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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5호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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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Oct 20. 2021

퀴어, 무당, काली

[헤엄치기] 편집위원 만타

“아는 분이 딸 점을 봤더니 ‘남자 운은 없는데 결혼은 하겠구만’ 이라고 해서 안심했었대. 근데 그분 따님이 지금 캐나다 가서 여자친구랑 결혼한다고 해서 집안이 뒤집어졌다나?”


인터넷에서 본 밈이 이토록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는 내가 ‘믿는 사람’이어서 일지 모른다. 번화가에 궁서체로 늘어선 ‘연애운’ ‘학업운’ ‘직업운’을 볼 때마다 심장이 뛰고, 골목길 한구석 붉은 글씨로 적 힌 ‘선녀 보살’ 간판 앞을 괜히 서성이게 된다.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내 주변에, 내 운명에 있을 거 라는 막연한 믿음. 나는 이 믿음이 기독교를 믿는 것과 MBTI를 믿는 것과 전자구름 모형을 믿는 것 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믿음은 모두 면밀하고 강력하게 이루어진 다. 사실 나는 지금도 인터넷 사이트에서 봤던 ‘포부는 좋으나 뒷심이 없다’는 사주풀이―게다가 이 풀이는 내 MBTI인 ENFP에 대한 설명과 아주 유사하다―를 위안 삼으며 015B 15호에서 가장 늦 게 마감을 치고 있다.



생각 하나

신촌 명물거리 어딘가에 있던 사주팔자 상담소를 찾았을 때였다. 나는 ‘성격이 여자 같지 않고 드세 서 연애하기 어려울 수 있겠다’는 풀이를 들었다. 정말 맞았다. 아무렴 나는 퀴어 페미니스트로서 남 자를 사귀기엔 좀 드세다고 할 수 있지. 오히려 그 반대인 풀이를 들었다면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난스러운 끄덕임 뒤로 사주에 ‘풀이’가 붙는다는 사실이 신경 쓰인다. 사주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풀어’낸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내 사주는 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연애하기 어려운 드센 여성’으로 풀이되는 걸까. 나는 성별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안고 사는데, 내가 여자가 아닌 다른 무 언가가 되기로 하는 순간 내 사주는 다르게 ‘풀어’지는 것인가? 삐딱한 궁금증을 안고 사주가 어떻게 정해지는지 찾는다.


‘우주의 모든 현상은 음과 양의 쌍으로 나타나며, 음과 양이 확장하고 수축하면서 金, 水, 木, 火, 土 의 다섯 가지 오행이 나타난다. 태어난 연월일시에 해당하는 간지에는 음양오행이 붙는데, 그 기운 에 따라 사주를 풀이한다.’[1]


우주의 흐름에 따른 쇠와 물과 나무와 불과 흙의 기운! 그중 나는 나무의 기운을 타고났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나무의 기운이 그 자체로 ‘여자 같지 않고’ 드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2] 나무의 기운이 시스젠더 헤테로일 것이라고도 믿지 않는다.



생각 둘

한번은 집에 가기 위해 지하철 고속터미널역을 지나고 있었다. 어떤 분이 나에게 다가와 길을 물었다. 생글생글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기도 잠시,그분은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한마디를 던지고 떠나갔다. “껍데기만 여자지 속에는 남자가 들었네.” 그분은 나에게서 어떤 영적인 남성-기운을 느낀 것이었을까? (당시 나는 긴 머리카락에 적당히 화장도 한, 여성으로 패싱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분은 이쪽 업계 종사자였을까? 여러 가지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분의 해석은 성별 이분법에 기대어 있었다.


‘사주풀이는 평등할 수 있는가. 영(靈)은 ‘퀴어’할 수 있는가.’


고민을 안고 살아가다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타투가 가득한 팔로 마방진을 그리고, 인도에서 브이로그를 찍고, 인스타그램에 만화 ‘무당일기’를 연재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퀴어 무당. 그가 쓴 세 권의 책을 통해 그가 자신의 삶에서 숨 쉬는 죽음을 어떻게 마주해왔는지 읽었다.[3]

삶을 부정하는 세상의 부조리를,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지워진 여성의 존재를, 글과 그림으로 풀어 내는 그를 보며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유튜브 채널에서 찾은 상담용 카카오톡 프로필엔 무지개가 쨍하게 떠 있었다. 채팅창을 열어 뭔가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영적인 것에 관심이 많은...”

“안녕하세요! 칼리 님 팬이에요!!...”

“우와~ 너무 떨리네요! 공일오비의 만타...”


