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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5호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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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Oct 15. 2021

귀여운 것은 정말 최고인가요?

[헤집기] 편집위원 아리

‘귀여운 것’ 전성시대

 

“귀여운 게 최고!”라는 말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시대다. 외침에 응답이라도 하듯, 정말로 사방에서 귀여운 것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귀여운 게 최고’라고 믿는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귀여움을 만끽한다. 그들은 귀여운 것이 잔뜩 나오는 사진과 영상을 붙든 채로 은은한 미소를 짓고, 들끓는 애정을 주체할 수 없을 때는 친구나 가족에게 그것을 공유하며 기쁨을 나눈다. 이렇게 귀여움에 열광하는 이들이 넘쳐나게 되면서 귀여운 것들은 화면이나 지면 속에만 머무르지 않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소비된다. 스티커나 인형이 되어 공간을 아기자기하게 꾸며주고, 카카오톡 이모티콘이 되어 뾰족하고 서툰 마음을 앙증맞게 표현해주기도 한다. “역시 귀여운 게 최고”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동과 동물의 귀여움은 혈연이나 동거로 연결된 가족 단위에 머무르지 않고 공적인 층위에서 소비되는 경지에 이르렀다.[1] <아빠 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왔다>와 같은 육아 예능이 줄줄이 편성되어 연예대상을 휩쓸고, <TV 동물농장>은 최장수 인기 프로그램이 되었다. 최근에는 이런 움직임이 더 적극적인데, 아동과 동물을 직접적인 소재로 하지 않는 프로그램에서도 그들의 귀여움을 다양하게 활용한다. EBS의 ‘펭수’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사랑받는 스타가 되었고, 2020 백상예술대상에서 TV 부문 교양작품상을 수상하며 그 영향력을 입증해 보였다. 이에 질세라 수많은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들이 귀여운 외형을 가진 동물들을 출연시키거나 ‘마스코트’로 내세우며 ‘귀여운 게 최고’라 여기는 시청자들을 유인한다. 방송이 끝난 후에는 스치듯 등장한 아동과 동물의 모습을 싹싹 긁어모은 클립 영상이 따로 만들어져 인기를 끌기까지 한다.


그런데 “귀여운 게 최고”라는 말은 꽤 수상한 구석이 있다. 정말로 귀여운 것들이 늘 환영받고, 늘 ‘최고’였는가 생각하면 고개를 내젓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선언의 반대편에는 귀엽지 않은 것들에 대한 혐오와 배제가 쓰여 있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경이로우며 영감을 주는’ 존재로 예찬되던 아동은 식당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큰 소리로 울어버리면 곧바로 따가운 눈총을 받고, 그를 ‘통제하지 못한’ 부모와 함께 ‘무개념’ 또는 ‘진상’ 고객이 된다. 언제나 마음의 안정을 주는 존재로 여겨지는 듯했던 고양이/강아지는 지하철에 오르거나 공공장소에서 배설을 하면 혐오의 대상이 된다. 또 누군가는 ‘나만 고양이/강아지 없어’라며 동물의 소중함을 부르짖으면서도 매일 생존 투쟁을 거듭하며 살아가는 길고양이나 ‘귀엽지 않은’ 돼지와 소, 닭들이 죽어 나가는 것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이런 현실을 애써 묻어놓은 채로 “귀여운 게 최고”라고 외쳐버리고 나면, 매번 입안이 까슬해진다.


이처럼 ‘귀여운’ 것과 ‘혐오스러운’ 것 사이의 경계는 너무나 얄팍해 보인다. 누군가를 귀여운 존재로 바라볼 때 가려지는 것은 무엇이며, 그가 귀엽지 않을 때 일순간에 혐오로 바뀌는 감정은 세계의 어떤 단면을 드러내는가. 귀여운 존재로 취급되는 이들이 요구받는 역할과 이미지는 많은 부분에서 교차되어 있고, 이것이 위반될 때 가해지는 사회의 혐오적인 시선들 역시 서로 맞닿아있을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아동과 동물의 사례를 통해 귀여움이 어떻게 성립되는 것이며, 이 시선이 무엇을 은폐하고 드러내는지를 꿰어보면서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기 위해 생각해야 할 것들을 발견해보려 한다.



