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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5호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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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Oct 18. 2021

We Love Boy's Love!

[헤엄치기] 편집위원 물결, 빙봉

0. 들어가며: 비엘과 알페스를 읽는 우리들     


여기, 남자들의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전혀 성애적이지 않은 관계에서도 성애적 텐션을 뽑아내는 재능이 있으며,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들을 동성애자로 지독하게 엮어버리는 데에 밝다. 그렇다. 이들은 BL(Boy’s Love)과 RPS(Real Person Slash)를 읽고 쓴다.     


이들의 문화는 “남성 동성애를 일정한 공식으로 향유한다는 유사성만 있을 뿐 사실 복잡한 층위를 갖는 문화‘들’을 이룬다.”[1] 가령 남성 간의 동성애적 관계를 다룬 작품들을 이르는 말인 비엘은, 기존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들 간의 호모소셜(homo-social)한 관계를 호모 섹슈얼(homo-sexual) 로맨스로 패러디하는 야오이(やおい)에서 직접적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오늘날 비엘은 2차 창작과는 구별되는 상업 출판물들을 주로 가리킨다. 팬픽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할 알페스는, 실존 인물들 간의 동성애적 관계를 묘사하는 작품들을 의미한다. 이는 아이돌 문화와 더 깊게 관련한다.     


비엘/알페스는 대중문화의 여러 영역에서 여성/퀴어들이 전용(?)으로 누려온 하위문화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들은 리부트 이후 페미니즘과의 만남 속에서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일련의 논쟁 속에서 비엘/알페스는 여성을 삭제하는 장르로 규탄받거나, 반대로 여성/퀴어 하위문화가 지닌 페미니즘적 상상력의 사례로 지지받는다. 한편 최근 알페스는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점점 눈 뜨고 보기 힘든 수준으로 치닫고 있는 한국 사회의 반(反) 페미니즘 흐름 속에서 알페스는 성 착취적인 장르로 공적인 장에 소환되었으며, 알페스와 관련한 사람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국민 청원이 22만 명의 서명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 이유와 맥락은 천차만별이지만, 어쨌건 이 문화가 그간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받지 못했던 스포트라이트 세례를 받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 좌담에서는 여성/퀴어이자 열렬한 비엘/알페스 독자인 빙봉과 물결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비엘/알페스를 읽고 쓰는 일에 담긴 애정과 즐거움, 고민과 어려움에 관해 얘기해보았다. 종종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트위터에서 보고 깔깔대며 웃었던 걸 트위터 안 하는 친구들에게 보여줬더니, 아무도 안 웃고 있는 그런 상황. 이 기획은 현재 비엘/알페스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논쟁이 정확히 그런 상황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우리는 왜 (하필) 남자들의 사랑에 울고 웃는가. 이 질문에 답하면서 우리는 여성/퀴어 문화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 점점 힘을 얻고 있는 백래쉬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지금의 상황을 풀어나갈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



1. 우리들의 비엘/알페스 이야기      


물결: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가 이 좌담을 기획하게 된 이유나 목적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고 넘어가면 좋을 것 같아.     


빙봉:이 좌담의 목적? 글쎄… 일단 비엘이나 알페스가 논의되는 방식에 있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대화는 전혀 보도되거나 기록되지 않고, 외부에서 이게 “여성들의 욕구 실현이다.” 아니면 “이건 (아이돌에 대한) 성 착취다.” 이렇게 규정하고 있는 게 조금 갑갑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실제로 이 문화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 말하고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명확한 해답은 나오지 않아도 그 딜레마를 기록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물결: 덧붙인다면, 비엘과 알페스가 리부트 이후의 페미니즘과 만나면서 여성 혐오적인 장르로 지탄받거나 아니면은 오히려 반대로 여성이나 퀴어가 지니는 하위 문화적 상상력으로 지지를 받고 있잖아. 그런 복잡한 지점들에 대해서도 같이 얘기해보면 좋을 것 같아. 그러면은 이제…. (웃음) 빙봉부터 자신의 비엘과 알페스 역사를 설명해보자.      


빙봉: 나에게는 일단 비엘이랑 알페스 자체가 되게 익숙한 문화였어. 내 세대는 초등학교 한 6학년부터 중학생 때 전반적으로 인터넷 소설에 잠식된 세대였고, 그래서인지 txt 파일을 전자사전에 넣어서 남의 로맨스를 지켜보는 경험이 나한테 익숙한 일이었단 말이야. 그래서 아이돌을 좋아하자마자 알페스를 하는 게 나에게 있어서 너무 당연한 일이었지. 그러니까 막 ‘왜’에 대한 생각 없이 그냥 ‘아, 이런 문화가 있고 너무 재밌네?’ 해서 시작했던 것 같고…. 그런데 그와 별개로 비엘에는 커다란 재미를 못 느꼈어. 친구가 추천해줘서 몇 개 읽어보긴 했는데, 나는 알페스가 어쨌든 친밀한 두 상대의 로맨스를 상상하는 데서 재미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데 비엘은 난생처음 보는 사람 둘의 사랑 이야기잖아. 내가 알페스에서 느꼈던 재미나 즐거움 같은 게 사라진 것 같달까?      


물결: 그러면 알페스를 언제(부터 한거야?)… 기억도 안 날 때부터 한 거야?     


빙봉: 내 첫 아이돌이 인피니트였거든?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건 인피니트를 파는(덕질하는) 그 날부터였어. 입덕하는 날부터 알페스를 시작했던 것 같아.     


물결: 헐, 나도 그랬어. 나는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중학교를 다녔는데, 그때가 딱 엑소가 으르렁으로 뜨고 활동을 막 이어가던 시절이었단 말이야. 어느 날 청소 시간에 친구랑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는데 친구가 요즘 엑소 덕질을 시작했다고 하는 거야. 그러고 이 팬픽이 진짜 명작이라면서 추천해줬어. <순정주의>라는… 막 엄청 유명하지 않은데 그게 명작이라면서 보여주는 거야. 근데 진짜… (말을 잇지 못함) (빙봉: 아, 진짜?(폭소)) ‘아 진짜 너무 재밌다.’ 재밌다길래 그냥 봤는데 감동의 박수. 그렇게 알페스로 덕질을 시작했어.      

그러면 빙봉의 학창 시절 최애 작품은 뭐야?     


빙봉: 난 최애 작품이 너무 많긴 한데, 그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나는 좋아 해왔던 게 진짜 다 명확해. 일단 나는 감정의 전이가 빠르고 둘이 와다다다 얘기하는 걸 되게 좋아해. 싸우는 장면 나오는 팬픽도 좋아하고. 특이한 건, 난 진짜 재회물에 미친 사람이란 말이야. 나는 재회물이 가지는 이 특성. 그러니까 둘이 서로를 너무나 잘 아는데 서로가 서로한테 아는 척을 못 해. 왜냐? 구남친에 대해서 구구절절 아는 척하긴 쪽팔리니까. 서로가 속으로는 ‘진짜 하나도 바뀌지 않았네’라고 생각하지만! 아는 척은 못 하고, 서로 모른 척하고. 그래서 나는 그런 거 보면 ‘진짜 딱 어떻게 해!’ (이런 마음이 드는 거지.) 가슴이 막 미어지고. 너무 좋아.     

내가 소장본도 가지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둘이 대학 때 연애를 했는데. 헤어져서 (한 십 년이 지나고) 이웃으로 만난 거야. 그래서 마주칠 때마다 매일같이 신경전을 벌이다가 다시 사귀는 그런 내용이었어. 나는 진짜 일상물을 좋아해. 장르물, 아포칼립스물 이런 거 잘 못 보고.      