여러 가지 버전을 고민하다 결국 담백한 채팅을 보냈다.


“연희관 공일오비에서 인터뷰 요청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어느 여름, 에어컨 바람이 닿지 않는 카페테라스에서 대화를 시작했다.


*인터뷰가 진행된 이후인 8월 말, 무당 홍칼리의 이야기가 담긴 신간 ‘신령님이 보고 계셔’ 가 출간 되었다. 인터뷰 이후 편집 과정에서 생긴 추가적인 질문은 이 책을 참고해 정리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신간에 적힌 내용 중 일부를 인터뷰에 인용했으며, 이 부분은 각주로 표시했다. ‘홍칼리’가 더 궁금하다면 ‘신령님이 보고 계셔’ 강력 추천. 아래 각주에 적힌 다른 세 권의 책도 강력 추천.




퀴어무당 홍칼리

 

만타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홍칼리  저는 스스로를 ‘퀴어 무당’이라고 소개하는 ‘홍칼리’입니다. 예술 작업도 하고 있어요. 그 림 그리고 글 쓰고 춤도 춥니다. 예술가랑 무당이 크게 다르지 않은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예술 작업을 하다가 어쩌다 무당이 되었습니다.


만타    준비해온 질문을 여쭤보기 전에 이것부터 여쭤봐야겠어요! 예술가랑 무당이 어떤 점에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시나요?


홍칼리  둘 다 영적으로 혼자하는 작업이 아니라는 점이요. 무당으로서는 신령님과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하고, 예술가도 마찬가지죠. 예술가는 영감이라고 불리는 어떤 에 너지 체를 이 세상의 언어로 번역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일하는 스타일도 비슷해요. 무당 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글 쓰고 춤추고 또 기도하고 점사 보러 오는 사람들한테 말로 상담도 하고 부적 그림도 그리고...... 이런 것들이 예술가들이 하는 작업이랑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무당이 다른 종교인들에 비해서 프리랜서적인 성향이 강해요. 신과 직통으로 통하고, 그걸로 손님들과 직거래하는 프리랜서 같은 느낌? 그래서 다른 종교에 비해서 좀 더 자유로운 것 같아요.


만타    그렇네요. 무당이 되기로 결정하신 건 언제인가요?

홍칼리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건 인도에서 ‘부토’라는 춤을 추면서 접신이 되었을 때였어요. 그전에도 ‘무당을 해야 하나’, ‘무당이 내 직업인가?’ 이런 고민은 조금씩 했었고요. 근데 그런 고민을 하기 전에는 제가 모태신앙이라 무당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오히려 무당을 미신을 믿는 사람이라고 낮잡아 생각했어요. 그런데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억울하게 죽은 존재들을 영적으로 애도하고 보내주는 퍼포먼스를 하게 됐어요. 그 퍼포먼스를 하면서 ‘그냥 이런 게 무당의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불현듯 하게 된 거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무당이 故 김금화 선생님인데, 그분이 세월호 추모 길거리 굿을 하 셨어요. 나중에 무당이 된 후에 그분의 삶의 궤적을 보게 되면서 ‘아 나도 그렇게 하게 된 거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만타    퍼포먼스가 삶으로 이어진 셈이네요. 인도에서 부토는[4] 어쩌다가 추게 된 거예요

홍칼리  제가 인도로 간 건 한국에선 길이 없다고 느껴져서였어요. 너무 살기가 어렵고 생활비도 많이 들어서 떠나게 된 거죠. 그렇게 인도에 갔는데, 어느 날 “몸을 움직여라” 이런 느낌 을 강하게 받았어요. 그래서 그래. 움직이자. 하면서 산책하러 나갔다가 일본 부토 스쿨 홍보포스터를 보고 들어가게 된 거예요. 거기서 공연을 하게 돼서 리허설을 하는데 도 중에 눈앞에 보이는 이 세상 바깥으로 제가 확 밀려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다 갑자기 여러 존재들이 저한테 들어와서 다른 목소리로 말하게 됐고, ‘내가 누구였는지 기억이 안’ 나고 ‘한 발짝만 더 걸어가면 내가 소멸한다고’ 느껴졌어요. 다행이었던 건 그 자리에 있던 한국 친구 중에 샤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통하는 분이 있었는데 절 보고 방울을 가져다준거예요.[5] 그걸 흔들자 ‘다시 돌아올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안개가 걷힌 것처럼 주변이 깨끗’해졌어요. 그러다 저한테 온 신령님의 이름들을 말하게 됐고요. 그날 이후에 지금 제 신 선생님이신 무당을 소개받아 한국으로 돌아왔고, 내림굿을 하고 무당이 되었습니다.[6]