누구를, 왜 귀여워하는가


귀여움은 기본적으로 자신보다 약한 ‘보호의 대상’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그렇기에 “자신보다 육체적으로 작거나 어리고, 적당히 의존적이며, 적절한 애교나 교태를 부리는 존재들”만이 귀여움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이때 귀여움은 그를 보살펴주고, 돌봐주고, 사랑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돋아난다.[2] 예컨대 부모는 자녀를 귀여워하지만, 역으로 자녀가 부모를 귀여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어떤 동물들을 귀엽다고 여기지만, 동물들이 인간을 귀여워할 필요는 없다. 남성은 어떤 여성을 귀여워하지만, 여성이 남성을 귀여워하는 것은 어렵거나 어색하게 느껴지는 때가 많다.[3]


그런데 귀여워하는 마음은 쉽게 뒤집힌다. 가부장제 내에서 ‘적당히 순종적이며 애교를 부리는’ 여성은 귀엽지만, ‘드세고 정숙하지 못한’ 여성은 금세 혐오의 대상이 된다. ‘말을 잘 듣고 순수한’ 어린아이는 귀엽지만, 공공장소에서 보채고 칭얼대며 큰 소리로 우는 아이는 짜증을 유발한다. ‘주인’을 잘 따르며 악의 없는 행동과 사랑을 보여주는 반려동물은 사랑스럽지만, 쓰레기봉투를 뜯어버리는 고양이는 즉시 쫓아버려야 한다. 지하철이나 식당과 같은 공공장소에 들어와 똥을 싸는 강아지, 다리가 여럿 달린 곤충들은 더럽고 혐오스럽다. 이처럼 귀여운 것으로 표상되는 존재들은 ‘최고’였다가도 일순간에 낯설어지고, 자주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 귀여움은 단순히 그 대상을 사랑하고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으로만 생각될 수 없다.


귀여움은 분명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 위에서 성립된다. 그러나 이 구도에서 우위를 점한 이들은 종종 귀여워하는 행위가 ‘존엄하게 대하는’ 것이라는 환상에 빠지곤 한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이미 이런 만남이 내포하는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그는 현대 사회의 어떤 타자들은 여전히 낙인을 지니고 살아가지만, ‘낙인자’들이 언제나 배척당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선거철에 장애인복지관을 찾아가 목욕 봉사를 하며 ‘마음 따뜻해지는’ 장면을 연출하는 정치인이 좋은 예시이다. ‘정상인’으로서 정치인은 자신이 장애에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과시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친밀감을 드러낸다. 김현경은 이 사례를 통해 ‘정상인’들이 ‘낙인자’와 만날 때 낙인을 부정하려 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낙인이 인간 존엄성과 양립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라는 것을 설명한다.[4] 낙인을 부정하는 기만을 저지르는 것은 정치인뿐만이 아니다. 장애인에게 ‘슈퍼 불구’의 서사를 부여하며 뜬금없이 감동하거나,[5] 장애의 타자성과 복잡성은 외면한 채 멋대로 친밀감을 표시하며 자신의 ‘편견없음’을 과시하려 애쓰는 비장애인의 모습은 애쓰지 않아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기만은 ‘귀여워하는’ 행위에서도 발견된다. 모든 존재를 존엄하게 대우한다는 근대의 인간관을 학습한 이들은 아동과 동물을 마주할 때 감각되는 미묘한 자기모순을 외면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열렬히 귀여워한다.[6]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맘껏 귀여워하는 것을 ‘존엄하게 대하는’ 것과 등치시키면서 귀여운 존재들이 어떤 낙인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도려내어 버린다. 그러나 낙인을 부정하는 행위로서의 귀여움은 인간의 존엄성과 낙인이 양립하기 어렵다는 모순을 인지할 때 발현되는 것이며, 특유의 과시적인 수행으로 존엄을 가장할 뿐이다. 결국 누군가를 마냥 귀여워하며 자신이 상대를 ‘소중하고 존엄하게 대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찬탄을 가장한 경악스러운 대상화와 여성 혐오를 지적했을 때 “내가 여성을 얼마나 사랑하는데!”라며 발끈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자신이 편견 없는 사람임을 과시하는 행위는 ‘서로의 행위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대등하게 참여하여’ 구성하는 존엄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품격’을 위한 행위다.[7] 


귀여움이 어떤 감정이며, 어떤 권력 관계 위에 세워져 있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이를 외면한 채 귀여움을 찬미하는 것에만 몰두한다면 그것이 감추는 은밀한 폭력의 굴레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한국 사회는 점점 더 열성적으로 귀여움에 환호하면서도 아동과 동물이 숱하게 경험하는 혐오와 차별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의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기만적인 착각과 복잡함에서 달아나고 싶은 마음을 잠시 벗어두고, 귀여운 존재들을 최고라고 부를 때 어떤 차별과 혐오를 묵인해왔는지 들여다보려 한다.

