 지금이 지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겨울 초입에는 송도 떠나기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할 미래를 상상하며 자꾸 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32p) 박솔뫼 소설 『미래 산책 연습』의 주인공 수미가 어린 시절, 흘러가는 풍경과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늘 그렇게 떠올렸던 것처럼. 그러나 내가 송도를 떠난 것은 벌써 두 해 전이고 시간은 자꾸만 지나간다. 이제 더는 매일이 즐겁다거나 모든 순간을 잡아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지나간 일들은 금세 잊힌다. 과거가 어떻든 미래는 계속 온다. 원하지 않아도 온다.

 송도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내 삶에는 즐거운 루틴이 하나 더 생겼다. 그건 아티스트 이랑과 친구친구 서른 명이 갑작스레 암 선고를 받은 친구를 위해 기획한 메일링 서비스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를 구독하면서 시작되었다. 아침마다 하나씩 도착하는 서른 명의 이야기를 6개월 동안 매일 보고 듣고 읽었다. 어떤 날에는 시와 소설, 또 어떤 날에는 에세이나 만화, 다른 날에는 그림과 사진, 음악 같은 것들. 좋아하는 한 시인 때문에 구독을 시작했지만 친구친구들의 이야기가 쌓일수록 기다리는 날짜는 점점 늘어났고, 더는 특정한 누군가의 메일을 기다린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 정도로 모두의 메일을 매일 기대하게 되었다. 그래도 내심 반가운 날짜들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매달 18일이면 포토그래퍼 박현성과 시인 김연덕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포토-포에트리가 도착했는데, 18일을 가장 반가운 날 가운데 하나로 꼽았던 나로서는 김연덕의 첫 시집이 나올 미래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미래라는 말에는 어딘지 묘하게 끌리는 구석이 있다.[1] 未來. 아직 오지 않은 시간. 무엇이 다가올지, 다가오기나 할는지 조금도 알려주지 않고 단어는 단어 그대로 ‘오지 않은’ 채 존재한다. 하지만 현실의 미래는 그렇지 않다. 반드시 올 것으로 기대한 미래는 자주 사라지고, 다가올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현재를 지나 과거가 된다. 그걸 의식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지금이 너무 좋다고 생각하거나 너무 구체적인 미래를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순간이 잦아졌다. 실현되지도 못한 채 나를 떠날지도 모르니까. 찾아와도 어차피 다 지나갈 테니까. 나는 지나간 과거보다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더 자주 애도하는 사람이 되었다. 올해 출간된 김연덕의 첫 시집과 박솔뫼의 장편소설에는 모두 ‘미래’라는 단어가 들어가는데, 이 글에서는 『재와 사랑의 미래』, 『미래 산책 연습』 두 책에 담긴 미래의 감각들을 살펴보면서 이 이상한 단어를 찬찬히 들여다보려고 한다. 만들고 실패하고 사랑하고 연습했던, 기대했던, 기대하지 않았던, 미래. 재와 사랑의 미래, 미래 산책 연습, 재와 사랑의 미래 산책 연습… 울림소리 네 개로 이루어진 단어를 입에 넣고 계속해서 굴려 본다.