한참을 방방 뛰다가 멈춰 섰을때, 할아버지가 내 입에서 나왔다. “야 이놈들아!” 나도 깜짝 놀랐다. “네가 너희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잖아! 언제까지 싸 울 거야, 이놈들아!” 한이 섞인 울분을 목청껏 외쳤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에 서 위아래로 방방 뛰었다. 그 할아버지는 큰 장군, 환웅님이었다. 그러다가 할 머니가 나왔다. 할머니도 같은 말로 호통을 폈다.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잖 아. 그만 싸우라고, 이놈들아!” 마고 할머니였다. 평소 내 목소리와는 다른 데 시벨이었다. 교실이 쩌렁쩌렁 울렸다. (...) 포도는 자신이 아는 한국에 있는 무당에게 연락해야겠다며, 그분에게 카카오 톡 영상통화를 걸었다. 핸드폰 화면 속에서 무당의 얼굴이 보였다. 무당의 뒤 로 이글거리는 호랑이도 보였다. 무당은 도깨비처럼 무서운 신의 얼굴을 하 고 있었다. 무당의 얼굴에 보였던 도깨비는 무당이 모시는 신령인 치우천왕 이었다. – 신령님이 보고계셔, 61p~63p


만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아요. 혹시 ‘이 길을 가도 되나?’ 하는 고민은 없으셨어요?


홍칼리  있었죠.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내가 미친 거 아닐까? 정신의학적인 치료가 필요한 상황 아닐까?’ 이런 고민이었고, 다른 하나는 ‘퇴마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었어요. 제가 어 머니 아버지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모태신앙에 집 안에 목사님도 계시거든요. 당시 에 할머니가 기도원에 계셨는데 그 기도원으로 들어가서 퇴마 의식을 하면서 지내야되는 건지 고민했어요. 또 제가 조울증을 오랫동안 앓기도 했거든요. 조울증을 앓고 있을 때 무당을 찾아갔더니 ‘조울증도 옛날에는 신병이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말이 또 혼란스러운 거죠. 조울증이 있는 사람은 모두 신병이 있는 건가. 하는 의구심? 현재는 정신의학적 이름을 붙이는 질병을 옛날에는 영적인 작용으로 해석했을 거 아니에요. 지금도 여전히 그런 해석이 가능하지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근데 퇴마를 받는 건 저 자신을 굉장히 부정하는 선택 같은 거예요.


악마로 표상되는 존재들은 뭔가 액체로 가득 차 있고 끈적끈적한 이미지로 그려져요. 사 회적으로 여자답지 않다고 여겨지는 모습, 특히 섹슈얼한 모습의 여성으로 표현되기도 하고요. 그런 이미지는 사회가 만들어낸 거라는 점에서 악마라는 존재 자체가 허구적이 라고 생각했어요. 동시에 그런 존재가 악마라면, 내가 악마이기도 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요. ‘퇴마라는 것이 정말 있기는 한 건가.’ 이런 의구심이 든 거죠. 사실 그래서 목사님도 찾아갔어요. ‘섬돌향린교회’ 라고 성별 이분법적인 해석을 하지 않는, 또 성 소수자를 위 한 교회가 있거든요. 거기 목사님을 찾아가서 고민 상담을 했어요. 목사님도 퇴마에 대해 서 조심스러워하시더라고요. 퇴마하러 가면, 타투 같은 것도 다 악마의 것이라고 해석할 가능성이 크고, 제 삶 전체를 부정하는 게 될 수도 있다고요. 그 조언을 듣고서 그냥 무당이 되기로 결정하게 됐어요.


만타    목사님 이야기를 듣고서 ‘내가 미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은 좀 해결이 되셨나요?

홍칼리  그건 신내림을 받고서도 한 1년 동안 계속됐어요. 제가 점을 보고 느끼는 것들, 행동하고 기도하면서 수행하는 생활이 ‘이게 사실 미쳐서 이러는 건 아닌가?’ 로 이어지더라고요. 근데 이제는 ‘내가 미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구나’라고 생각해요. 저에게 찾아오는 많은 영가들, 영혼들을 보면 옛날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해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감금당하고 이런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아, 그런 두려움이 영혼에 남아 있어서 그 렇게 고민했구나.’ 이렇게 이해하고 있어요.


만타    다행이네요. 그런 두려움 말고 다른 걱정은 없으셨어요?