 

 

아동: 귀엽지 않으면 쫓겨나는

 

아동은 몸짓과 행동 하나하나가 감동을 주는 존재로 표상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심지어 ‘나는 아이들을 좋아한다’,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식의 말을 당당하게 내뱉는 장면이 자주 목격되는데, 이처럼 아동의 특성을 본질화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개인의 ‘취향’으로 소비하는 일이 거리낌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어딘가 기괴하다. 이런 말이 다른 인구집단을 향해있다고 상상해보면 아동을 향하는 시선과 말들은 너무나 생경하게 다가온다. 예컨대 ‘나는 30대를 좋아한다’라거나 ‘나는 50대를 예뻐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이를 보기는 힘들다. 그런데 유독 아동기의 인간이 ‘마땅히 좋아할 만한지’ 심판받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김원영은 아동이 추상적이고 낭만적인 ‘이미지’로 예찬되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현실의 아동이 “귀엽고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울고, 소란을 일으키고, 먹고, 싸고, 부수는 생명”이라는 점을 말끔히 잘라낸다.[8]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고, 의존적이면서도 동시에 주체성을 가지며, 자주 소란을 피우기도 하는 아동의 모습은 소거된 채 귀여움의 표상으로만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아동의 귀여운 이미지만을 내세운 각종 영상은 “육성은 있되 돌봄은 없는 존재가 주는 귀여움의 쾌감”을 선사한다. 이런 쾌감에 이끌린 사람들은 프로그램을 열렬히 시청하고, 페이지를 구독하거나 ‘좋아요’를 누르는 아주 제한적인 형태의 ‘육성’에 참여한다.[9] 


티비와 유튜브 영상에 등장하는 아동들은 실제 생명의 축축함과 울퉁불퉁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처럼 아동을 ‘축축한 생명’이 아닌 ‘이미지’로 받아들이려는 사회에서, 아동은 온전히 환대받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동은 그저 어리고 순수하며 귀여운 존재일 때에만 환대받을 수 있는 “조건부 수용”의 대상이 된다. 아주 어리고 고분고분하던 아이가 좀 더 자라 초등학생, 중학생이 되면 ‘급식충’ 또는 ‘잼민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며 그들만의 언어나 행동이 수시로 조롱당하는 것은 ‘귀여움을 잃은’ 아동을 향한 시선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귀여움은 아동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 환대의 가능성을 만들어갈 수 있는, 그들에게 최소한으로 베풀어진 관용이다.[10] 따라서 사회가 베푼 ‘관용’으로서의 귀여움을 벗어나고 그 한계를 시험하려 들 때, 아동은 즉시 혐오스러운 존재이자 큰 죄책감 없이 멸시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아동의 복잡성을 용납하지 못하는 마음은 그들을 잠시 미워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몇 해 전부터는 특정 공간에서 아동의 출입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노 키즈 존은 ‘아동을 동반할 경우 입장할 수 없는 공간’으로, 2017년 이후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분주한 영업장에서 아동들이 안전사고에 노출될 위험이 크고, 소란을 피우거나 뛰어다니는 아동의 행위와 부모의 ‘방관’이 영업주와 다른 고객들에게 불편을 제공했다는 것이 주된 배경이었다. 노 키즈 존에 대한 논란이 거세질 무렵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응답자(93.1%)가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의 특정 행위로 인해 불편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이때 아이들이 소란을 피움으로써 침해되는 것은 ‘고객의 행복추구권’이라고 명명되었고, 사람들은 이것이 ‘아이의 기본권’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했다.[11] 다른 이들에게 ‘불편’을 주는 아동들을 내쫓는 일에 ‘다른 고객들의 행복추구권’이라는 거창한 수사가 동원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어린아이라면 응당 보일 수 있는 행동이 나머지 인구의 ‘행복’을 저해하는 일이라는 판단은 공공장소에서의 행복이 그것을 방해하는 – 즉 ‘통제되지 않는’ - 이들을 배제함으로써 성립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아동을 귀여운 이미지로만 소비해 온 사회가 실제 아동의 존재를 맞닥뜨렸을 때 얼마나 무자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노 키즈 존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자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를 ‘아동 및 아동과 동행한 성인에 대한 차별’이라고 판단하며, “영업상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식당주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손님들에게 아동 동반 보호자에 안전사고 방지를 위한 주의사항, 영업방해가 되는 구체적 행위를 제시하는 등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권고했다.[12] 그러나 여론은 여전히 노 키즈 존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고, 거리에는 ‘노 키즈 존’ 팻말을 자랑스레 내세운 카페와 식당이 가득하다. 아동에 대한 명백한 차별이라는 입장과 업주의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 아직까지 팽팽히 대립하고 있지만 ‘조용한 분위기’나 ‘감성 인테리어’ 따위를 자랑하는 곳이라면 노 키즈 존 지정이 불가피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안전에 대한 우려’를 내세우며 노 키즈 존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모인 공공장소에서 모든 위험과 불편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도 아동만이 ‘안전’을 핑계로 쉽게 쫓겨나는 것은 아동을 차별하는 것이 그만큼 간편한 일임을 방증한다.