물결: 나는 엄청 많이 보긴 했는데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거는 아까 말했던 그 입덕작. <순정주의>라는 작품인데. 이게 엑소 후회물 팬픽 중의 바이블이거든. 이게 재벌공 가난수야. 학창 시절부터 시작하는데, 공은 학교에서 누구도 건들지 못하는 회장님댁 아들에 여자 친구가 매일 바뀌는 일진이고, 수는 범생이…. 문제는 이 둘이 배다른 형제 사이야. 수가 공의 아버지가 낳은 사생아. 그런데 공이 이 사실을 알고 배알이 꼴려서 수를 미친 듯이 굴려. 그렇지만 수는 공을 너무 사랑해서 공 옆에서 온갖 시련과 수모를 겪다가 결국 못 이긴 수가 떠나려고 하자 공이 사랑을 깨닫고 붙잡는 클리셰 중 클리셰, 막장 드라마 중 막장 드라마.     

그런데 이게 수의 지조와 절개를 통해서 공이 그 수를 향한 사랑을 다시 확인하는 스토리란 말이야. 그니까 공이 수랑 (섹스)할 때마다 돈을 줬었는데 수는 그거를 안 쓰고 계속 모아놨었던 거야. 공을 자기 인생에서 마침내 끊어내기로 결심한 날에 그 돈을 다 돌려줘. 여기서 공이 당황하는 거지. 난 얘랑 편리한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얜 나를 진심으로 좋아해 줬구나, 우리 엄마-공의 엄마는 아들을 재산 상속 도구로만 생각해왔다-도 나를 이렇게 좋아해 주진 않았는데, 이러는…. 그렇게 수의 사랑을 확인한 공이 갑자기 수한테 잘해주는 멜로 드라마야.     


빙봉: 와, 딱 그 시대에 쓰일 법한 글이다. 최근에는 진짜 그런 거 못 본 것 같아.      


물결: 공수 관계에서 성적, 경제적 권력 차이가 두드러지는 게 팬픽의 고전적인 문법을 완전 그대로 따르고 있지. 내가 이 팬픽을 좋아했던 것도 그런 고전적인 문법에 충실해서 좋아한 게 아닌가 싶네. 확실히 비엘과 팬픽은 장르의 문법을 충실하게 따르거나 변주하는 데서 오는 재미가 큰데, 빙봉이 가장 즐겨보는 설정은 뭐야?     


빙봉: 나는 최애른[2]을 하니까 른에 대한 묘사가 생각보다 중요해. 고분고분하고 하라는 대로 다 하고 이런 수 보면 속 다 터지고. 그래서 있는 대로 성질내고 관계를 휘어잡는 수를 좋아하지. 흔히 말하는 까칠수?     


물결: 나는 둘 중 한 명 혹은 둘 다 헤테로인 설정이 좋아. 그러니까 그런 서사. ‘너를 만나기 전에는 헤테로인 줄 알았는데 널 만나니까 아닌 것 같아.’ 그런데 완벽히 게이는 아니고…. (빙봉: 맞아 맞아!!!) ‘그냥 너라서 좋아’라는 그 순애보적인 사랑의 서사.     


빙봉: 맞아, 그러니까 이 둘이 꼭 맞는. 그러니까 이 둘이야. 서로가 아니면 약간 사랑을 할 수 없는.      


물결: 필연적인 운명의 조합. 그게 재미있는 것 같아. 내 개인적인 경험이랑도 사실 맞닿아 있는 것 같은 게 항상 호모 소셜에서 게이들이 맨날 헤테로를 짝사랑했다가 알고 보니 헤테로라서 갑자기 (짝사랑 상대에게) 여자 친구가 생기고 이런 일들이 많고, 그런 일들을 게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니까 그런 서사를 더 많이 찾아보게 되는 것도 있는 거 같아. 그리고 나는 청게[3]를 진짜 좋아해.      


빙봉: 진짜? 나는 캠게[4]를 진짜 좋아하는데. 이게 항상 청게가 좋냐 캠게가 좋냐, 알페서들끼리 싸우잖아. (웃음) 왜? 너는 청게가 왜 좋아?     


물결: 이것도 내 학창시절 기억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알페스가 자기 욕망의 투영이라는 말에 공감하는 게, 나는 자주 얼굴을 마주치는 사람이 아니면 사람들한테 애착 투자를 진짜 못하거든. 그런데 학창 시절에는 좋든 싫든 맨날 만나야 하는 게 있잖아. 거기서 느낄 수 있는 감정적 텐션 이런 거에… (끌리는 것 같아.)     


빙봉: 그렇지. 내가 최근에 친구랑 캠게 vs. 청게 얘기를 했는데 걔도 청게가 좋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왜 청게가 좋냐고 물었더니 걔도 자기가 고등학교 때 했던 연애가 더 풋풋하고 기억에 남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 알페스를 비롯해서 자기 취향엔 과거 경험이 진짜 많이 들어가는 것 같아. 나도 캠게를 좋아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땐 내가 로맨스를 할 거라는 상상 자체가 없었거든. 고등학생이 연애하면 안 된다는 그런 한국 사회의 보수주의와 더불어 개인적으로도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누구와 로맨틱한 관계를 맺고 이런 상상 자체가 전혀 없었다면 대학 들어와서는 다들 연애해라, 왜 남자친구 안 생기냐, 들들 볶으니까 나의 로맨틱한 관계를, 그것도 틀에 박힌 연애 관계를 상상하면서 그 정상성을 되게 동경하곤 했었지. 그래서 나는 캠퍼스에서의 연애를 상상하는 게 더 와닿는 거 같아.



후회물…. 재회물…. 청게…. 캠게…. 이성애자였지만(심지어는 여전히 이성애자라고 주장하지만) 동성연애를 하는 주인공…. 이처럼 BL과 RPS 내에는 다양한 서사와 문법이 있다. 이곳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면, 말한 그대로 이루어지는 욕망의 놀이터다. 물론 기본적인 공식은 존재한다. 바로 ‘공(탑)’과 ‘수(바텀)’라는 ‘공X수’ 공식이다. 누가 공이 되고 수가 되느냐에 따라 캐릭터의 역할이 생겨나고, 수많은 서사가 가능해진다. 바꿔 적자면 공수 관계는 쾌락과 욕망의 트리거와도 같은 장치다.      


이때 주목할 것은, 흔히 공이 ‘남성적’이라 여겨지는 특성을, 수가 ‘여성적’이라 여겨지는 특성을 부여받아 왔다는 사실이다. 가령 BL에서 공은 키와 덩치가 크고 몸이 근육질인 반면, 수는 보다 여리여리하게 그려진다. 이러한 재현은 여러 차원에서 ‘나쁜 재현’으로 비판받아 왔다. 먼저 실제 게이의 삶을 왜곡하고 대상화한다는 지적이 있다. “게이도 다양한 게이가 있다. 남자다운 게이, 여자다운 게이, 멋진 게이, 추한 게이, 젊은 게이, 나이 든 게이. 야오이가 좋아하는 것은 감상할 만한 게이뿐이다.”라는 말[5]은 이러한 입장을 잘 축약해 보여준다. 또한, 공수 캐릭터가 고정화된 남녀의 젠더 역할을 연기한다는 비판도 있다. 공수의 자리 분배는 둘의 관계에서 권력 차로도 이어지는데, 이것이 남녀의 권력 관계를 그대로 반복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공수 구도는 BL과 RPS에서만 찾을 수 있는 재미를 우리에게 안겨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이렇게 빻은 걸 계속 소비해도 되나, 싶은 찝찝함을 남긴다. 이 복잡한 마음을 안고서도 우리는 (덕후라서) 어쩔 수 없이 BL과 RPS를 조금 더 지지하게 되는데, 이어지는 대화에서는 공수 구도에 대한 비판에 맞서 그것을 여성/퀴어의 관점에서 옹호해봤다.