홍칼리  음, 제가 한국 전통 무당과는 좀 다른 ‘짬뽕’ 무당의 결을 가지고 있어서 이게 사이비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어요. 한국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무당은 막 호통치듯이 말 하고 초능력적인 사람으로 그려지잖아요. 그게 부담스러운 거예요. 저한테도 그런 걸 기대하지 않을지 걱정됐어요. 저는 말투가 친절한 편이라 호통치는 것도 잘 못 하겠고, 무당의 이미지 자체가 저랑 너무 다른 거예요. 내가 무당이라는 캐릭터랑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인지 의구심이 생기면서 한국 무당들 보고 배워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어요. 근데 가끔 틴더 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한테 무당이라고 하면 ‘그렇게 안 생겼다’ ‘사연이 되게 많은가 보다’ ‘무당이 연애해도 되냐’ ‘신령님이랑만 섹스 해야하는 거 아니냐’ 별별 말을 다 듣거든요. 사람들한테 무당의 이미지가 딱 있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결국 전통은 전통일 뿐 내가 따를 필요도 없고, 그런 시각은 미디어 속에서 무당이 부풀려지고 대상화 되면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홍칼리의 유튜브 채널과 SNS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무당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낯선 언어와 이미 지가 가득하다. 형형색색의 만다라와7) 만트라부터8) 마방진과 타로카드, 점성술까지. 신령과 소통할 때 사용하는 신물 또한 여느 무당과 다르다. 보통의 무당이 방울, 부채, 쌀알 같은 것을 쓰는 것과는 달리 칼리는 ‘흐미’라는 몽골 샤머니즘에서 유래한 가창법을 사용하고, 요가 수업에서나 볼 법한 싱 잉볼을 울린다. 어느 하나의 종교나 문화로 홍칼리를 설명하기에는 그에게 너무 많은 것들이 ‘짬뽕’ 되어 있다. 그는 몇 년간 인도와 이집트, 페루를 떠돌며 만난 길 위의 샤먼들이 다양한 문화권의 의식과 신령을 소개해주었다고 말한다.


홍칼리    인도에 처음 갔던 건 2014년이요. 당시에는 진짜 너무 죽고 싶어서 갔던 거라 두려움은 없었어요. ‘죽고 싶다.’ 아니면 ‘한국을 벗어나고 싶다.’ 두 가지 마음이 있었는데, 인도가 한국보다는 더 자유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인도로 가기로 결정했어요. 어떻게든 되겠 지 이런 마음으로 30만 원 정도만 챙겨가서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는 사원을 떠돌거나 카 우치 서핑을 하면서 지냈어요. (...) 가기 전에 막연하게 ‘예술 작업을 하는 종교인이 되고 싶다.’ 이런 마음은 있었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믿을 수 있는 힘을 키우고 싶어서. 이 전에 한국에서 스님이 되고 싶어서 절에 찾아갔던 적도 있는데 타투 때문에 거절당했거든요.


스님이 될 뻔했던 모태신앙 홍칼리는, 죽음 대신 떠난 인도에서 자신에게 힌두교 신의 이름을 붙였다. 죽음과 파괴의 여신, काली (Kālī).


풀이, 투쟁


만타    몇 해 전에 쓰셨던 칼럼에서 ‘운명학은 풀이 투쟁이다’라고 하셨더라고요. 좀 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홍칼리  사주명리도 그렇고 주역도 그렇고 무당들이 신령이랑 소통할 때도 그렇고 다 기호로 소통을 하거든요. 보통 점은 기호로 보는데 그 기호를 해석해서 이 세상의 언어로 번역해서 전달하는 게 운명학자의 몫이잖아요. 근데 그걸 전달하는 과정에서 기존 언어 중에 적절한 게 없다 보니까 기존에 많이 쓰던 편견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새로운 언어를 계속 만들어야 해요. 다른 의미를 계속 발견하는 부지런함이 없으면 운명학을 하는 사람은 되게 위험한 일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을 편견에 가두게 되니까. 예를 들면 옛날에 여성이 ‘관’이 너무 강하게 있으면 ‘팔자가 사납고 이혼을 해 남자가 여러 명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했어요. 근데 지금은 다르죠. 또 달라야 하고요. 그런 걸 알고 있어야 무책임하게 편견으로 해석하지 않는 거죠.


만타    지금까지 써오신 글이랑 연결되는 것 같아요. 책을 세 권이나 내셨어요. ‘세상은 내가 이 상하다고 한다’ ‘붉은 선’ ‘엄마는 인도에서 아난다라고 불렸다’ 칼리님 글은 스스로 깊이 들여다보고 고민하면서 쓴 것 같아서 좋았어요. 칼리님이 글을 왜 쓰게 됐는지 궁금해요.