김원영은 공적 공간이 언제나 장애인과 노인, 특정 인종을 쉽게 추방해왔으며 점차 “젊고, 건강하고, 세련된 행위 규범을 익힌 존재들만의 세계”가 되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13] 이때 김현경의 말처럼 환대가 도덕적 공동체 또는 사회 안으로 타자를 초대하여 그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면, “장소에 대한 권리”는 그의 ‘사람됨’, 즉 ‘성원권’에 대한 논의와도 맞닿아있다. 아이들의 귀여움에 환호하던 어른들은 ‘귀엽지 않은’ 모습을 참지 못한 나머지 제재를 가하거나 쫓겨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귀엽지 않은 행동을 하는 아동은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살포한다. 하지만 특정 장소에서 아동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불편’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당연하다는 듯 아동을 내쫓는 것은 “여기 당신을 위한 자리는 없”고 “당신은 이곳을 더럽히는 존재”라고 말하며 그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14] 



반려동물: 귀여워야만 살아남는


동물들의 귀여움 앞에서 사람들은 한술 더 뜬다. “귀여움이 세상을 구한다!”며 다른 이의 반려묘 또는 반려견 사진을 내놓으라고 종용하고, 누군가는 이에 화답하듯 반려동물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만을 똑 떼어다 여기저기에 올리며 ‘자랑거리’로 삼는다. 그리고 그 귀여움에 감격한 다른 사람들은 심장 통증을 호소하거나 “나만 고양이 없어” 하면서 엉엉 운다.


반려동물과 아동의 귀여움은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지만, 분명히 어떤 지점에서는 갈라진다. 아동은 영구불변의 정체성이 아닌 하나의 생애주기에 가깝다. 아동이 성인으로 ‘나아가는’ 중간적 상태라는 점은 그들을 향한 혐오를 유독 발견하기 어렵게 만드는 동시에, 그가 ‘통제’와 ‘훈육’을 거치고 나면 점점 거두어진다는 사실을 함축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려동물은 나이와 관계없이 귀여움을 받는다. 반면 인간이 귀엽다고 느낄만한 행동이나 성질과 외형을 가지지 못하면 ‘영원히 귀여울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인간은 스스로의 ‘동물성’을 제어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인간이 되어가는’ 존재다. 레비나스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도덕적 과오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육체에 내재한 동물성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수치심이란 도덕적 과오가 야기하는 감정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감추고 싶어 하지만 은폐할 수 없는 모든 것’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수치심을 스스로가 가진 동물적 특성이나 한계를 마주할 때 작동하는 것으로 본다.[15] 마사 누스바움도 미국 사회에서 퀴어 혐오가 발현되는 양상을 읽어내면서 비슷한 주장을 펼친다. 퀴어 혐오 세력은 동성애의 성행위를 ‘비위생적인 것’ 혹은 ‘건강하지 않은 것’으로 규정하는 전략을 취하며, 성소수자의 법적 권리에 대한 논의가 등장할 때마다 이를 적극적으로 발화한다. 누스바움은 이러한 흐름에서 인간이 특정 인구집단에 동물성에 대한 혐오를 투사함으로써 인간 관념을 ‘건강하고 위생적인’ 것으로 유지하려 한다는 점을 발견한다.[16] 


