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집기] 익명의 글쓴이
2021년, 대한민국에 거대한 비극이 들이닥쳤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며 2020년과 2021년을 애써 머리에서 삭제하던 사람들은 뜻밖의 논란과 조우해야 했다. 기업들은 이어지는 논란에 대해 고개를 숙여 사죄하기 시작했고 언론은 앞다투어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쏟아냈으며 남성들은 무언가를 요구했고 여성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로의 얼굴만을 쳐다봐야 했다. ‘손가락 논란’이 2021년 상반기, 대한민국에 상륙한 순간이었다.
시작은 GS25가 지난 5월 1일 온라인에 게시한 이벤트 홍보 포스터였다. 소시지처럼 보이는 물체를 엄지와 검지를 이용하여 집고 있는 손 모양이 등장한 것이다. 엄지와 검지를 사용해 소시지를 집고 있다니! ‘일부’ 남자들은 그만 화가 나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메갈’들이 한국 남성의 성기 크기를 비웃으며 ‘남혐’(남성 혐오의 준말)할 때 사용하는 손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성 혐오 손 모양을 공식적인 홍보 포스터에 사용한 GS25를 대대적인 불매 운동으로 혼쭐내 주겠다며 큰소리쳤다.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형성된 날벼락 같은 여론에 겁에 질린 GS25는 사과했다. 남성 혐오의 여지가 있음을 몰랐다며 관계자들을 중징계했다고,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음을 선언하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다음은 BBQ, 무신사, 랭킹닭컴, …. 수많은 기업의 홍보 포스터에 엄지와 검지 사이의 간격을 좁힌 집게 모양 손가락이 등장했고 남성들은 ‘세상에 이렇게 ‘남혐’하는 기업이 많았다니‘하며 기함했다. 한동안 남성들이 화를 내면 기업들은 사과하고 여성들은 한숨을 쉬는 일련의 사태가 이어졌다.
나아가 남성들은 주장했다. 이제 더는 여성은 젠더 폭력의 희생자로 무작정 호명될 수 없으며, 이처럼 젠더 폭력과 혐오 문제의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남성들도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1] 한국 유수의 기업들이 고개를 숙여 사과문을 연달아 올려댔으니 그도 그럴 것처럼 느껴지긴 했다. 여느 때처럼 여성들의 발언을 취재하는 언론은 없었고 남성들은 여느 때와 같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마이크를 쥐고 소리쳤다. 우리 역시 이렇게 피해받고 있으며, 이러한 피해는 여성들이 겪어온 것과 비슷한 정도라고.
그래서 나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잠잠해지고 손가락 논란을 잊어갈 때쯤, 늦게나마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2] 내가 이제부터 말할 것은 손가락 논란 자체가 어떤 의미의 여성 혐오인지, 어떤 젠더 폭력을 표상하는지, 일련의 사건이 무슨 이유에서 백래쉬로 명명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3] 대신, 나는 이 일련의 사건들이 어떠한 맥락에서 ‘남성들의 원맨쇼’였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남성들이 적어 내린 각본을 기업들이 얼마나 충실히 이행했는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제 나는 청자 없는 이 글에서 ‘너희’를 설정할 것이다. 이때, 누가 내 글 속 ‘너희’ 혹은 ‘너희들’이 될지는 너희만 알 것 같다.
여성은 그렇게까지 남성 성기에 관심이 없다
내가 여성으로서 남성의 성기에 갖는 관심보다, 남성들은 더 부지런하게 자신의 성기를 생각한다. 아, 멋쩍어할 필요 없다. 남성기 그 자체가 남성성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남성들의 남성기 사랑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성성이란 무얼까? 고작 몇 어절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단 한 가지 확언할 수 있는 것은 남성성이 일종의 정체성과 직결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정체성은 으레 차이와 배제를 통해 그 의미가 진득하게 이해된다는 점에서, 정체성으로서의 남성성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남성기는 그 과정 한가운데 있다.