『재와 사랑의 미래』 / 김연덕 / 민음사

구체적인 물질을 둘러싼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 김연덕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눈에 띄는 재, 초, 유리, 얼음 같은 대상들을 나는 자꾸 시간성과 엮게 된다. 그것들은 지나간 기억의 증거이거나 지나가며 흔적을 남기는 것이거나 지나갈 다음의 시작 같은 것이다.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일시적 형태의 과거, 현재, 또는 미래이다. 나는 「긴 초」를 읽는 동안 “다 타 버린 나무 타 버린 종이”의 재를, 사물이 끝나며 남긴 것의 미래를 상상한다. “현재라고 하는 순간 빗줄기에 조용히 달라붙는 유리”를, 그것이 시작되었을 과거를 상상한다. “하나씩 타오르는 초”와 그것이 “타는 냄새”가 생생히 느끼게 할 현재를 상상한다. 그런 상상들을 모아 허공으로 날려 보내면서 그것들이 사실은 과거, 현재, 미래 같은 언어들로 분절될 수 없는 “하나의 이상한 ‘시간덩어리’”[2]를 보여주는 사물들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상한 시간성은 늘 사물을 비추는 ‘빛’과 얽혀 있다. 그의 시에서 빛은 때로 “조금 전과 먼 미래를 가르는”(「재와 사랑의 미래」, 77p) 것이자 “영원처럼 멈추는” 것이고, 같은 공간 안에서도 “정지된 빛”(「재와 사랑의 미래」, 98p)이자 “어떤 속도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김연덕은 자신이 생각하는 조형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기호를 빛 모양 기호(‘✧’)로 꼽으며 그것을 시집 제목으로 고르고 싶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3] “빛이라는 단어가/빛처럼 생겨서 좋다”던 시인의 말과 김연덕의 시들 속에서 수없이 묘사된[4], 시간을 관통하며 펼쳐지는 흐릿하고 환한 빛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빛 모양 기호가 시집 제목이었어도 정말로 좋았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키워드검색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를 고려했을 때 책 제목을 키보드에도 없는 낯선 기호로 고르는 것은 출판사나 편집자 입장에서는 큰 모험이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실제 출간되어 지금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시집의 제목은 ‘재와 사랑의 미래’이다. 실현될 수도 있었지만 실패한 『✧』의 미래. 그러니까 과거에 상상했던 미래 같은 것들을 돌이키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것인 동시에 나의 과거에 얽혔지만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와 현재의 일들과는 다소 동떨어진 환상이다. 사라진 미래 혹은 박탈된 미래. 갈 수도 있었지만 가지 못한/않은 수많은 미래는 모두 어디에 쌓여 있을까.

 지금 내가 말하려는 것은 라이프니츠[5]의 가능세계 개념이다. 가능세계는 현실에서 발생하거나 발생하지 않은, 다양한 가능성을 포함한 모든 세계의 집합이다. 우리는 『재와 사랑의 미래』 대신 『✧』이 출간된 가능세계를 떠올릴 수 있고, 김연덕은 시 속에서도 그렇게 가능한 세계 또는 미래의 모습들을 이따금 그려본다. 이를테면 「여름장미」의 화자는 “던졌는데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공”의 행방을 찾는데, 그것은 이 세계나 다른 가능세계에서 “나뭇가지를 부러트렸을 수도 누군가의 머리를 쳤을 수도 여전히 손 안에 있을 수도 처음부터 없었을 수도 있”고, 어떤 세계에서 “대부분의 공은 다각형일 수도 있었다”. 「✦」에서는 “그때 이 서랍이 열렸더라면 서랍 속 어둠이 덤불이 도깨비불이 눈에 미리 익었더라면 그래서 먼저 치우거나 길들일 수 있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궁금해하며 묻는다. 하지만 뒤늦게 가능성을 따지는 것은 소용없다. 실제로 발탁된 미래에서 출간된 시집의 제목이 『✧』이 아니라 『재와 사랑의 미래』이듯 지금의 세계에서 대부분의 공은 구형이며 시 속 서랍은 열리지 않았으니까.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현실 세계는 무한히 많은 가능세계 가운데 신이 ‘최선의 원리’라는 기준에 따라 선택한 최선의 세계이다. 즉 현재 세계의 모든 요소는 발생 전부터 신에 의해 이미 예정된 것이며, 시공간적으로 이미 완결된 세계의 집합이라는 개념은 곧 결정론적 색채를 띤다. 그러나 나는 늘 묻고 싶었다. 신적 관점에서 선택한 최선의 가능세계와 우리가 받아들이는 최선이 아닌 세계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내 앞에 닥쳐올 모든 미래가 필연적으로 정해져 있었고 심지어 좋은 것이라는데, 나는 그것을 조금도 예측할 수 없고 좋은 것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재와 사랑의 미래』에 드러난 미래 앞에서의 무력한 표현들에 나는 공감한다. “예감할 수 없는 빛”(「재와 사랑의 미래」, 19p) 앞에서 “불분명한 미래만이 전부”처럼 느껴지는 순간. 나는 “준비하고 대비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재와 사랑의 미래」, 98p) 막막히 생각하며, 내가 속해 있고 또 벗어날 수 없는 시공간을 비추는 빛 속에서 “반짝임에 시린 눈을 견뎌 내”(「유리빛」)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라는 우연에 대한 감각이 신이 아닌 유한한 자들의 착각일 뿐이래도, 최소한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순간이 있음은 확실하다. 평론가 조대한과 최가은의 시 리뷰 블로그 SIRO에서는 종교적 느낌이 풍부하게 담긴 김연덕의 시 「그릭크로스」를 두고 두 평론가와 시인이 모여 이야기를 나눈 좌담 기록을 볼 수 있다.[6] 조대한은 “420년 전에”로 시작하는 구절을 두고 검색 중에 우연히 발견한, 420년 전에 화형당한 한 인물을 언급한다. 평론가의 추측에 따르면 해당 시구 뒤에 이어지는 “푸른 천장”과 “깊고 충실한 내 성층권”, “고정된 공간”의 이미지는 당시 교회의 우주관과 얽히고, 그런 우주관에 반대했던 그가 쇠꼬챙이에 혀가 뚫리는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은 “미치지 않았어요 제정신으로/이가 부러졌어요/혀가 잘렸어요”와 같은 또 다른 시구와 겹치는 듯하다. 그러나 시인은 처음 듣는 인물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이 절묘한 우연[7] 앞에서 깜짝 놀란 세 사람의 반응은 문자 기록을 넘어 읽는 사람에게까지 생생히 다가온다.