홍칼리    제가 처음으로 쓴 책은 ‘붉은선’인데, 제 성(性)의 역사를, 그러니까 제 삶에서 느꼈던 여성의섹슈얼리티에 대해서 썼어요. 그때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안 쓰면 내가 죽을 것 같고 이거를 써야 화가 풀릴 거 같아서 쓰기 시작했어요. 그 전에는 일기를 꾸준히 썼는데, 내가 상상하고 순간 순간 느끼는 그런 직감들을 놓치지 않고 그걸 딱 찾아내서 글로 적어놓는 게 좋았어요. 저는 계속 글을 쓰고 싶은데, 제가 위치한 이 자리에서 보고 느끼는 풍경들을 쓰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랑 연대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아요. 진짜 열 받아서. 이 자리에서는 이런 부조리가 있다. 이렇게 편견을 부수고 싶어서.


풀이 투쟁은 그가 ‘무당’ 홍칼리일 때뿐만 아니라 ‘작가’일 때에도, 일상을 영위하는 사소한 순간에도 계속된다. 그는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에서 처음으로 글을 썼던 순간을 회상한다.


엄마가 없던 날, 방 안에서 엄마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작은 스프링노트에 새겨진 매일의 날씨, 집 안 사물, 음식에 대한 메모, 커튼 색깔과 할머니, 언니와 아빠에 관한 고민, 자신감이 부족한 나에게 어떤 말을 해주면 좋을지 생 각한 흔적, 평범한 식탁 위에서 오간 대화, 거기서 느낀 감응을 써 내려간 글 이 담겨 있었다. 엄마의 일기를 훔쳐보는 게 미안했지만, 글씨가 재밌어서 자꾸 보게 됐다. (...)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보면서 엄마도 엄마이기 전에 ‘나’라는 걸 낯설게 느꼈다. 엄마도 나처럼 매일 달라지는 ‘나’구나. (...) 엄마의 외박이 잦아지고, 술을 마시는 날이 늘어갔다. 아빠는 엄마에게 “알코올 중독자, 더러운 년”이라고 밤마다 욕설을 내뱉었다. 열세 살 때 엄마와 아 빠는 정식으로 헤어졌다. 얼마 후 고모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 둘러앉아 말했 다. “그렇게 생기지 않았는데, 그런 여자인 줄 몰랐네” 흔한 바람난 여자, 문란한 여자 서사로 엄마가 읽히고 있었다. 엄마의 몽롱한 글씨체와 섬세한 시선, 그 시선이 마주쳤을 아빠의 폭력과 두 사람 사이의 맥락을 알지 못하는 사 람들은 그저 튀어나온 송곳처럼 엄마의 자리를 벗어난 엄마가 그런 여자라고 해석하고 있었다. (...)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연필을 쥐고 종이를 누르며 버려진 기억의 조각을 기 록하게 된 것은. 쓰는 것밖에, 흰색 종이에 연필로 꾹꾹 눌러쓰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곳이 아니면 내가 기억하는 엄마와 내가 기억하는 내가 해석되지 않을 공간이 없다. -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 155p~156p


십 대의 홍칼리는 엄마를 향하는 여성혐오 뒤편에서 엄마의 언어를 발견한다. 책장에 꽂힌 엄마의 일기장에서 ‘가벼운 년’도 ‘못된 년’도 아닌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존재’가 바라보는 세상을 읽은 것 이다. 그는 그때부터 글을 적어 나가기 시작한다. 세상이 외면한 엄마의 언어를, 나의 언어를 찾기 위해서.


한편 ‘붉은 선’에서 홍칼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의 섹슈얼리티의 역사를 씀으로써 성(性)의 영역에서 남성에게 빼앗겼던 여성-홍칼리를 되찾는다. 그는 지금껏 남성의 시선으로 해석되어온 섹스, 오르가즘, 자위, 성노동, 임신중절을 자신의 언어로 써낸다. 여성의 ‘내밀한’ 9) 경험을 쥐고서, 허 울 좋은 남성성이 숨기고 있는 폭력과 기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의 글은 남성중심주의에 조금씩 균열을 만들어내어 여성의 이야기를 불러들인다. 홍칼리의 글을 읽는 우리는, 그의 경험이 그만의 것이 아님을 안다.