분만실에 들어간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에게 간호사가 말한다. “멋진 왕자님이에요.” 참았던 감격의 눈물이 남자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어디서 되게 많이 본 장면 같다. 왜냐하면 수많은 미디어에서 그러한 장면을 반복해서 재현했기 때문이다. 출산하는 와이프를 분만실 앞에서 기다리는 남편에게 “공주님” 혹은 “왕자님” 따위로 가족의 탄생을 선언하는 간호사의 온정 가득한 얼굴. 여기서 ‘멋진 왕자님’은 아기의 지정 성별인 남성의 은유임과 동시에 태어난 아기의 외부 성기를 확인해야만 가능한 확언이다. 이렇듯 갓 태어난 아이의 성별을 지정하기 위해선 그 아이의 성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때 성별 지정의 과정은 아이가 단순하게 외부 성기인 남성기를 가졌는지 여부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갓 태어난 아이가 남성기를 갖고 있더라도, 그것의 크기가 작다면 병원에서는 아이를 인터섹스로 결론짓고 서둘러 그 성기를 제거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기 때문이다.[4] 즉, 남성기가 있다고 해서 남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충분한’ 남성기가 있어야만 남성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때 ‘충분한’ 성기는 어떤 성기일까? 남성이 자신의 성기에 대해 갖는 자기인식을 흥미롭게 풀어낸 연구 하나가 있다.[5] 이 연구에 참여한 67명의 남성 중 대다수는 자신의 성기를 ‘평균적’인 크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식했지만 동시에 더 커졌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내 성기의 크기는 얼추 평균인 것 같지만, 그 믿음과 별개로 평균을 넘어 더 커지길 바란다는 그들의 사고과정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엿볼 수 있다. 비대한 자아와 상대적 박탈감이다.(너희들을 설명하기에 딱 좋은 말들뿐이라고 하면 너무한가?) 자신의 성기가 평균 혹은 그 이상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몰라! 그냥 커졌으면 좋겠다고!!!” 외치는 것. 그것은 비대한 자아와 상대적 박탈감의 콜라보레이션이라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자신의 성기가 커지기를 바랐을까?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들은 삽입 성관계에 있어 파트너에게 더 큰 만족감을 주기 위해 커다란 성기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나는 인터넷에 남자 성기 크기에 관한 연구를 찾아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인터넷 속 많은 글이 자신의 작은 성기에 대한 남성들의 상처투성이 콤플렉스를 어루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종 기사와 연구 결과들은 여성들이 오히려 ‘평균’적인 크기의 성기를 가진 남성과 삽입 성행위를 했을 때 가장 높은 성적 만족감을 느꼈다고 말하면서 남성들이 커다란 크기의 성기에 집착하는 것이 불필요한 소망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더 커다란 성기를 갖고 싶어!”하고 소리치는 남자들에게 “사실 여자들은 그거 안 좋아해^^~”하고 말하는 인터넷 글들은 과분한 위로를 선사한다는 점에서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이윽고 나는 그 속에서 흥미로운 지점 하나를 포착할 수 있었다. 바로 이성애 규범적 삽입 성관계만이 이 세상 유일의 성관계인 것처럼 상정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남성들이 경험하는 삽입 성관계의 파트너는 늘 여성인 것으로 가정된다. 따라서 여성들이 어떤 크기의 남성기를 흡입했을 때 가장 만족하는지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기사와 연구 결과들은 삽입 성관계를 하지 않는 남성 혹은 여성 이외의 성별과 삽입 성관계를 갖는 남성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하고 어찌어찌 남자들을 위로한다.
어찌 됐든 커다란 성기는 단순히 남성성 자체만을 상징한다기보다, 이성애 규범 속 삽입 성관계에서 여성기에 삽입되고, 여성에게 흥분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성기에 대한 이런 믿음은 나아가 모름지기 남자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자신의 성기를 여성의 몸에 삽입하는, 이성애 규범적 삽입 성관계를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경험해야 한다는 또 다른 남성성의 기준과도 맞닿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앗, 그게 아니고…. 오늘날 한국 사회의 남성들은 자신의 성기 혹은 남성성과 관련하여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남성기는 위에 설명한 것과 또 다른, 하지만 엇비슷한 맥락 속에 얽혀있다. 과거, 박정희의 군사 정권에서는 고환 결손과 음경 절단, 정자 수 등 성기와 관련한 ‘문제’가 남성들의 입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즉, 성기에 ‘문제’가 있는 남성은 군에 입대할 수 없거나, 낮은 등급의 신체검사 통지표를 받아 들어야 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너희들이 매일매일 군대 얘기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리고 입대와 제대를 거치는 군대 생활이 너희들에게 ‘한국 남성’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성기에 생긴 문제로 군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한국에서의) 남성성 결여 혹은 부재와 동치될 수 있다. 나아가 군인이 될 수 있는 몸이 어떤 몸인지를 국가가 나서서 판별하는 것은 국민 국가를 대변할 수 있는 몸은 어떤 것인지, 국민 국가의 강인한 수호자로서의 몸이 무엇인지를 은연중에 내포하기도 한다.