『미래 산책 연습』 / 박솔뫼 / 문학동네

 이런 신기한 일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네 삶은 꽤 자주 우연한 사건과 만남들로 풍부해진다. 1인칭 서술자 ‘나’와 3인칭의 또 다른 주인공 수미의 이야기가 교차 제시되는 『미래 산책 연습』은 박솔뫼의 여느 소설이 그렇듯 심각한 사건 없이 물처럼 흘러가는 인물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가만히 그 모습을 들여다보면 이들의 매일에 개입되는 사소한 우연들이 이야기를 잇고 삶을 잇고 시간을 잇는다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다. 정석적인 서사 구조로는 요약할 수 없을 만큼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박솔뫼 소설의 매력인데, 그럼에도 무언가가 움직이며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의 문장에서 헤어나오기는 어렵다. 책의 많은 부분은 작가로 활동하며 충동적으로 부산에 작업실을 겸할 거처를 계약한 ‘나’가 홀로 부산을 산책하거나 집주인 최명환을 만나 시간을 보내는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서술자는 우연히 들어선 부원아파트의 목욕탕에서 우연히 최명환을 만나 우연히 좋은 집을 얻고, 집과 최명환을 매개로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커피를 술을 마시고 대화를 하고 영화를 본다.

 책 속 인물들의 느슨한 얽힘을 보며 나는 공가능(compossible)한 세계란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한 개체의 모든 속성은 그가 속한 세계 속 다른 모든 것의 속성들과 연관되며, 그렇게 공가능한 것들이 하나의 가능세계를 이룬다. 나와는 요만큼도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믿었던 존재들을 포함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데다 어느 한 요소라도 사라지거나 변하면 그 세계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8] 먼 공간의 타자뿐만 아니라 먼 시간의 타자라도 마찬가지이다. 그걸 떠올리면 “나와 비슷하고 나와 많은 것들을 공유하지만 결코 만날 수 없는 나와 비슷한 사람을 생각”(185p)하고, 잡지 속 모델들을 보며 “처음 보는 이 사람들이 이미 사라진 사람처럼 여겨져 순간적으로 무척 그리워”(175p)한다든가, 가끔 “한 사람의 시민으로 혹은 인류의 일원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며 “현재를 살고 있는 나는 지금 어떤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가를”(14-15p) 돌아보는 ‘나’의 태도가 같은 세계 속 타자와의 공가능성, 모르는 이들과 모르는 것들과 모르는 미래 또는 과거를 상상하는 윤리적인 태도 같다는 마음이 든다.