빙봉: 나는 이거 궁금했어. 공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고, 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예를 들어 내가 덕질하는 아이돌 중에 A는 몸이 좋으니까 내가 공으로 먹고 B는 엄청 쪼끄마니까 수로 먹는단 말이야. 그런데 걔네 둘이 붙을 때 ‘전형적인 헤테로’ 로맨스 소설처럼 묘사되면 또 안 봐. 강압적인 공과 그에 맞춰 고분고분한 수로 나오면 진짜 좀…. 싫달까? 체구로 이미 그 공수 관계가 ‘빻은’ 취향 같이 느껴지는데 성격 차까지 그래 버리면 정말 걷잡을 수 없는 느낌.      


물결: 나는 예전에는 그게 나름 확실했었던 것 같거든? 체구가 작거나, 선이 가늘거나, 머리가 길거나 ‘여성적’ 외형에 가까워 보이는 애가 수인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어. 확실히 공수의 외향이나 성격을 묘사할 때 고정적인 젠더 표현을 따르는 작품을 선호해왔는데…. 그게 재미의 요소가 되면서도 길티한 면이 있어.      


빙봉: 그렇지. 어떤 고정성이 있지. 창작하거나 소비한 사람들이 비엘이나 알페스를 게이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애당초 동성연애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없으니까 그냥 너무 헤테로 연애로 치환해서 만들어내고 읽어버린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사실 게이를 비롯한 동성 연애가 되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존재하는데 그러니까 그 다양성에서 내가 게이랑 동성연애는 무조건 헤테로랑 달라야 해, 무조건 헤테로랑 다른 어떤 특별한 지점이 있어야 해, 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물결: 나도 동감해. 조금 더 확장해보면, 공수 구분이라는 게 이성애 중심적이고 남녀의 역할 구분을 강화한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잖아.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우리는 일상적으로 젠더에 기대어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단 말이지? 그래서 젠더 차이에 근거하는 공수 구분이 비엘이나 알페스만의 길티한 문화라고는 볼 수 없을 것 같아. 중요한 건 여성과 퀴어가 어떻게 그것을 재미를 위한 서사적인 장치로 쓰고 있는 지라는 생각이 들어.    

  

또 이 문화에서 남성의 신체를 상상하는 방식도 되게 흥미로운 게, 흔히 ‘야오이 구멍’이라고 하잖아. 공과 수가 애널로 섹스를 하긴 하는데, 위치나, 형태나, 기능적으로나 그게 애널일 수가 없고 정말 수수께끼의 구멍에 가까운…. 오메가 버스[6]에서는 남자의 몸에 자궁을 이식해버리기도 하고. 혹자는 공수 구도가 이성애의 삽입-흡입 섹스를 따라 한다고 하지만 그건 너무 단순한 이해인 것 같고, 오히려 공수 구도와 퀴어한 신체를 활용해 쾌감을 직조해가는 문화라고 생각해.      


빙봉: 애널 섹스가 갑자기 ‘우리 섹스하자’ 하자마자 가능한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준비 과정이 필요하잖아. 그런 게 하나도 안 나오는 게 너무 몰이해적이고 혐오적이라는 생각도 있었거든. 그런데 사실 기존 매체들에서도 헤태로 섹스나 헤테로 연애를 묘사할 때 ‘우리 오늘은 데이트 통장으로 결제할까?’ 막 이런 게 나오지는 않잖아. 둘이 데이트 비용으로 신경전 한다든가. (웃음) 사실 그것도 일상에선 정말 중요한 문제인데 말이지. 그래서 난 애널 섹스에 대한 간편한 묘사가 비엘이나 알페스만의 끔찍하고 잔악하고 썩은 부분은 아니란 결론에 다다르긴 했어.     


물결: 맞아.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과감하게 삭제되거나 추가되는 것들이 있는 거지. 단순히 이성애 중심적이고 기존의 젠더 역할을 반복한다고 일축해버리기에 비엘이나 알페스에는 매우 퀴어하고 페미니즘적인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해.     



2. ‘진화형 BL’?     


재현에 대해 조금 더 얘기해보자. 비엘/알페스의 주된 재현 대상인 남성, 그중에서도 동성애자 남성은 꽤 드라마틱한 고난과 역경을 겪어야 했다. 게이, 동성애, 동성애와 같은 말들이 참 쓸데없이 무겁게도 다루어졌던 때, 당대를 그대로 반영하듯 팬픽의 주인공들은 동성애를 ‘들키’거나 ‘반대’에 부딪혀 강제로 헤어지는, 이별의 슬픔을 겪었다. 반면 여성은 그리 주요하게 등장하지 않았지만, 등장하면 꼭 공과 수의 사랑을 반대하는 어머니로 나타나는 일이 빈번했다. 공과 수의(그러나 주로 공의) 여자 친구 혹은 와이프로 등장해 날 버리고 더럽게 남자끼리 붙어먹는다며 저주를 퍼붓거나 괴롭히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런 재현들은 분명 바뀌고 있다. 비엘/알페스의 바탕이 되었던 공수 구도 역시 과거와 다르다. 과거에 팬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공수 관계로 쓰인 팬픽을 험악한 공격과 수비를 통해 지켜왔다. ‘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아이돌 멤버가 ‘수’로 묘사되거나 그 반대의 경우, 팬들은 서로를 헐뜯고 욕하고 조롱했다. 공수 교체는 없었다. 하지만 이젠 2021년, 그런 서사는 없다. 있어도 조금은 미약해졌다. (미약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여성의 재현도 변화했다. 이젠 공수의 사랑을 가로막는 호모포빅 어머니 혹은 악녀로 묘사되는 여성을 찾는 것이 더 어렵게 됐다.     


아래 나올 대화에서 우리는 그런 변화를 짚어보기로 했다. 비엘러들이 비엘의 문제적 재현을 지적하며 일어난 ‘탈 BL 논쟁’부터 문제적 재현을 넘어선 ‘진화형 BL’까지를 다뤄보았다. 비엘과 알페스에 그려진 것이 언제나 가장 정치적으로 올바른 재현은 아니었다. 그러나 (종종 과도하게 미적·정치적 판단의 기준점이 되는) ‘정치적 올바름’은 놀이, 판타지, 삶의 복잡한 관계를 담아내기에는 한참 부족한 개념이다. 우리는 때로는 정치적 올바름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때로는 그것을 처참하게 무시하면서 재미와 즐거움을 쫓는 것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 해보았다.



물결: 비엘이 여성혐오적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2018년부터 트위터에서 비엘의 다양 한 문제들을 비판하고 비엘의 소비와 창작을 멈추자는 ‘탈BL’ 논쟁이 있었는데, 『원본 없는 판타지』(후마니타스, 2020)에 실린 김효진의 「보이즈 러브의 문화정치와 ‘여성 서사’의 발명」에 따르면 공수 구도가 현실의 남녀 권력 관계를 답습한다는 입장과 여성 캐릭터를 구조적으로 배제한다는 입장에 의해 이러한 비판이 일고 있는 것 같아.


빙봉: 나는 일단 후자에는 동의하진 않아.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작정 여성혐오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원본 없는 판타지>에서 그런 주장들이 있었다는 걸 읽을 때 ‘엥 저런 이유로 여성혐오적이라 생각한단 말이야?’라고 생각 했었어.


물결: 나도. 그러니까 (그 주장에 따르면 비엘/알페스가) 그냥 알탕 장르라는 거잖아. 근데 여성 서사랑 비엘/알페스가 페미니즘에 기여할 수 있는 방식이 애초에 다른 것 같아. 간단하게 말해서 여성 서사는 여성에 대한 좋고 멋진 재현을 늘리는 거고, 비엘/알페스는 기존의 재현 문법을 가지고 놀면서 여성/퀴어가 무얼 할 수 있는지, 그 역량의 문제랄까?