하지만 너희들이 취해있던 그 강인한 남성적 정체성에 금이 가고야 말았다. 통계적으로 아시아 남성의 성기가 가장 작다는 연구 결과들이 지구촌 시대를 맞아 인터넷을 통해 살포된 것이다. 포털 사이트에 남성 성기와 관련한 키워드를 검색하면 난 꼭 두 가지 글을 읽어야 했다. 첫 번째는 인종과 성기 크기의 상관관계, 그리고 두 번째는 여성들이 커다란 성기에 갖는 거부감이었다. 2000년대 이후, 인종과 성기 크기 간 상관관계가 뚜렷하게 존재한다는 연구 결과와 함께 인종 별 평균 성기 크기의 구체적인 수치가 첨부된 자료들이 낭설처럼 떠돌면서 한국 및 아시아 남성들은 크게 실망하게 됐다. 자신의 성기가 작다는 것이 연구 결과와 통계 등의 (너희들이 좋아하는 단어인) ‘객관적 사실’을 통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자신의 성기 크기에 만족하지 않고 ‘내 성기 크기는 평균을 웃돌겠지만 그래도 조금 더 커졌으면 좋겠군. 후후...’라고 상상했던 한국 남성들은 자신의 성기 크기가 실제로 작다는 객관적 사실을 인지하고 내재화해야 했다. 강인한 남성성, 국민 국가의 대변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심취해있던 남성들에게 작은 크기의 성기는 용납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모병제 아시아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남성들에게 성기란 마땅히 군인이 될 수 있는 몸인지를 판별하는 기준일뿐만 아니라, 자신의 콤플렉스를 강화하는 신체 부위기도 하다. 으레 ‘남자라면 꼭 거쳐 가야 하는’ 군대에 입성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의 강인한 자신의 성기는 ‘객관의 과학’과 맞물리면서 처치 곤란한 무언가가 되었다. 이제 남성들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성기 크기가 작다는 것을 부인할 순 없으니 우리가 모두 작다고 크게 말하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다’라는 크기 인식이 아닌 ‘우리 모두’라는 연대감이다. 자아 효능과 위기의식, 그리고 그로 인한 콤플렉스가 혼합된 형태의 감각을 너희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크기의 연대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남성들은 이제 자신의 콤플렉스인 성기 크기에 발끈하는 모습을 숨기면서도, 성기의 크기 자체를 ‘남자들끼리의’, ‘우리만 통하는’ 문화로 만들었다. 누군가를 칭찬할 때 ‘(성기의 크기가) 크다’는 식으로 누군가를 치켜세우면서 낄낄거리고 압정, 폭주 기관차, xx cm 등 성기를 은유하는 다양한 형용사를 남발하며 ‘너희들은 못 알아듣지?’라며 여성들의 얼굴을 살피는 건 그저 유치하고 한심하다.[6]
이렇듯 남성기는 너희들이 감각하는 남성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기능한다. 단순한 신체 부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난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너희가 별것 아닌 손가락을 보고 파르르 떠는 이유를. 얼마나 놀라고 화가 났을까? 자신이 굳게 믿어온 젠더 정체성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와도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그 손가락들은.
상상된 형태의 공격성, 그리고 메갈리아
그런데 대체 누가 그랬냐는 것이다. 너희들은 ‘남혐’으로 똘똘 뭉친 메갈리아 회원들이 손가락 논란의 주역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7] 나는 ‘메갈’일 수 없다. 너희 옆에 있는, 너희가 메갈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꼴페미’도 실은 ‘메갈’일 수가 없다. 나아가 이 손가락 논란에 메갈리아가 주체가 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메갈리아는 이미 진작에, 2015년에 공중분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페미니즘을 말할 때마다 ‘일부’ 남성들은 때때로 나에게 물었다. 너는 메갈이니? 그들이 소리를 높여 나에게 메갈인지를 묻지 않아도, 그들은 늘 눈빛으로 나를 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메갈인지 아닌지, ‘잘못된 한국형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 그럴 때면 나는 말했다. 얘들아, 메갈리아는 없어진 지 몇 년이 지났단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의 얼빠진 얼굴을 감상해야 했다. 그들은 정말 모르고 있었다. 메갈리아가 이미 진작에 사라졌다는 사실은 번번이 나를 통해 그들에게 알려졌다.