 모르는 미래를 상상하는 일. 나는 엿볼 수 없는 미래 앞에서 무력해져서 오지도 않은 미래를 애도한다는 나약한 말을 썼는데, 박솔뫼 소설의 인물들은 조금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들은 지치지도 않고 자꾸만 다가올 수도 있는 미래와 다가올 수도 있었던 미래를 그린다. “먼 여러 곳에 가보고 싶”(40p)은 수미는 “여러 외국을 갈 것이”라고 머뭇거리지 않고 생각한다. “내년의 일도 가늠이 안 되는”(16p) 서술자는 기꺼이 몇십 년 뒤 최명환이 남길 회고록의 “녹취를 푸는 역할을 맡기로” 한다. 심지어는 신이 아닌 우리가 모든 미래를 알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 법한, 종교를 가진 이들을 두고 박솔뫼는 이렇게 쓴다.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미래를 연습하는 훈련을 거치겠다는 것과 아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그것은 미래를 누구보다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각오일 것이다.”(96p) 내가 손쓸 수 없도록 이미 정해져 있을지도 모를 미래를 상상하고 받아들인다니. 그것도 모자라 알지도 못하는 미래를 ‘연습’한다니? 도대체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걸까.

 비밀을 풀 만한 힌트가 더 있다. 뚜렷한 서사 구조가 없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소설을 견인하는 가장 중요한 축이 하나 있다면 단연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일 것이다. 82년 3월 18일, 다섯 명의 부산 고신대 학생들은 80년 5월 광주에서 자행된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물으며 부산 미문화원에 불을 지르고 유인물을 뿌렸다. 그 과정에서 건물 안에 있던 한 사람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고, 전두환 정권은 이를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조작했으나, 이들의 행동은 이후 일어날 반미운동의 효시이자 종교계 민주화운동의 촉발점이 되었다. 소설에서 ‘나’와 수미는 단 한 순간도 같은 공간에 있거나 서로를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겹치는 곳은 오로지 이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둘러싼 지점들이다. ‘나’는 현재는 부산 근대역사관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옛 미문화원 건물 주변을 산책하며 82년의 이야기와 사람들을 상상하거나 그 의미를 계속해서 되묻고, 해당 사건의 핵심 인물 김은숙과 같은 성당에 다니던 최명환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수미의 이모 윤미는 바로 그 사건에 가담해 수감되었다가 출소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시대를 경험한 자들에게 소설 독해를 위한 핵심 열쇠가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김녕은 박솔뫼의 소설을 구체적인 역사와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현장 없는 세대”[9]의 것으로 규정하는 이전의 세대론적 비평을 거절하고 “없는 경험과 의미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읽는다.[10] 박솔뫼는 사건에 참여했거나 그것을 목격한, 윤미와 최명환을 통해 경험하지 못한 시대의 일을 완결적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대신 이들 곁의 ‘나’와 수미를 매개로 그 주위를 맴돌 뿐이다. 그러므로 주목할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과거와 미래에 대한 현재의 감각이다. ‘나’는 “광주라는 사건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그 이후 시간의 의미를 묻고 답하였을”(91p) 그들을 짐작하며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 와야 할 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지금에서 그것을 지치지 않고 찾아내는 사람들”은 미래를 연습하며 그것을 이미 살아가고 있다고 느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예감도 기대도 없는 다음을 수용하며 시대를 견디는 것이 아니라, 와야 할 시대를 묻고 그것을 만들며 미래를 사는 방법. 그걸 알고 있던 이들을 떠올리면 미래를 연습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

 다시 김연덕과 두 평론가의 좌담으로 돌아가 본다. 아직 말하지 않은 작은 우연이 하나 더 있다. 좌담에서는 420년 전의 그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한 인물’, ‘이 사람’과 같은 모호한 지칭만을 드러냈지만, 나는 바로 알았다. 조르다노 브루노. 무한우주론을 외치다 교회로부터 화형당한 이탈리아의 철학자. 송도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등장하는 창작 뮤지컬 <최후진술>에 빠져 석 달 새 같은 작품을 열다섯 번 가까이 관람했는데, 작중에서 언급으로만 등장하는 브루노라는 인물에 매료되어 그의 책까지 빌려다 읽을 지경이었다. 교회의 처벌이 두려워 종교재판에서 거짓말한 작품 속 갈릴레이는 목숨을 바쳐가며 진리 앞에서 신념을 지킨 브루노에 대한 동경과 모종의 질투심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브루노의 용기나 강단보다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그가 내세운 무한우주론이 미래의 철학이자 미래의 과학이라는 지점이었다.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 아닐뿐더러 태양마저 무한한 우주의 작은 항성에 불과하다.’ 지동설 이상으로 도발적인 이 주장은 그야말로 미래를 산 자의 것이었다.