이는 무당이 신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해석할 때의 투쟁과 다르지 않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 의 운명은 남성의 언어로 풀이되어 왔으며 소수자의 존재는 권력의 입맛대로 규정되어 왔다. 이제는 그 풀이를 뒤집을 차례이다. 홍칼리는 무속을 통해, 글을 통해 끊임없이 풀이의 전복을 시도한다. 그가 창조하는 새로운 풀이는 또 다른 이에게로 확장한다.


“글을 쓰면서 열다섯의 나로 돌아갔다. 이틀 동안 열다섯의 나와 대면하면서 냉기와 통증이 올라왔다. 글을 쓰다가 무기력해져서 여러 번 잠이 들었다. 기 근, 전쟁과 살인 당한 여성에 관한 꿈을 꿨다. 12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전처 럼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여전히 실수를 하고, 고통받고, 욕망하며 살고 있 다. 나는 아직도 열다섯의 나를 모른다. 누구도 그녀를 알 수 없다. 사실 누구나 그렇다. 지금 열다섯의 누군가는 여전히 수치심에 떨고 있겠지. 그녀에게 닿기 위해 글을 쓴다.” - 붉은 선, 31p


만타    SNS에 올리시는 무당 일기에서 비거니즘 관련해서 얘기하신 것도 인상 깊었어요. 재물을 바친 사람은 다른 존재에게 배로 베풀어야 온전히 복을 받는데, 다른 동물의 죽음을 가지 고 하는 굿이 과연 얼마나 복을 가져올 수 있겠냐 이런 얘기 하셨잖아요. 비거니즘을 어 떻게 시작하셨는지. 또 이런 비거니즘을 바탕에 둔 굿을 해본 적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홍칼리  비건 굿은 꼭 해보고 싶어요. 옛날에 6년 전인가 살처분된 닭이랑 오리들을 위한 위령제를 했어요. 잡식 가족의 딜레마 만드신 황윤수 감독님이랑 활동가들 여럿이 같이 했었는데, 거기서 인간에 의해 죽은 존재들을 위해서 애도문을 외우는 퍼포먼스를 했었어요. 지 금 생각해 보면 그게 굿이었던 것 같아요. 비거니즘은 제가 원래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전 까지는 별로 생각을 안 했던 주제였어요.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내가 되게 모르고 있었 구나. 이렇게 소외되고 차별받는 위치에 나도 서 있었는데 그걸 자각하지 못했구나’ 하면 서 더 시야가 넓어진 거죠.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나, 여성으로서의 나와 비슷한 차별을 받고 있는 존재들에게 눈이 가면서 동물권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요즘엔 기후 위기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는데 만물들 사물들 자연에 대해서 더 폭넓게 공감하게 됐어요.


만타    기후 위기는 무속하고 어떤 식으로 연결될 수 있나요?

홍칼리  만물에는 다 정령이 있잖아요. 무당이 모시는 신령들 중에서 자연신들이 있어요. 산신이 나 이런 자연신들은 진짜 누가 더. 크고 누가 더 높고 낮고 이런 거 없이 강하거든요. 그 런데 그런 신이기도 하고 정령이기도 한 존재들이 가장 뒤에 있잖아요. 제가 페미니즘으 로 시작해서 이렇게 동물권 기후 위기 환경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처럼요. 제일 말이 없는 존재들이니까 때려서 아프다고 안 하니까 여기에는 혼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잖아 요. 근데 사실 만물에는 혼이 깃들어 있어서 그 존재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감사하지 않는 마음으로 대하면 당연히 업보가 돌아올 수밖에 없는 거죠. 우린 다 연결돼 있으니까. 나 를 때린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코로나 바이러스도 그렇고 기후 위기도 그렇고 다 동 물들을, 이웃들을, 땅을 함부로 대했기 때문에 당연히 돌아올 수밖에 없는, 원인이 분명 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무당에게도 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그 정령들의 한을 풀어야 한다’라는 과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다른 시민들과 마찬가지로요.

- 비거니즘 무당일기 27~28화, 홍칼리 인스타그램




‘퀴어’ 무당


만타     앞서 본인을 퀴어 무당이라고 소개하셨는데, 무당 앞에 ‘퀴어’를 붙인 이유가 있을까요?

홍칼리  사실 모든 무당은 퀴어예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무당의 몸에는 애기 신령도 오고 동자도 오고 할아버지 있고 할머니도 있고 그러잖아요. 장군도 있고 선녀도 있고. 여성성과 거리가 먼 무당도 선녀가 오면 완전 여자처럼 행동하거든요. 무당은 모두 퀴어이기에 ‘퀴어 무당’이라는 말이 되게 무색한 말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그런데도 퀴어 라고 굳이 이름 붙인 건 ‘연대하고 싶어서’가 컸어요.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 ‘나는 빻은 해석을 하지 않겠다. 혹시 너무 죽고 싶을 만큼 힘들면 죽기 전에 나를 찾아와 달라’ 이런 말을 전하는 마음으로 퀴어 무당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됐어요.