거듭되는 사태 이후에, 나는 왜 남성들이 자꾸 나에게 메갈리아의 안위를 묻는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메갈리아가 없어졌다는 그 가뿐한 사실 하나를 업데이트하지 않는 이유도 궁금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 깨닫고야 말았다. 그들은 메갈리아가 실존하는지, 메갈리아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그 회원들은 어떤 말을 하는지에 커다란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그들은 일정 부분 메갈리아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꾸 그들로 하여금 메갈리아의 해체를 잊게 하는 이유였다. 메갈리아의 해체를 자꾸만 망각하고 메갈리아를 자꾸만 부르짖는 남성들의 태도에는 그들 전부가 공유하고 있는 남성 연대가 어떤 것에 기대어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특정 시공간에서 이상적인 남성성이라고 동의되고, 남성 중심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남성성을 말한다.[8]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충분히 커다랗고, 그럼으로써 정상적인 남성기’ 역시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유지하는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이루는 모든 요소는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남성에 의해 성취될 수 없다. 모든 남성성이 ‘정상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상태에 도달해있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즉시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이를 ‘성취’하지 못한 남성들은 대안적인 남성성을 구성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취’하지 못한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부정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여성을 공격한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얻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다가 결국 그것이 불가능함을 아는 순간 피어나는 끝없는 자기비하를 여성 혐오로 해결하는 것이다. 여성을 공격함으로써 남성들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도달하지 않은 자신을 순간적으로 ‘남성’으로 감각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때 말하는 여성에 대한 혐오, 폭력은 그리 단순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물론 자신의 실패와 그로 말미암은 자기비하를 동력으로 ‘아둔하게’ 여성에 대한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가하는 남성들은 여전히 무수하지만 이제 현대 한국 남성들은 더 조직적이고 은밀하게 여성 혐오를 표출한다. 바로 여성들이 말하는 폭력의 언어와 피해의 언어를 고스란히 빼앗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메갈리아 역시 마찬가지이다. 메갈리아가 사라진 지는 올해로 만 6년이 흘렀지만, 그들은 이 간단한 사실 하나를 입력하지 않고 메갈리아를 찾는다. 인터넷에서 끊임없이 남성 혐오를 재생산하는 무시무시한 페미니스트 여성들을 상상하면서 자신들이 겪은 가상의 피해 경험을 구체화한다. 즉, 메갈리아가 실존하는지는 그들의 흥미와 거리가 멀다. 메갈리아를 상상함으로써 ‘한국 남성’으로서의 피해와 상처에 대한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 그들의, 너희의 문제다.
너희들과 대화할 때마다, 나는 너희들의 갖은 불평에 시달려야 했다. 자신의 상황을 서술하는 너희들의 언어에는 손쉬운 자기연민과 때 이른 포기 같은 것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국 남성은 더는 자신들이 과거와는 달리 기득권 계층일 수 없으며 한국 여성과 비교하여 특혜를 받은 것도 없다고 말한다. 이때 등장하는 그들의 주장은 꽤 ‘사실’적이고 ‘경험’적인데, 그 이유는 현대 사회가 분화되면서 더는 남성에게 무언가를 더 쥐여주고 여성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가는 형태의 명시적 젠더 폭력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사회는 여성을 전적으로 물적 자원화하면서 여성의 교환과 소유를 통해 남성 연대를 보증할 수 있었지만, 이후 신자유주의와 양극화에 따라 여성에 대한 소유와 교환은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남성들 간에 공유하고 있던 형제애 역시 형체를 잃었다고 말한다.[9] 그런 남성들에게 현대 사회는 이미 젠더 평등이 이룩된 사회이며, 이곳에선 여성에 의한 남성에 대한 역차별만 존재할 뿐, 여성에 대한 차별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가진 것을 계속해서 빼앗기고 있는 자신들을 연민하면서 ‘피해자’로 규정한다. 