빙봉: 소위 말하는 알탕 영화나 드라마를 여자들이 ‘이건 여성주의적이지 않다’라고 얘기하는 이유는 그 작품들이 유해한 남성성을 답습해서인 건데, 사실 비엘이나 알페스에서 그런 해악적인 남성성이 그렇게까지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게 여성혐오적인지는 잘 모르겠어.


물결: <불한당>을 생각해 보면, 그것도 남자들끼리 다 해 먹는 전형적인 느와르임에도 불구하고 소비층은 대부분 여성이었잖아. 그걸 통해서 여성의 소비 능력을 보여줬고. 그래서 여성만 나온다고 해서 페미니즘적이라 해석할 수 있는 건 절대 아니라고 봐. (빙봉: 그렇지.) 누가 그 문화를 행하고 있고, 또 그들이 그 문화로부터 무엇을 얻고 있는지의 전체 맥락을 봐야 한다고 생각해.

전자의 논리도 같은 이유로 비판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여성/퀴어에게 가능한 것들의 범위를 넓히는 실천과 수행이 어떻게 페미니즘적이지 않지? 비엘과 알페스가 그 문화를 수행하는 여성/퀴어에게 어떤 의미이고, 어떻게 삶의 방식-가령 내가 어떻게 두 동성만 보면 동성애 관계로 엮어버리는 호모렌즈를 장착하게 되었는지, 그게 게이로서 나의 욕망과 어떻게 관련하는지-으로 자리 잡았는지의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너네가 하는거 성별 이분법적이야’라고 말 얹는 건 적어도 분석적 차원에서는 의미값 0인 비판이라 봐.


빙봉: 단편적인 이해인 것 같아. 여자가 많이 나오면 여성 영화고, 남자만 나오면 여성 혐오를 강화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된 거잖아. 너무 단편적인 도식이지.


물결: 맞아. 물론 저런 비판이 아예 유효하지 않다는 건 아니야. 비엘과 알페스에서의 재현이 언제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진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재현의 방식에도 다양한 변화들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BL 연구자인 미조구치 아키코는 『BL 진화론』(길찾기, 2018)에서 2000년대부터 실제 게이들의 삶과 그들이 경험하는 동성애 혐오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이나 성찰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늘어났다 설명하면서 그런 작품들을 ‘진화형 BL’이라 부르더라고. 진화형 BL이 여성 혐오나 이성애 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힘들을 내재하고 있고, 또 BL 전체의 변화를 견인할 수 있다는 게 골자인데, 빙봉은 여기서 미조구치 아키코가 말하는 진화형 비엘이나 알페스라 불릴 만한 걸 본 적이 있는지 궁금해. 게이를 재현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변화라든가, 아니면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방식에 있어서의 변화나.


빙봉: 나는 여성 캐릭터가 비엘과 알페스에서 재현되는 방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게, 옛날에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가부장적인 어른의 모습으로 여성이 나오거나 혹은 공이나 수의 여자친구/와이프로서 공과 수의 관계를, 그것도 되게 얕은 수를 쓰면서 방해하는…. 소위 말하는 여성의 질투와 간악한 마음을 표상하는 형태로 여성들이 대부분 재현됐다면 최근에 와서는 거의 다 (관계 속의) 조력자로 나오거나 의리 있는 역할로 나오는 거지. 내가 최근에 본 팬픽 속 여성은 수의 친구인데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해서 수랑 맨날 연애 상담하면서 그 관계를 도와주는 역할이었고, 만에 하나 여성이 방해꾼이어도 수를 써가면서 둘을 방해한다기보다 ‘그래, 너희가 그렇게 사랑한다면 내가 떠날게’ 이런 ‘쿨한’ 여캐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 이게 내가 봤을 땐 최근에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많이 받아들이기도 했고, 특히 케이팝 내부에서 여성 아이돌 팬들을 중심으로 여성주의가 많이 전파가 된 것 같아서. 더 이상 그렇게 쓰면 욕먹으니 이제 그렇게는 안 쓰려고 하는 거지.


내가 느끼는 또 다른 변화는 공수 구분도 이제 서서히 미약해져 가는 것? 왜냐하면 옛날에는 리버시블[7]이라는 말 전혀 없고 애초에 둘의 포지션을 뒤바꿀 수 있다는 상상력 자체가 없었잖아. 그러니까 둘의 공수가 고정되어 있는 거지, 이게 바뀔 수 있다는 상상 자체를 모두가 안 했고, 하더라도 다들 ‘어떻게 그게 가능해’ 이런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취향에 따라서 이렇게 뒤바꿀 수 있는 경우가 되게 많은 것 같아. 실제로 팬픽 안에서도, 예를 들면 (조합이) AB다 근데 그냥 ABA로 표기를 해서 이거를 어떻게 먹어도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나온다든지… 관계 자체가 중요한 경우도 많아진 것 같아. 물론 그 조합 자체보다는 누가 왼이고 누가 른이냐에 따라 관계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아직도 좀 멀었지만.


물결: 공수 구분이 미약해졌다는 걸 나는 비엘에서 거의 충격적인 수준으로 느낀 작품이 하나 있는데, 레진에서 연재됐던 <세 개의 점>이라는 작품이야.


빙봉: 들어봤어. 그거 유명한 거 아니야?


물결: 유명해. 이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삼각관계를 다룬 거야. 그 중 서선율이라는 인물이 충격적일 정도로 새로워. 원래는 공인 우희재가 서선율과 섹스 파트너였는데, 여기서 수인 김지서가 끼어들면서 김지서를 둘러싼 우희재와 서선율의 신경전이 돼. 그러면서 서선율은 기존의 공/수 구분 어디로도 떨어지기 애매한 캐릭터로 나오고. 또 이 만화에서는 BDSM 묘사가 종종 있는데, 서선율이 돔과 섭을 오가는 스위치로 나와. 그래서 섹슈얼리티의 다양한 재현이 이루어지면서도 BL의 문법을 적절히 활용해 재미를 극대화한 작품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아.


빙봉: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는 게, 최근에 읽었던 혐관[8] 팬픽 중에 공수가 사이 안 좋은 이유가 수의 전 남자친구랑 공이랑 몰래 잔 게 들켜서였거든. 읽을 때, 수 전 남자친구니까 그럼 그 남자애 섹스 포지션이 당연히 탑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어? 그런데 공이랑 잤어..?’ 이렇게 되는 거지. (웃음) 삼각관계에서 공과 수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으니까. 그런 식의 묘사들이 슬슬 등장하는 것 같아. 실제로 게이 관계에서 포지션이 꼭 정해져 있는 건 아니잖아? 기존의 비엘이나 알페스에서는 정말 얘가 본투비 수, 약간 거의 진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일 것 같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으니까.


물결: 맞아. <세 개의 점>이나 빙봉이 말해준 사례나 모두 현실에 대한 반영이 늘어난 느낌이야. 그렇다고 재미가 떨어지지도 않고. 그래서 최근에 내 취향도 덩달아 다양해졌다고 느끼는 게, 덩치 큰 애가 수인 BL을 봤는데 생각보다 재밌더라고. 성적인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을 것 같던 쪽이 갑자기 깔리는, 그 낙차가 재미있다 해야 하나. 이런 걸 따져 보면 공수 구분이 늘 고정된 문법만을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인물의 특성이 어떻게 조합되느냐에 따라서 느낄 수 있는 재미와 쾌감이 다른 것 같아.


확실히 이런 변화들을 생각해보면 비엘이나 알페스 판 안에서도 다른 재현의 방식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아. 이제는 다양한 재현에 대한 가능성이 더 활발하게 논의되고 그런 작품이 더 많이 생산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드네.