만타    저는 퀴어함이라는 것 자체도 뭔가 ‘영적인 것’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머릿속에서 정리가 잘 안돼요. 퀴어 그 자체도 그렇고 아니면 드랙 쇼 같은 것들을 보면 뭔가 존재 하지 않는, 않는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드러내고 표현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무당과 퀴어 의 겹치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홍칼리  아까 얘기한 것처럼 악마 이런 존재들을 규정한 이미지들을 살펴보면 여성으로서의 상징 만이 아니라 호모포빅한 그런 시선에서 보는 것들도 많은 것 같아요. 제가 되게 많은 종교를 고민했었는데, 그러다 무당을 선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선과 악의 구별이 뚜렷이 없어서였어요. 저는 기독교식으로 악마가 있어서 악마를 퇴치해야 한다! 이런 태도 자체가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우선 무속 신앙은 다신교고, 샤머니즘에서는 특이하고 이상해 보이고 기존의 정상적인 규범에 맞지 않는 존재를 봤을때 그 존재가 그냥 마귀라고 치부해 버리고 격리하는 게 아니라 이 존재에게 숨겨진 신령의 이름을 찾아주고 이 신령을 또 모시는 태도가 좋았어요. 이건 제 생각인데, 옛날 무당들은 퀴어도 되게 많았을 것 같아요.


만타    옛날부터 이어져 왔기에 보수적이라고 생각되기 쉬운 샤머니즘이 오히려 억압에 맞서고 자유를 찾는 역할을 할 수 있군요. 샤머니즘을 접하면서 그런 자유를 얻은 것 같으세요?

홍칼리  네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인도에 갔던 이유 중의 하나가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였거든 요. 한국에서 여러 일을 겪으면서 죽고 싶었는데, 여기서 죽지 말고 조금만 더 다른 나라 도 구경해 보고 죽자 이런 마음이었어요. 가기 전에 ‘진짜 나 혼자 기도만 하는 걸로 이 세상이 고통스럽고 억울한 일들이 사라질 수 있나.’ 이런 질문도 계속했던 것 같아요. 그 러고 인도에 가서 느꼈던 건... 진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게 다 꿈 속의 일이기도 하 고 그러니까 여기서 각자 겪게 되는 어떤 아픔과 이야기들은 나름의 의미가 있고 하나도 하찮은 게 없다는 것. 그래서 내가 느끼는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타인에게 표 현하고, 표현을 들은 누군가가 또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런 메아리를 만들어내는 것 이 중요한 거라고 느꼈어요. 그러면서 기도. 기도를 더 할 수 있게 됐던 것 같아요.


만타     듣기만 해도 힘이 되는데요! 그럼 한국에는 어떻게 돌아오시게 된 거예요?

홍칼리  작년 6월에 페루에 있을 때 한이 많은 여성들이 계속 보였어요. 어린아이도 있었고, 할머니도 있었고... 거리를 지나가는 남자들에게 당했던 여자들이 계속 보이고 그들에게 빙의가 되기도 했어요. 맨발로 빈민가를 막 떠도는데 그러다가 한국의 마고 할머니라고 창조신 같은 분이 저한테 오신 거예요. 마고 할머니한테 접신이 된 채로 사람들한테 막 뭐라고 얘기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경찰에 붙잡혀서 유치장에 들어가게 됐고, 그러다가 정신병원까지 갔었어요. 거기서 하루 있었는데 조현병을 진단받았어요. ‘무당의 접신 상태가 조현병이랑 비슷하게 읽히는구나’ 이렇게 생각이 들기도 하고 조현병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영적인 부분이 있을 수 있겠다고 느끼기도 했고요. 정신병원에 있다가 가족들한테 연락이 됐는데, 그 과정에서 태극기라던가 한국을 상징하는 것들이 많이 보이고 한국의 신령들이 많이 오더라고요. 이런 것들이 이제 한국에서 지내라는 뜻으로 느껴져서 들어오게 됐어요.