이러한 피해자성은 훼손되어 가고 있는 남성 연대의 구심점과 다를 바 없으며, 꽤나 성공적인 남성 연대 자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있는 많은 문제가 젠더 평등으로 나아가기 위한 시도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믿음과는 달리,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여전하고, 페미니즘이 사회에 제기하는 문제들 역시 과거와 구체적인 형태만 달라졌을 뿐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즉, 그들이 그들 자신을 ‘피해자’라고 선언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에서 그들은 실제로 피해자일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어떠한 핵심 논리와 가치를 토대로 피해자됨을 감각하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무척이나 상황적인 분노를 발산한다. 이를테면 재재가 겪어야 했던 손 모양 논란이 그러하다.[10] 숏컷을 하고, 페미니스트임을 ‘숨기지 않는’ ‘연반인’ 재재는 지난 5월 참석한 백상 예술 대상에서 퍼포먼스의 일환으로 레드카펫 위에서 초콜릿을 집어 먹었다. 이때 초콜릿을 먹는 손가락은 당연하게도 엄지와 검지였고, 수많은 한국의 남성들은 재재가 레드카펫 위에서 남성을 혐오했다며 그가 공중파 방송에 출연해서는 안 된다는 국민 청원에 동의했다. 그러나 지금껏 수많은 남자 연예인들이 논란 전후에 엄지와 검지를 이용하여 물건을 집었다. ‘작다’는 형용사를 사용하면서 집게 손 모양을 선보인 이도 있었다. 하지만 남성 연예인들의 이러한 손 모양은 그 누구도 주목하지도, 언론에 보도되지도, 분노의 타깃이 되지도 않는다. 오로지 여성들만이 손가락을 구부렸을 때 남성들의 질타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는 남성 혐오가 오로지 여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혐오 문제에 대해 편협하고 무지한 남성들의 사고방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시에 그러한 분노가 오로지 여성을 가해자로 두고 남성을 피해자로 두기 위한 시도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쉬이 읽어낼 수 있다.
현대 한국 남성들은 자신이 피해자임을 선언하는 데만 매몰되어 있을 뿐, 자신들의 남성성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자신들이 주장하는 ‘남성 혐오’가 해결되었을 때 어떤 것들을 성취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들의 분노 표출은 자신들이 어딘가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라기보다 표출된 분노를 전시함으로써 자신들을 피해자 자리에 놓는 것에 불과하다. 2021년 5월, 남성들은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적절한 타깃을 찾았다. 혐오의 주체가 개인적인 층위를 넘어 사회인 듯했고, 영향력이 큰 기업들도 개입된 문제였으며, 무엇보다도 작은 성기에 대한 한국 남성의 콤플렉스와 응집된 남성 연대를 관통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해당 논란이 실재하는 사건이 맞는지, 허구거나 꾸며낸 것은 없는지를 논하는 것은 불필요했다. 즉, 메갈리아와 손가락 논란은 그들의 상상에서 비롯된 허구에 불과하며, 남성 연대와 여성 혐오를 위해 철저히 이용된 것이다. 허술하게 꾸며낸 논란은 공교롭게도 남성 모두의 콤플렉스를 자극했고 이는 그저 남성에 대한 혐오, 남성 폭력(이 단어가 정말 낯설게 느껴진다)의 사례가 되었을 뿐이다. 사실 확인은 불필요했다.
마지막으로, 몰려다니는 너희들에게
남성들은 여성들의 손가락으로부터 ‘남성 혐오’를 읽어냈다고 했다.[11] 그렇다면 여성들이 실제로 엄지와 검지의 간격을 좁혀 남성의 성기 크기를 작다고 단체로 조롱했을 때, 그것은 남성 혐오가 될 수 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럴 수 없다. 해당 손가락 논란이 남성 혐오라고 주장하는 것은 ‘혐오’를 구조적 차별이 아닌 그저 개개인이 갖는 감정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며 혐오라는 사회 현상에 대한 자신의 얄팍한 이해를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남성들의 논리에 따라 페미니스트 여성들(그들에 따르면 ‘메갈’)이 남성에게 ‘혐오’의 감정을 갖고 남성을 모욕하는 형태로 광고를 제작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과정들이 반드시 남성 혐오로 호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해당 손가락 모양이 실제로 남성들의 작은 성기를 표상하고 있고 그 작은 성기로 인해 일부 남성들이 취업 및 승진 제한이라는 벽에 맞부딪히고 작은 성기가 그들에게 벌어지는 수많은 폭력의 이유가 된다면 이는 명백한 남성 차별이겠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러하지 않다. 그러니 이러한 논의는 쓸모없다. ‘메갈’은 사라진 지 오래고, 여성들은 해당 손가락 모양을 사용해본 적이 없으며, 무엇보다 그런 손짓을 사용할 만큼 남성들의 성기에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이러한 손짓이 표상하는 무언가에 의해 폭력을 경험하지 않는다. 감히 단언한다.