 “어떤 시간들은 뭉쳐지고 합해지고 늘어나고 누워 있고 미래는 꼭 다음에 일어날 것이 아니고 과거는 꼭 지난 시간은 아니”라던 『미래 산책 연습』 속 문장. “너무 많이 돌려본 미래는 과거보다 먼 과거”(「사랑이 아니라고 외치는 사람의 사랑이 언젠가 잃어버린 슬리퍼를 찾을 때」)라던 김연덕의 시 속 구절. 과거-현재-미래의 선형적 시간관을 전복하는 선구적인 관점은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피에르 바야르를 상기시킨다. 그는 과거의 작품을 후대에 도용하는 전통적 표절 개념을 파격적으로 비틀어 미래의 작품을 과거의 작가가 예상해 먼저 써 버렸다는 ‘예상 표절’[11] 개념을 제시하며, “다양한 층의 시간이 서로 만나고 얽히는 이중적인 연대기의 움직임 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상기함으로써 미래의 흔적에 우리는 민감해져야 한다”[12]고 주장한다. 과거를 계승할 뿐만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고 그것을 현재에 반영하면서 시간을 넘나드는 상호적 영향은 비단 바야르가 논하고자 했던 문학이나 예술의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에 말을 걸며 이 세계에서 자리를 찾아가는 공가능의 미학은 삶에서도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다.

 김연덕이 써온 「재와 사랑의 미래」 연작은 등단작부터 첫 시집 출간까지 계속되었다. 이 반복적인 연습은 여섯 편의 「재와 사랑의 미래」, 두 편의 「사랑의 미래」, 한 편씩의 「재의 미래」 그리고 「재와 사랑의 중추식 미래」라는 이름으로 시집에 실렸다. 박솔뫼의 『미래 산책 연습』은 주간 문학동네를 통해 연재된 열두 편의 이야기를 단행본으로 묶은 것이다. 박솔뫼는 연재를 시작하며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면 산책이고 앞으로의 오늘의 내일의 산책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산책이므로 느리고 반복되는 그런데 가끔 뛰어나가는 산책에 함께해주시기를”[13], 하고 미래까지 이어질 반복 한가운데로 독자를 초대했다. 그러고 보니 김연덕은 “산책은 선택하는 사람들의 것”(「웅크리기/껴안기」)이라고 썼는데. 김연덕과 박솔뫼가 이어온 정적인 속도감의 연습을 산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들이 그 과정에서 맞닥뜨리고 무게를 재었을 미래의 선택지들과 마침내 선택한 것들이 420년 전이나 1982년의 그들이 꾸었던 꿈처럼 미래를 만들고 살게 하는 무엇과 다르지 않겠다고 나는 느낀다.