빙봉: 맞아. 그런 기반이 중요한 이유가 사실 페미니즘이 대중화되면서 요즘은 케이팝 여성 팬들이 대부분이 트위터를 하고 그 트위터로 여성주의나 아니면 퀴어에 대한 얘기들이 활발히 유입되고 논의되잖아. 난 거기서 변화들이 시작됐다고 믿거든. 또 게이의 관계에서 항상 공수가 구분돼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고 그러면서 재현에 변화가 생긴 거지. 그러니까 ‘진화형 비엘’을 만들려면 그걸 만들 수 있는 토양이 필요한 거지.



이렇듯 페미니즘이라는 밑그림 속에서 비엘/알페스는 여러 비판과 변화를 거쳐 왔고, 여전히 거치고 있다. 즉 비엘과 알페스는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 문화를 이해하는 틀도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여성/퀴어는 도대체 왜 비엘과 알페스를 읽고 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도 달라져야 한다는 말이다. 미디어는 오랫동안 팬픽의 주된 향유층이 ‘오빠와 연애하고 싶은 여자애들’이라고 설파했다. 가령 2012년 방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여자 주인공인 시원(정은지 분)은 자신을 토니 여친이라고 지칭하면서 잘나가는 팬픽 작가로 활동한다. 토니와 성애적 관계가 되고 싶은 욕망과 팬픽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남정네 둘을 짝짓는 욕망이 동시에 작동하는 것이다. 이는 곧 팬픽의 문법 속 공, 수의 관계가 다름 아닌 ‘결혼하고픈 오빠’와 ‘여성 팬’의 관계와 동일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물음을 던지고 싶다. 정말 그런가? 우리는 ‘공’인 남성 아이돌과 연애하고 싶어 이러고 있는 건가? 여성 팬이 아닌 남성 팬의 경우에는? 지금까지 이 글에서 뭉뚱그려 지칭해온 ‘여성/퀴어’가 아닌 ‘여성-퀴어’의 경우에는? 혹은 남성-퀴어나 트랜스-퀴어의 경우에는? 이어질 대화에서는 여성, 퀴어 독자인 우리에게 비엘/알페스를 읽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해보았다.



물결: 그간 이 문화를 이해하는 지배적인 틀이, 이성애자 여성이 수 캐릭터에 이입함으로써 공 캐릭터를 욕망한다는 거였잖아. 여성의 욕망이 인정받지 못하고 때로는 위협의 이유마저 되는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 신체를 빌려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안전하게 실천하는? 그런데 나는 나의 경험, 그리고 이 문화에 속한 다른 퀴어들의 경험까지를 따져 보면 이런 이해의 틀이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나도 빙봉과 마찬가지로 두 번의 덕질, 그러니까 엑소랑 세븐틴을 덕질하면서 둘 다 최애른을 했거든. 그런데 이게 기존의 도식에서는 어딘가 말이 안 되는 거지. 내가 이들에게 나의 욕망을 그대로 투영했다면 당연히 최애도 공이 되어야 할 텐데.     


빙봉: 나도 진짜 비슷한 경험이 있어. 내가 하는 많은 씨피에서 나는 우스갯소리로 ‘XX랑 결혼하고 싶다~’ ‘사귀고 싶다~’하는 말은 늘 씨피의 른에게 하는 경우가 많았거든. 나는 오히려 그 커플링에서 연애나 결혼을 상상할 수 있는 건 른이었지, 절대 공이랑 아무것도 하고 싶지도 않았단 말이야. (웃음) 근데 난 그때 당시에 그게 되게 이상했어. 왜냐하면 모두가 나한테 팬픽이나 알페스는 여자애들이 수로 이입해서 보는 거다, 공과의 유사연애와 다를 바 없다, 라고 하니까 나는 왜 수랑 오히려 유사연애를 먹지? 막 이렇게 생각했었단 말이야.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나 스스로 성적 정체성을 정체화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내가 요즘 덕질하는) 엔시티 드림이랑 전혀 아무런 섹슈얼적인 활동을 하고 싶지 않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페스를 엄청 열심히 하는 걸 보면서 남자 아이돌의 팬인 이성애자 여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안전하게 실천하기 위해 팬픽을 쓰고 읽는다는 원래 그 틀이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적어도 나한테는 적용이 안 되는 거지.


물결: 그래서 알페스를 하는게 프린세스 메이커 하는 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 프메하면 부모된 마음으로 이것저것 먹여주고 입혀주고 사냥도 시키고 일도 시키다가 결국에 왕자님이랑 결혼까지 골인시키잖아.     


빙봉: 마치 우결 방송을 시청하는 패널 같이. ‘내가 덕질하는 그룹에서 유달리 좋아하는 이 둘이 결혼한다니 너무 감격이다.’ 이런 느낌이지. 굳이 내가 둘 중 하나에 이입하고 이런 건 정말 모르겠어.      



3. 더 나은 재현을 위해     


2021년, 공공연한 ‘음지 문화’였던 알페스는 예상치 못하게 국민 청원에 소환되었다. 비밀스럽게 즐기던 취미가 대뜸 국민 청원에 불려 나온 것에 당황을 금치 못하고 눌러본 글은 이런 제목을 달고 있었다. “미성년 남자 아이돌은 성적 노리개로 삼는 ‘알페스’ 이용자들을 강력히 처벌해주세요.” (놀라울 정도로 유효하지 않은 글이라 요약하기 소름 끼치게 귀찮지만 어쨌든) 그들은 알페스가 “항문성교부터 시작해 차마 입에 담기도 적나라한 표현을 통해 변태스러운 성관계나 강간을 묘사하는 성범죄 문화”이며, 가혹한 가해자들이 “우리들이 계속 아이돌을 소비해주기에 아이돌 시장이 유지되는 거”라며 아이돌들에게 뻔뻔하게 ‘소비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들에게 “지난날 n번방과도 같은 수많은 권력형 성범죄 가해자들의 태도”를 연상시켰다고 한다…. …….


오타쿠를 향한 일반인의 잔혹한 오해, 지난 몇 년간 부상해온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 의식, 동성애란 단어만 들어도 발끈하게끔 이 땅의 남성들을 학습시킨 호모포비아 같은 것들이 잔뜩 얽혀있는 저 글을 읽었을 때, 자동으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설명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인가……? 꼬인 실타래처럼 복잡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 사태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가 보고자 했다. 명쾌함보단 막막함, 혼란스러움이 느껴질 대화지만 이 대화가 독자들에게 이 사태를 이해할 소소한 길잡이로 기능하기를 바란다.



빙봉: 나는 청원을 읽고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일단 엄청난 호모포비아에 의해서 쓰였다는 거였어. ‘이렇게 꽃다운 아이들을 어떻게 게이로 쓸 수가 있냐’ 그런 내용이잖아. ‘헤테로일 게 분명한 이 남성들이 게이로 묘사되는 건 이들의 인권 문제다.’ 일단 그것 자체가 너무 우습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나는 걔네가 그 청원을 올린 이유가 N번방 때문이라고 확신하거든. 왜냐하면 N번방 이후로 남성들도 자신들이 ‘완벽한 가해자’가 아니라는 걸 입증하려고 노력해 왔으니까. 문제는 그들의 상상이 사실과 크게 다르다는 거지. 알페스라는 게 마치 N번방의 텔레그램같이 고정된 플랫폼이나 커뮤니티에서 사고팔고 공유하고 운영자가 명백하게 존재하는 구조였던 게 아니라 사실 하위문화니까 그런 게 없잖아. 근데 알페스 운영자를 처벌해 달라… 운영자 대체 누구…? 어떤 사람들은 이수만 아니냐고 하더라. (웃음)


물결: 나도 호모포빅한 전제를 깔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아. 그런데 이 전제는 이 사태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미디어 전반에서 드러나는 특징 같아. 미디어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헤테로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이 순진함. 동성애가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였다면 ‘그래, 둘이 엮을 수 있지’라고 생각했을 것 같거든? 생각해보면 일반인들도 일상적으로 다른 사람들 엮어 먹잖아. 맨날 둘이 지나가면 쟤네 커플일 거라고 추정하고, 특히 이성애 관계에서는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 이지랄(ezr) 하면서 엮는데 그렇게 치면 그것도 알페스가 아닌지?      