너희들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몰려다니면서 ‘집단적 괴롭힘’의 형식으로 누군가를 가해하고 폭력을 재생산한다는 점이다. 이는 사회학적으로 ‘디지털 부족주의’라 불리면서 많은 학자의 관심을 받고 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강조하는 ‘부족주의’란 사실의 단편들을 ‘팩트’라고 주장하면서 그 단편을 믿는 이들이 부족을 이루어 계속해서 그 믿음에 대한 열광을 동력으로 결속하고, 타인을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단편을 ‘진실’ 혹은 ‘진리’로 판단하는 믿음에는 의심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러니 너희들은 인터넷을 통한 디지털 매체에서 끊임없이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며, 너희들이 믿고 있는, 아니 믿고 싶어 하는 의미를 전파하는 것이다. 문제는 너희들이 몰려다니며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개진하는 인터넷 이용자들에게 소위 말하는 ‘좌표를 찍’고 공격하는 데 있다.
금메달리스트 안산이 페미니스트인지에 크게 관심을 가졌던 너희들을 떠올려보자. 국가대표 양궁 선수이자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세 개의 메달을 거머쥔 프로 선수 안산은 금메달을 목에 걸자마자 뜻밖의 논란과 마주했다. 과거 안산이 올림픽 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린 게시물에서 ‘웅앵웅’이라는 여초 커뮤니티 발 단어를 사용했다는 이유에서였다.[12] 안산의 금메달을 부정해야 하는 ‘근거’는 점점 부피를 키웠다. 숏컷을 고수하는 이유에 대해 안산이 직접 ‘편하기 때문’이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은 탈코르셋을 감행한 페미니스트의 이미지에 매몰되어 숏컷한 안산을 ‘페미니스트’라고 손가락질했다. 여자 아이돌 그룹인 ‘마마무’의 팬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도 안산을 페미니스트로 몰아가는 근거로 통했다. 손가락 논란과 마찬가지로, 남성들은 ‘피드백’이랍시고 안산의 금메달 박탈을 위해 대한양궁협회에 민원을 직접 제기했으며, 언론들은 일제히 이것을 받아적었다. 그들의 ‘피드백’은 안산이라는 여성 개인에 ‘좌표를 찍고’ 몰려다니며 괴롭히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안산에게 왜 그런 행동을 하느냐는 여성들의 항의에 남성들은 말했다. 너희가 “그런 단어를 쓰지 않으면 되잖아. 숏컷을 하지 않으면 되잖아.” 여성들의 ‘남성 혐오’가 없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다. 너희들은 몰려다니며 여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것이 여성들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자신들의 ‘좌표 찍고 몰려다니는’ 폭력의 근거를 여성의 행동에서 찾는 너희들은 여성에 대한 또 다른 폭력을 재생산하고 있다.
다만 몰려다니는 남성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다. 팩트 체크를 시도함과 동시에 허구임이 드러나는 이 간단명료한 사건에 언론들은 ‘논란’이라는 오명을 덧붙였으며 기사를 썼고 열심히 보도했다. 적극적으로 여성을 손가락질하지 않았더라도, 언론은 남성이 얼마나 분노했는지, 그 응집된 분노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앞다투어 경쟁하듯 쓰고 말했다. 남성들이 만들어낸 손가락 논란에 사과하고 철회한 기업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해당 논란이 터무니없는 것과 관계없이 그들은 사과문을 게시하고 논란과 관련된 홍보를 모두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이러한 기현상에 대해 ‘기업은 완벽한 이익집단으로서 아무리 사소하고 조그만 피드백이라도 크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라고 어떤 이들은 말했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반쪽짜리 진실인지 안다. 지금까지도 불매와 농성과 시위와 청원으로 기업에 입장을 밝히지만, 그 존재조차 묵살되는 이들이 존재한다. 허구뿐인 남성들의 논란에 발맞추어 속죄하고 반성하는 기업과 남성들의 피해자성을 분석하는 언론은 모두는 역설적으로 여성 차별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남성에게 ‘이게 되네?’의 감정을 불어넣고 자아효능감을 심은 기업과 언론은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 심각하게.