 『재와 사랑의 미래』 말미에 실린 성동혁의 발문에는 이런 말들이 있다. “미래는, 스스로 정할 수 없는 것이어서 온 힘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게 전부일 때가 많죠. 실은, 최선을 다하지 않고도 슬플 때가 더 많죠. 그러나 연덕은 끝끝내 최선을 다하는 사람.”(226p) 김연덕은 “내년에서 주워 온/상처”(「재와 사랑의 미래」, 211p)를 견디며 “밀려오는 가능성에 맞서”(「재와 사랑의 미래」, 19p)서 “뭐라도 바꾸고 싶은 것처럼, 뭐라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손을 쥐었다 펼”친다고 쓴다. 김연덕이 “내가 만지는 것은, 내가 보고 내가 듣는 것은 어디쯤 멈춰 낡아 가고 있는 것일까 혹은 어디쯤에서 태어나고 있는 것일까”(「긴 초」) 하고 시간 한가운데의 자신을 숙고하듯 박솔뫼는 “원하는 미래를 그리고 손으로 만져보기 위해 어떤 시간을 반복해야 할까”(18p) 묻는다. 그 저변에는 미래를 “여러 번 반복하여 익히고 걸치고 입어버리면”(17p) “미래에 익숙해지고 미래를 손에 만져본 적이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마음이 있다. 나는 이런 자세들이 사랑의 미래를 만드는 것이자 곧 미래의 사랑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일본의 번역가이자 시인인 사이토 마리코는 『미래 산책 연습』 마지막에 실린 추천사에 그렇게 썼다. “현재란 단순히 지금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누군가가 줄기차게 계속하고 있는 연습의 시간인지도 모른다”(245p). 광주의 사건과 그다음의 시간을 끊임없이 물은 사람들. 고정된 지식을 의심하고 무한한 우주와 진리를 응시한 사람들. 미래의 빛을 보고 미래를 살았던 자들에 대해 쓰는 사람들. “새로운 세계를 스스로 믿고 살아내어 미래를 현재로 끌어당겨 반복하여왔을”(92p) 그들의 미래 연습을 생각한다. 신이 아닌 내가 선택할 수도, 꾸릴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커다란 세계를 손에 쥐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다만 이들이 꿈꾸었던 것은 어쩌면 찾아올 최선의 미래를 가능하게 만드는 일. 올 수도 오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와 와야 할 미래 오지 말아야 하는 미래를 가늠하고 선택하고 도래할 미래를 연습하는 일. “사라지는//향하는 미래”(「재와 사랑의 미래」, 98p)는 아주 멀면서도 가깝고, 우리의 연습과 선택에 의해 박탈될 미래와 발탁될 미래 사이에서, 김연덕의 말마따나 “가정해 보는 건 위험하지 않다”(「사냥 전에」).



✦✧✨✧✦

 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봄의 끝자락에 나는 여름 부산 방문을 계획하고 있었다. 박솔뫼 소설에서 자주 언급된 보수동과 코모도호텔, 근대역사관 같은 곳들을 직접 돌아보고 싶었는데 그런 미래는 오지 않았다. 잘 그려지지 않는 미래는 도래하지도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믿는 나는 부산에 있을 내가 잘 떠오르지 않자 미래 상상하기를 그냥 포기해버렸었다. 너무 기다려지는 미래 앞에서 늘 그렇게 굴었다. 덜 기대하면 덜 실망할 것 같아서. 지금 돌아보니 그것만큼 한심한 게 없다. 시간 속에서 미래를 살고 상상하고 만지고 연습하고 반복하고 만들었던 이들을 생각하면 나는 어쩌자고 금세 지금을 떠나 과거가 되리라는 이유로 현재를 너무 좋다고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했나, 실현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너무 구체적인 미래를 그리거나 기대하지 말자고 다짐했나… 그런 부끄러움만 밀려온다. 현재에 가만히 앉아서 다가오는 미래를 멀뚱멀뚱 기다리다가 그것이 다시 과거로 흘러가게 두는 것 말고 가져온 미래 끌어 당겨온 미래 기억으로 만든 미래를 사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2021년도 어김없이 지나가고 있다. 부산에는 못 갔지만 올여름에는 4주 동안 송도에서 시간을 보낼 기회가 있었다.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변해 있었는데도 시간이 지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여전했다. 올해는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을 하면서 가보지 않았던 곳곳을 부러 돌아다녔다. 잊지 않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는데, 대신에 눈앞의 광경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순간을 손에 쥐고 소중히 들여다보다 잘 보내주는 것의 의미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미래 산책 연습』의 수미가 클수록 흘러가는 모든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그것을 뚜렷하게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104p)었던 것처럼. 떠나기 싫다는 말은 또다시 입에 달고 살았지만 이번에는 떠날 미래보다 떠난 이후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리는 시간이 많았다. 남은 방학과 그 너머의 나날들을. 그렇게 원하는 미래를 상상하고 연습하면 나도 그 미래를 어느 순간 살고 있게 될까. 그런 연습을 반복하면 언젠가는 실제로 다가올 미래가 무엇이든 그걸 환영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미래 얘기를 하겠다고 했는데 어쩐지 과거 얘기만 실컷 늘어놓은 기분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과거이면서도 일종의 반복되는 현재이자 새로운 미래를 위한 연습 같은 것이기도 하다. 언제부턴가 시간을 생각하면 직선이나 원 대신 빙글빙글 돌아 올라가며 점점 커지는 나선형이 보였다. 그것은 다음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반복되고, 반복되는 동시에 새로 쌓이는 모양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미래를 기억이 되도록 살아가고 있을 때 어느 날 그것이 보인다면 그럼에도 그것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아니고 새로운 미래로 우리 앞에 벌어지는 일이 될 것이다.”(153p) 이 세계에 주어진 나의 미래들 우리의 미래들은 연습해서 살아낸 것일지도 처음 마주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앞으로 찾아올 그것이 무엇이든 다 괜찮을 것 같다. 내가 맞이하고 보내줄 매일은 아직 잔뜩 있으니까. 계속 연습할 테니까. 시간을 잇는 이 빛 속을 자주 걸으며 때로 달리며 그 미래들을 여러 번 그려볼 것이다. 그런 것은 정말로 좋다.[14]