홍칼리는 연대하는 마음으로 무당 앞에 ‘퀴어’를 붙였다. 사실 무속은 원래 그런거였다. 과거 여성들 의 발언권이 지금보다 더 약했던 시절, 여성의 언어가 유일하게 울려 퍼진 곳은 굿판이었다. 한국에 서 무교를10) 연구한 미국의 인류학자 ‘로랄 켄들’은 1970년대에 한국에 방문해 굿판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유교 문화로 인해 여성이 억압받는 줄로만 알았던 한국에서, 남성은 거의 없이 여성주도로 의례가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11) 조선조에서 무교는 소수자를 억압하던 금기를 풀어주는 몇 안되는 해방의 공간이었다. 여성, 아이, 광인을 비롯한 약자들은 신령의 자리를 빌려 굿판 위에서 목소리를 냈다. 과거의 무속이 그래왔다면 현재 또한 그래야 할 터. 홍칼리는 그 정신을 놓지 않는다. 그의 이름 앞에 붙는 ‘퀴어’는 정상성을 비집고 약자가 설 자리를 마련한다. 홍칼리는 그자리에서 퍼져나가는 이야기들이 메아리가 되어 또 다른 이야기를 불러낼 것임을 안다.




여기는, 굿판


만타    이제 슬슬 마무리 질문을 해볼까 합니다. 무당 일을 하면서 어떨 때 보람을 느끼세요?

홍칼리  제가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들 인데, 제 일이 믿음의 힘으로 하는 일이잖아요. 기도를 간절히 해서 뭔가 빌어 주기도 하고, 기도하는 힘으로 점사를 보기도 하고요. 제가 무당이 아닐 때는 그 사람이 스스로 긍정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이렇게 막 얘기를 해주는 것들이 그냥 흘러가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하면 그게 권위를 얻게 되는 게 있어요. 그 믿음의 힘으로 스스로 긍정하게 되는 손님들 만날 때 되게 보람을 느껴요. 요즘에 계속 고민하는 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사람이 폭력적으로 변하기 쉽잖아요. 어떻게 하면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서도 그걸 표현하고 사람들과 소통할 때 폭력적이지 않을 수 있을지. 이런 걸 고민하고 있어요. 되게 추상적이죠? (웃음) 그리고 무당이 돼서 좋은 점이라면 제가 했던 작업들 막 그림 그리고 글쓰고 이런 일들을 같이 할 수 있고, 오히려 기도하면서 명상하면서 영감을 얻게 되는 것들을 또 표현할 수 있고 이래서 ‘무당이라는 직업 좋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타    지금까지는 예술가이기도 하고 무속인이기도 했잖아요. 앞으로는 어떤 모습이고 싶은지 궁금해요.

홍칼리  앞으로 제가 또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진짜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다 뜻과 때에 맡기고 있거든요. 그래서 당분간은 계속 무당으로 살고 싶고 할머니가 될 때까지 계속 무당으로 살 고 싶은 마음이기는 한데, 이것저것 집착하지는 않으려고요. 그냥 어떤 일을 할 때가 되 면 그 일을 하게 되겠죠.아! 하나 하고 싶은 건, 해외에서 샤먼 의식을 하는 모습을 보면, 사이키델릭이라고 환각 약초를 사용해서 접신을 하고 사람들을 치유해 주는 그런 의식들이 있어요. 한국에서는 그런 약초들이 다 불법이라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게 되게 제한적이잖아요. 그래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언젠가 사이키델릭과 샤머니즘을 연결하는 글을 쓰고 싶어요.


만타    기대되는데요!

홍칼리  왜 이렇게 금기, 불법 이런 거에 끌리는지 모르겠어. (웃음)


홍칼리는 무속을 통해, 글을 통해, 그림을 통해, 퍼포먼스를 통해 삶과 죽음을 더 나은 방식으로 풀어낸다. 이는 더 안전하고 다양한 삶을 원하는 우리가, 자신과 서로의 삶을 돌보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붉은 선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구도 이름에 갇히지 않고 스스로를 무엇으로 규정짓지 않아도 되는 오늘을 나부터 살아낼 수 있다. 금기가 된 내 몸의 이야기를 발화해서 모든 낙인의 울타리를 부수고 싶다. 낙인에 갇힌 내 몸이 해방 되는 것 부터다.’[12] 여기서 그가 스스로 붙인 이름을 다시 떠올린다. 죽음과 파괴의 여신, 칼리.


홍칼리는 ‘붉은 선’을 다음과 같은 말로 맺는다. “나와 당신의 몸처럼 흐물흐물한 세상을 꿈꾸며”[13]


인터뷰가 끝난 후, 작은 사례와 함께 쪽지를 건넸다. “칼리님의 존재가 미래를 기대하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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