자, 우리는 오늘 멋진 글을 하나 읽었다. 이 글에서 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남성성과 성기가 갖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메갈리아가 사라진 것을 자꾸 잊는 남성들에게 그 반복적인 망각이 현대 한국의 남성성과는 어떻게 긴밀히 연결되는지를 읽어냈다. 그런데 왜일까. 공백을 포함하여 약 14,000자에 달하는 글을 썼음에도 나는 허탈함을 감출 수 없다. 너희들이 유희 거리로 만들어낸 논란에 대해 이토록 진지하고 긴 글을 정성 들여 썼다는 사실이 너무 하찮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여성에게 폭력을 당하는 불쌍하고 가엾은 남성’의 자리를 점하기 위해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만들어내 온라인 폭격을 퍼붓고 종국엔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온갖 애를 쓴다. 너희들이 자꾸만 재밋거리로 만들어내는, 너희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꾸며내는 것들에 언제까지 답을 하고 있어야 할까? 애초에 답을 하긴 해야 할까? 이게 답이라고는 느끼고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참고문헌
김신현경, 줌마네. (2018). 이토록 두려운 사랑. 반비.
김명일. (2021.5.18.) '손 모양 논란' 재재 "초콜릿 집어 먹는 자연스러운 행동" [전문]. 한국 경 제 https://www.hankyung.com/entertainment/article/2021051845327
엄기호. (2017).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교양인
Kessler, S. (1990). The Medical Construction of Gender: Case Management of Intersexed Infants. Signs, 16(1), 3-26. Retrieved September 4, 2021, from http://www.jstor.org/stable/3174605
Johnston, L., McLellan, T., & McKinlay, A. (2014). (Perceived) size really does matter: Male dissatisfaction with penis size. Psychology of Men & Masculinity, 15(2), 225–228. https://doi.org/10.1037/a0033264
[1] 첨언한다면, 나는 남성 역시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앞으로 나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내가 왜 이렇게 코웃음 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제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이해하길 빈다.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니다.) 왜냐하면 ‘손가락 모양’은 ‘남성 혐오’의 근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2] 모두가 잠잠해지고 손가락 논란을 잊어갈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계속해서 ‘눈엣가시’인 여성들을 ‘메갈’과 같은 ‘극악무도한 페미니스트’(‘잘못된 한국형 페미니스트’와 동의어다.)로 몰아 그를 공격하는 흐름은 여전히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이 글을 수정하는 오늘, 2021 도쿄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한 대한민국의 양궁 금메달리스트 안산 선수가 숏컷의 헤어스타일을 고수하면서 여초 커뮤니티 발 유행어를 사용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금메갈리스트”라는 멋진 칭호와 함께 금메달 반환을 요구받고 있다.
[3] 물론 이 일은 백래쉬가 맞다. 일상적 손모양 하나로 남성 혐오와 페미니스트를 진단하고 여성의 일상을 공격하는 흐름이 백래쉬라고 불리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이 백래쉬인가?
[4] Kessler(1990)은 “(신생아의) 음경의 크기가 작을 경우, 모호한 것은 그 조직이 음경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그것을 남겼을 때 ‘충분한가(good enough)’로 결정된다”고 말한다.
[5] Johnston, L., McLellan, T., & McKinlay, A. (2014)
[6] 이런데도 계속 여자들이 너희 성기를 조롱했다고 말할 건가? 우린 정말 너희 성기에 커다란 관심이 없다…. 너희들의 말 역시 모조리 이해하지만 짜증 날 정도로 투 머치 인포메이션이라 불쾌할 뿐이다.
[7] 이처럼 쓸모 없는 문장을 나는 대학을 5년째 다니면서 써본 적이 없다. 지금이 최초라는 것이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고 싶다. 그 손가락 논란의 중심에 메갈리아가 있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말 그들은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8] 김신현경, 줌마네. (2018). 이토록 두려운 사랑. 반비.
[9] 엄기호. (2017).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교양인
[10] 김명일. (2021.5.18.) '손 모양 논란' 재재 "초콜릿 집어 먹는 자연스러운 행동" [전문]. 한국 경제 https://www.hankyung.com/entertainment/article/2021051845327
[11] 물론 해당 논란에 불을 붙인 기업의 홍보 포스터 대부분이 ‘여성들의 손가락’으로 재현되지도 않았기에, 이 문장은 상당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난 이제 그들이 대체 어디서 ‘메갈의 남혐’을 읽어냈는지 모르겠다.
[12] 24시간이 지나 폭파된 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을 텐데. 정말 음습하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