편집위원 퓨 (rachopin329@naver.com)



[1] 생김새와 발음부터가 그렇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미래’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유의어들은 미안하지만 하나같이 못생겼다. 내세, 눈앞, 뒷날, 앞길, 앞일, 장래, 후년, 후세, 훗날… 요만큼도 신비롭거나 매력적이지 않은 말들 사이에서 ‘미래’ 혼자 빛을 내뿜고 있는 것 같다.

[2] 이은형, 「빛의 아케이드, 사랑의 산책자」, 『한국예술종합학교 매거진 K-Arts』, 2020.06, <http://art.karts.ac.kr/magazine/38/artists_4.html>

[3] 위와 같은 글

[4] 직접 세 보았는데, 『재와 사랑의 미래』에 실린 마흔 편이 넘는 시 가운데 ‘빛’이라는 단어 또는 빛 모양 기호가 들어가지 않은 시는 열 편이 안 된다.

[5]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계보를 이어 인간 이성에 주목하고 그 힘으로 신을 옹호하고자 했던 대륙합리론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6] 김연덕·조대한·최가은, 「인터뷰 가을(1) - 김연덕 시인」, 『SIRO』, 2020.08.11. <https://blog.naver.com/areviewsiro/222103966154>

[7] 모든 게 필연이라던 라이프니츠가 화를 낼까? 그렇다면 정정해 드립니다. ‘이 절묘한 우연으로 느껴지는 것’.

[8] 단, 라이프니츠는 이미 모든 것이 예정된 세계 속의 실체들이 상호작용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데에는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실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과 ‘단순히 그렇게 보이는 것’을 세세히 구분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을 생각이 없다.

[9] 김홍중, 「탈존주의(脫存主義)의 극장-박솔뫼 소설의 문학사회학」, 『문학동네』 2014년 여름, 100쪽.

[10] 김녕. 「산책하는 공동(空洞)」, 『오늘의 문예비평』 2018년 봄, 185쪽.

[11] 이 발칙한 주장은 말 그대로 많은 작품이 과거 작가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아 창작되듯 어떤 작가는 미래의 작품을 예상하고 그로부터 영감을 받아 현재의 창작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과거의 작가에게 영감을 준 ‘미래 유령’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작가의 뒤를 단순히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가가 올 것을 예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바야르는 주장한다.

[13] 박솔뫼, 「연재를 시작하며」, 『주간 문학동네』, 2020년 9월, <http://www.weeklymunhak.com/23/249/>

[14] 『미래 산책 연습』 작가의 말 마지막 문장을 빌렸다. 김연덕이 적은 시인의 말과 박솔뫼가 적은 작가의 말 모두 ‘좋다’는 표현으로 끝난다는 사실에서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다. 미래를 찾고 쓰고 사는 사람들은 ‘좋은 것’을 끊임없이 묻는 사람들이기도 하다는 것. 아무튼, 내가 빌려서라도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두 권의 책과 미래를 믿게 한 사람들 덕이다. 무언가가 좋다는 생각, 그걸 바탕으로 미래를 믿는 마음은 정말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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