빙봉: 맞아. 예능에서도 맨날 러브라인이니 뭐니 하면서 여성 출연자랑 남성 출연자 엮어서 뽀뽀를 하니 결혼을 하니 이러는데 그게 궁극적으로 알페스랑 다를 게 뭐냐고. 그런 거는 이성애라서 괜찮은 건가? 빙의글[9]도 있잖아. 그것도 ‘나’라는 실존하는 여성과 ‘아이돌 A군’이라는 실존하는 남성이 연애하는 창작물인데, 그거는 헤테로라서 괜찮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고. 팬픽을 그렇게 욕하던 사람들은 빙의글은 왜 괜찮은 거지? 여자와 남자의 사랑이라서?


물결: 그러니까. 미디어에서 퀴어의 존재와 사랑은 언제나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 그러면서 아이돌 산업은 정작 퀴어 베이팅[10]이란 퀴어 베이팅은 다 하고있는 게 꽤 화나는 상황이지. 퀴어한 이미지 끌어다가 간편하게 콘텐츠 제작해서 마케팅으로 사용하고 실제로 까보면 퀴어는 ‘활용’되었다는 게 느껴지니까.     


빙봉: 오, 그렇게도 볼 수 있겠다. ‘멀쩡한’ 이성애자를 동성애자로 상상하는 것에 대해 엄청난 혐오를 분출하면서도 마케팅을 위해서는 퀴어를 이용하기도 하잖아. 난 드라마에서도 퀴어한 관계들을 브로맨스, 워맨스라고 동성 간의 우정으로 퉁 치는 것 웃긴 것 같아.      


물결: 맞아. 퀴어 코드를 마케팅으로 사용하는 게 가수나 소속사의 의지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나는 그게 마케팅으로밖에 남을 수 없는 이유가 퀴어에 보수적인 미디어 환경이나 팬덤 내 분위기 때문이라고 느낄 때도 있거든. 퀴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니까 가수나 소속사도 이걸 전면에 드러내지 못하고 눈치 보면서 메시지 정도로 일축해버리는 거지. 실제로 일부 팬들은 음악이나 뮤직비디오에서 드러나는 퀴어 코드에서 ‘퀴어’라는 키워드를 지우고 그냥 다양성에 대한 예찬쯤으로 뭉뚱그려버리는 것도 왕왕 봤고. 나는 다양성에 대한 포용 정도로 퀴어 코드와 메시지를 퉁쳐 버리는 그런 해석들이 그 ‘다양성’을 위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저항하고 직접 행동을 꾸려온 퀴어의 존재를 지워낸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고 생각해. 팬덤이나 미디어 환경이 퀴어에 닫혀있으니까 창작자들도 그걸 마케팅 요소로만 활용하고 있는 게 너무 화나는 거지. 그러면서도 알페스는 멀쩡한 헤테로를 동성애자 ‘취급’한다면서 화내고 있고.


또 중요한 건, 나는 알페스 금지법이라는 기상천외한 주장이 너무나 명백하게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로 등장했다고 생각해.


빙봉: 맞아. 왜냐면 걔네가 습득한 어휘들을 걔네 딴에 너무 적절히 사용했어. 청원 내내 더 이상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이 불명확하고, 그리고 권력형 성범죄라는 것에 대해 얘기하잖아.


물결: 그러니까. 내가 청원 원문을 가져왔는데, “이처럼 소비 권력을 통해 피해자들을 약점을 쥐고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태도는 수많은 권력형 성범죄 가해자들의 태도를 떠오르게 한다.” 진짜… (한숨) 소비자의 소비력과 강간 문화에서의 남성 권력이라는 게 완전 다른 권력의 양태잖아. 근데 그거를 손쉽게 퉁쳐버리는 게 정말….


빙봉: 너무 다급하게 N번방이랑 비교를 한 거지. 사실 N번방이랑 지금 벌어지는 여러 사건을 비교하고자 하는 시도가 계속해서 있잖아. 예를 들면 알페스도 그것의 일환이고, 최근에 남성 몸캠 유포 가해자도 여자였다고 그랬는데 사실은 아니었고. 손가락 논란도 100% N번방이랑 비교하면서 자기들을 피해자로 동치하고자 하는 노력이지. 난 그래서 청원 읽는 내내 ‘얘네가 진짜 남성 아이돌의 인권 문제에 크게 관심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알페스가 실존인물에 대한 성 착취라는 얘기도 조금 할 말이 많거든? 알페스 금지 청원의 주된 내용이 실존 인물로 성 착취를 하고 있다는 거였잖아. 그런데 나는 한창 그것 때문에 시끄러울 때 트위터에서 ‘야 우리가 (남자 아이돌 멤버들을) 과대표도 만들어주고 재벌 되게 해주고 온갖 멋지고 잘생기고 능력 있는 미사여구를 다 붙여주는데 이게 어떻게 성 착취냐 (웃음)’(는 얘기가 있었거든) 사실 ‘노란 장판’이라고 해서 공이나 수가 빈곤한 것처럼 묘사되는 설정들도 있지만 사실 그 빈곤함 속에서 되게 결연하다든가, 적극적이라든가 엄청 긍정적으로 표상되잖아. 애초에 (남자아이돌 멤버가) 긍정적으로 묘사되지 않으면 이제 팬덤 내부에서 난리가 나고….


그것도 그렇고, 나는 알페스가 진짜 얘네를 가지고 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어. 왜냐하면 알페스에선 작가가 작품 속에 스스로 성취하고자 하는 무언가를 투영하는 경우, 그러니까 얘네의 사랑도 커다란 주제지만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할 때 알페스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거든. 이를 테면 내가 봤던 한 팬픽은 둘이 사귀다가 우연하게 재회해서 다시 사귀는 내용인데, 실제로 작가가 그 당시 자기 구남친이랑 재회하는 상상을 하면서 썼다고 그랬어. 쓰는 사람의 자기 경험이나 혹은 자기가 보고 싶었던 걸 쓰기 위해 실존하는 무언가를 엄청 부풀려서 쓰는 것 같고. 그리고 나는 독자로서 둘의 사랑 얘기를 읽으면서도 내가 내 친구와의 관계에서 느꼈던 뭔가 괴로움 이런 거를 투영하면서 읽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거든. 그래서 이게 진짜 ‘얘랑 얘가 사귀고 얘네 둘에 대해서 내가 써보겠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읽어 보겠다’라는 것만으로는 완성되지는 않는다는 생각도 들고 최근에는.


물결: 나도 알페스 안에서 그려지고 있는 인물이 100% 실존 인물이라 볼 수 있는지 의심을 많이 하는 게, 물론 실존 인물의 얼굴과 신체를 빌려온 건 맞으면서도 우리가 항상 ‘연예인들은 TV에 나오는 것만 갖고선 믿으면 안 돼’라는 말을 계속 해왔잖아. 이 말이 뜻하는 건 연예인의 이미지와 연예인의 실체가 구별된다는 건데, 알페스는 결국 이미지와 실체 사이의 경계에서 그 둘을 갖고 노는 거라 생각해. 물론 어디서부터가 그 사람의 이미지인 거고, 어디까지가 실체인 건지 따지는 게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알페스가 실존 인물을 완벽하게 이용하는 장르라고 보긴 어려운 면이 있지. 앞서 말한 것처럼 창작자의 욕망이 투영돼서 정말 연예인의 신체만 빌려온 새로운 캐릭터가 창조되기도 하고. (빙봉: 맞아맞아.) 아니면 연예인의 개인적인 특성으로 알려져 있던 게 서사에 반영이 되기도 하고.


빙봉: 나는 그게 되게 커다란 즐거움인 거 같아. 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얘의 개인적인 특성부터, 얘가 표방하고 싶어 하는 이미지, 얘가 숨기고 싶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그런 이미지들을 한데 모아 얘기를 하고 창작물을 만들어낸다는 게 재미있는 거. 나랑 같은 씨피를 파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와, 이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신기해하기도 하고.


이건 좀 딴소리인데, 나 옛날에 알페스 팔 때 수의 기획사가 이미 다 준비한 온리전[11]을 막판에 못하게 한 거야. 장소 섭외 다 하고 인쇄소에 책 맡기고 굿즈 다 발주하고 그랬는데 쑥대밭이 된 거지. 취소된 게 온리전 예정일 일주일 전이고, 장소, 시간이 다 공지가 됐으니까 이젠 거기서는 못하잖아. 그니까 이제 원래 쓰던 온리전 트위터 계정도 버리고 다들 이메일로 긴밀히 소통하면서 다른 곳을 빌려가지고 했는데, 그때 다 같이 말을 맞췄던 게 이거는 무슨 그룹의 누구와 누구가 아니라 그냥 그런 이름을 가진 일반인 누구와 누구의 얘기고, 그냥 우리는 길가다 우연히 시간이 맞아서 개인적으로 만난 거다. 이거였어. 근데 그렇게 해도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는 게, 우리가 진짜 그 그룹에 있는 누구와 누구를 가져다가 썼다는 증거가 없잖아. 책을 펼쳐보면 다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고, 나이도 다르고, 성격이나 외모 묘사도 조금씩 다 다르고. (웃음) 아니 사실 그렇잖아. 그걸 보면서 알페스가 실존 인물을 100% 활용했다고 말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어.


물결: 현실과 픽션은 분명 다르지. 그래서 알페스 처벌 관련된 청원 보면서 ‘엥’ 하는 기분이었어. 그러니까 트위터에서 웃긴 걸 봤는데 그걸 트위터 안 하는 친구들한테 보여주면 절대 이해 못 하고 설명해줘도 이해 못 할 것 같은 기분이 있잖아. 약간 그런 기분. 저 인간들한테 ‘이 사람들은 실존 인물일 수도 있는데 실존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라는 걸 도대체 어떻게 말해줘야 하는 건지.

 

빙봉: 성 착취도 참 그래. 성 착취라는 게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닌 사람의 섹슈얼리티를 폭력적으로 취하는 상황인 건데, 여성 팬들에게 권력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진짜 모르겠거든. 왜냐면 너무 혼탁하다고 해야 하나? 남성 가수와 여성 팬 사이의 권력 관계가. 명확하게 어떤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권력이 더 있다, 를 만약에 파악한다면 알페스가 정말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권력형 성범죄인지 아니면 권력의 낙차를 해소하는 실천인지에 대해서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남성 가수와 여성 팬의 관계가 명확하게 누가 더 권력이 있고 없고를 따지기가 힘드니까 더 어려운 느낌.


물결: 그리고 성 착취라는 주장에 대해서 알페스가 엄연히 재현물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할 것 같아. 여기에 대해서 ‘픽션이 포르노그래피적이라는 것과 포르노그래피 산업은 같은 것이 아니다.’라는 설명[12]을 읽은 적이 있어. ‘포르노그래피적인 것’이 성적인 자극을 목적으로 하는 다양한 표현 양식이라면, 포르노그래피 산업은 그러한 표현양식을 시각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사람을 등장시키고, 생산물을 유통하고 소비하는 산업구조를 갖는 등 별개의 맥락에 놓인다는 말이었어. 이런 설명을 따라볼 때, 재현 문화로서 알페스의 성격을 전부 삭제하고 성 착취 산업이라 주장하는 건 꽤 비약이지.


물론 이 문화 내에서 더 나은 재현 방식을 논의하고 합의해 나갈 필요도 있다고 봐. 그러려면 팬층 내부의 논의도 필요하겠고, 빙봉이 말한 대로 팬과 가수 사이, 그리고 팬과 회사 사이의 권력 관계도 제대로 논의될 필요가 있어 보여.


빙봉: 사실 생각해보면 지금 HOT 이런 사람들 SNL에 나와서 팬픽 장면 재연하고, 유명한 팬픽 대사들 따라 하고 그러잖아. 그 사람들이 그걸 즐기고 있는데 성 착취인가? 모르겠어, 이거 어떻게 결론 내려야 할까. (물결: 그러게)


근데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남성들이 여성 아이돌에게 하는 성희롱과 여성들이 향유하는 남성 아이돌의 알페스 문화는 맥락이 다르다는 거야. 남초 커뮤니티에서 여성의 가슴이나 다리, 혹은 성기 주변을 시선 혹은 카메라가 배회하면서 여성 신체를 조각내고, ‘범해질 수 있는 여성’과 ‘범할만한 여성’을 판단하고 있다면, 사실 알페스는 물론 그들의 신체를 적극 활용하기도 하지만 남성 아이돌의 성격이나 열정, 끈기, 성질머리 같은 비언어적이고 비물질적인 특성을 이리저리 뜯고 맛보고 즐긴 다음에 얘랑은 얘가 잘 어울리겠다, 하고 짝 지어주는 형태인 거지. 그리고 그 ‘뜯고 맛보고 즐기’는 과정은 흔히 말하는 ‘올려치기’의 과정 중 하나이고. 이 둘은 무조건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물결: 맞아. 여성 아이돌 판이야말로 남성에게 ‘포르노그래피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유통해온 산업이지. 뭐 이런 문제에는 남자들이 국민 청원 올리기라도 했어? 섹슈얼한 의상 입히고 춤 시키는 거에 남성 팬들이 여성 팬들만큼 소속사에 항의한 적 있나? 여성과 퀴어들은 그동안 페미니즘을 배우고 배운 걸 바탕으로 이 산업을 바꿔왔어. 알페스가 아무리 문제적이라도 그걸 바꿀 수 있는 역량이 우리에겐 이미 있다는 거지. 그들에겐 없는 반면에.     



나가며: 그럼에도 비엘과 알페스를 읽는 우리들     


물결: 이 질문으로 좌담을 닫아보자. 빙봉에게 비엘과 알페스가 어떤 의미야?     


빙봉: 나에게 알페스는 길티 플레저야. 되게 어렸을 때는 비엘이나 알페스가 퀴어 문화의 일종이라는 꽃밭 같은 생각을 했는데 사실 그렇지 않잖아. 게이를, 남성을 완전히 활용하고 있지, 냉정하게 말하면. 내가, 우리가 경험해보지 않았고, 경험해보지 않을 게이들의 성애적 관계를 맘대로 상상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길티함이나, 혹은 실존 인물을 가지고 어떤 성적인 상상을 하거나 계속 그런 상상을 하는 게 진짜 윤리적으로 옳은 건지 하는 것에 대해 아직까지도 고민이 있고. 그런데 동시에 재미있는 거지. 계속 말했던 것처럼 내가 좋아하는 어떤 남성 둘에 대해서 다 같이 모여서. 얘는 이런 성격이니까 이렇게 행동할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할 것 같다, 이런 것들을 상상하고 엄청나게 고퀄리티의 글과 그림으로 그걸 소비하는 게 너무 재미있는 거야.     


물결: 그런 면에서 나한테는 완벽한 플레저야. 난 게이니까. (웃음) 그리고 나는 비엘이나 알페스가 둘 다 청소년기에 게이로 정체화하고 게이로 살아가는 거에 있어서 많은 힘을 줬어. 앞서 언급했던 『BL 진화론』에서, 저자가 어릴 때 미소년 만화랑 소년애물 만화에 실시간으로 감정이입 하면서 사춘기를 보냈기 때문에 사회에 만연한 호모포비아에 영향을 받거나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적는 부분이 있거든.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 같아. 비엘을 즐겨봤기 때문에 거기서 그려지는 동성애 감정과 내가 느끼는 동성애적인 감정이 엄청 다르지 않구나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나는 동성한테 처음 성애적 텐션을 느낀 일과 게이로서 정체화한 일과 비엘을 처음 읽기 시작한 일 간의 인과관계가 엄청 명확하지 않고. 그냥 하나의 덩어리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단 말이야. 비엘과 팬픽도 분명히 그 어떤 자연스러움에 한몫을 했던 것 같아. 동성애라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계관이니까.     


그래서 BL이나 팬픽이 여성이나 퀴어를 임파워링 할 수 있는 장르라는 생각이 들어. 예전에 읽었던 글 중에 어떤 문학 평론가가 여성 독자들이 서구 백인 남성들이 쓴 글만이 정전으로 추앙받는 그런 세계에서 ‘해석 노동’을 해야된다라고 쓴 적이 있거든. 여성 독자들이 젠더적 불일치로 인해 소설의 주인공들과 자신의 자아를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는 건데, 재밌는 건 이 불일치가 독자들에게 실패의 조건이 되지 않고 (그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기이한 희열의 조건이 된다는 거야.[13] 나는 여기에 되게 동의하고, 여성/퀴어들이 자기 자리가 없는 세계에서 남성, 여성, 혹은 그 어딘가를 오가며 읽기를 수행해왔다고 생각해. 비엘이나 알페스도 그런 기나긴 해석 노동의 세월 속에서 여성이나 퀴어들한테 배태된 문화적 능력 같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 주어진 것들을 가지고, 그러니까 명확하게 우리 거라고 주장할 수 있는 건 없지만 그래도 주어진 것들을 가지고 그 안에서 욕망이나 쾌감을 직조해 나가는 게 비엘과 알페스가 지닌 힘이자 매력이 아닐까…     


우리의 좌담에는 ‘모르겠다’는 말과 웃음 섞인 한숨이 가득했다. 입 밖으로 내어 기록하면서까지 해본 적 없는 대화의 주제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말이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오늘날 비엘/알페스 문화를 둘러싼 해석 투쟁에는 호모 포비아, 이성애 규범성, 여성에게 강요되는 성적 보수주의, 현실과 픽션의 (모호한) 경계라는 문제가 복잡하게 착종되어 있다. 이 머리 아픈 복잡함을 한 치도 모르는 남성들이 기어코 알페스를 N번방과 연결 짓고자 했을 때 물결과 빙봉을 비롯한 비엘러, 알페서들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여성팬이 남성 아이돌의 명시적 허가를 받지 않고 그의 성애적 관계를 멋대로 상상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옳은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끝없이 회피하게 되지만 팬픽이 성 착취라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강하게 고개를 젓고 싶다.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과거 자신들의 전성기에 쓰였던 팬픽을 되새기며 시키지도 않는 팬픽 재현까지 하는 1세대 남자 아이돌을 볼 수 있다. 드라마에는 팬픽을 써서 방송작가로까지 꿈을 이어가는 여성 청소년 팬이 등장한다. 팬픽을 쓰고, 팬픽으로 쓰이는 이들이 방송에 자주 얼굴을 비출 수 있는 까닭은 이것이 아이돌 팬 문화 내 유구한 하위문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유구한 하위문화라고 해서 문제적이지 않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것은 남성들이 전유해 온 여성 아이돌 성희롱 혹은 성착취와는 크게 다르다. 여성 아이돌의 신체를 조각내어 강간 문화의 상품으로 소비하는 그 행위들과, 남성 아이돌의 신체와 성격 속 돋보이는 조각들을 골라내어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치장하는 이 행위는 다르다.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우리가 앞서 말한 것처럼 비엘과 알페스는 변화하고 있다. 비엘과 알페스를 읽고 쓰는 여성과 퀴어들은 페미니즘과 끊임없이 접속하면서 과거의 과오를 되짚고 무엇이 옳은가를 논의하고 있다. 그 논의는 때때로 의미 없는 말싸움과 끝이 없는 사이버 불링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과거 향유해 온 문화의 거대한 흐름에 반기를 들고 당연했던 것들에 질문하며 변화하는 과정은 무척 느리고 지난하지만 분명히 일어나고 있다. 그 변화를 못 본 척하고 이것을 척결해야 한다는 간편한 논리를 내세우는 건 단선적이다. 성급하다. 그리고 무례하다.


이번 좌담은 길티 혹은 플레저로서 비엘을 읽고 알페서를 자처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너무 사소하고 불필요해서 이런 글을 써도 되는 건가 의문이 들었지만, 우린 마침내 사소하고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목소리를 잃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우리의 사적이고 내밀한 덕질 경험을 꺼내들어 이렇게 글을 쓴다. 우리의 작고 웃음 나는 마음들이 멀리멀리 전해지길 바란다.     



[1] 비이커, “후조시, 우리에게도 역사가 있다”, <일다>, 2017.04.25.  https://www.ildaro.com/7851

[2] 가장 좋아하는 멤버인 최애를 수(른)의 포지션에 고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3] 청춘 게이의 준말, 주인공이 중고등학생인 경우를 뜻한다.

[4] 캠퍼스 게이의 준말, 주인공이 대학생인 경우를 뜻한다.

[5] 이 말은 흔히 야오이 논쟁이라 불리는, 야오이의 게이 재현에 대한 일련의 논쟁을 촉발한 글 「야오이 같은 건 죽어버리면 좋겠다」에 나와 있다. 미조구치 아키코, 김효진 역, 『BL 진화론』, 길찾기, 2018, 100-104쪽에서 재인용.

[6] 세상 모든 사람이 알파, 베타, 오메가로 나누어진다는 가상의 설정으로 성별과 관계없이 오메가는 임신할 수 있다.

[7] 리버스(reverse)는 공과 수의 관계를 뒤바꾸는 행위를 일컫고, 리버시블(reverse-ible)은 리버스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공이 A, 수가 B인 AB라는 씨피가 있다고 하자. AB의 리버스는 BA이고, 리버시블은 AB로 파든 BA로 파든 자신은 모두 괜찮다는 것이다.

[8] 공과 수의 사이가 좋지 않고 서로를 ‘혐오하는 관계’인 설정의 팬픽을 일컫는다.

[9] 여성 팬인 ‘나’라는 여자 주인공을 등장시켜 남자주인공인 남성 아이돌과 로맨스를 상상하는 2차 창작물을 뜻한다.

[10] 알페스가 팬들이 스스로 퀴어 코드를 사용하는 문화라면, 가수와 소속사가 퀴어한 이미지를 내세워 흥미를 끌어놓고 내용적으로 별 의미 없는 콘텐츠를 만드는 행위를 퀴어 베이팅이라 부른다. 최근의 사례로는 ‘Love Parade’라는 제목과 함께 “모양은 달라/서로의 다양한 방법으로”라는 가사를 내건 DAY6 (Even of Day), ‘Hello Future’ 뮤직비디오에 무지개를 여러 차례 등장시킨 NCT DREAM이 있다.

[11]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여는 동인지 즉매회(卽賣(買)會). 아이돌 알페스 온리전에서는 보통 하나의 커플 혹은 주제를 가지고 이와 관련된 2차 창작물을 사고판다.

[12] 『퀴어돌로지』, 스큅 외, 오월의봄, 2021, 15쪽.

[13] 김미정, 「여성교양소설의 불/가능성: 한국-루이제 린저의 경우(1)」, 문학과 사회, 2016년 겨울호,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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