인간은 ‘동물적인’ 생존방식을 거부하며 이를 비인간 동물의 본질적 특성으로 환원시키고, 그와는 명백히 구분되는 ‘인간성’을 구축한다. 인간이라는 범주가 태초부터 동물성에 대한 혐오에 기초해서 성립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인간 사회는 스스로가 어쩔 수 없이 간직하는 동물적인 본능들을 다른 종과 명백히 구별되는 방식으로 제도화·질서화하면서 인간성을 지키려 애쓴다. 예컨대 인간의 화장실 사용과 음식 섭취, 성적 상호작용은 동물들의 배설, 호흡, 성(sex)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인 것으로 설정된다. 이처럼 동물성이 인간에게 수치스러운 것이자 ‘극복’의 대상이 될 때, 인간이 기피하는 형태의 동물성을 드러내는 개체들은 그 자체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동물적인 것을 멸칭으로 사용하는 일에 익숙한 이들은 아무 데서나 배설을 하거나 게걸스럽게 음식을 탐하는 동물들을 ‘비위생적인’ 동시에 ‘비인간적인’ 존재로 간주한다. ‘예절’을 지켜야 하는 공공장소에서 배설을 하고 시끄럽게 짖는 강아지는 신경을 곤두서게 하고, 공장에서 사육되며 배설물에 파묻힌 돼지와 소, 닭은 더더욱 혐오스럽다. 반대로 ‘주인’의 말을 알아듣고 순순히 공을 물어오거나 산책을 하러 가자고 애교를 부리는 강아지는 귀엽다. 이처럼 인간이 혐오하는 동물성 적당히 숨기고, 인간의 품 안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가 된 동물들은 영원히 귀여운 존재가 될 수 있다.


물론 한 차례 인간의 반려로 선택받은 동물들이 정말로 ‘영원히’ 귀여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다. 누군가는 이쯤에서 “나는 반려동물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한다”며 발끈할 수도 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인간 중심·혈연 중심의 원칙을 넘어 비인간 동물과 함께하는 다양한 가족 구성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2019년 기준 반려동물을 양육 중인 가구는 무려 28.2%이었고, 현재는 비양육 중이지만 경험이 있는 사람은 35.8%에 이르렀다. 세대와 가족 구성을 막론하고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가구가 증가하면서, ‘반려동물도 가족’이라는 인식도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경우가 많다는 통계만으로 ‘반려동물에게도 동등한 가족 구성권이 주어지고 있다’고 섣불리 결론지을 수는 없다. 여전히 펫샵 등을 통해서 반려동물을 ‘사는’ 경우가 많고(32%), 버려지는 동물의 수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17] 


인간의 가족으로 선택받은 후에도 동물들은 ‘귀여움’을 잃지 않아야 한다. 같은 조사에 따르면, 반려동물을 기르는 이유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동물을 좋아해서’(56.4%), ‘또 하나의 친구/가족을 갖고 싶어서’(36.7%)였다.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서’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경우도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었다. 반면 양육을 중단한 사유로는 ‘키울만한 환경이 되지 못해서’(50.3%), ‘관리가 힘들어서’(24.6%), ‘비용이 많이 들어가서’(14.5%)인 것으로 나타났다. ‘귀엽고’ ‘좋아하니까’ 함께 살기로 했다가도 기대와 다른 모습과 현실을 마주하게 될 때는 얼마든지 다시 가족의 울타리 밖으로 밀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반려동물과의 생존이나 그와의 관계보다도 사람의 편의가 우선하는 상황은 ‘외로움을 채우고 싶은’ 인간의 욕구를 투사하여 동물들을 도구화한 결과이다. 관계 맺음의 여러 측면 중에서도 기쁨과 행복만이 강조되면서, ‘반려동물과 가족 되기’에서 생각해야 하는 다양한 고민은 탈각한 채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를 원하는 인간의 욕구만이 지나치게 강조되어왔음은 자명하다.


한편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로서의 동물을 갈망하는 인간들에게 ‘포획’은 귀여움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그 차이는 우선 ‘반려’인 동물과 ‘반려가 아닌’ 동물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나의 반려동물은 귀엽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반려동물은 적당한 통제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면서 보호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작고 소중한 존재이자 변함없이 애교 어린 행동으로 반려자를 위로할 수 있는 존재다. 한편 ‘나의 반려’가 아닌 동물들을 공공장소에서 마주치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 된다. 상술한 것처럼 ‘비위생적’이고 ‘비인간적’인 행동을 보이는 동물들은 많은 인간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데, 이는 ‘노 펫 존(no pet zone)’을 지정하거나 지하철 등의 교통수단에 반려동물 탑승을 금지하는 조치로 나아가기도 한다. 결국 동물의 귀여움은 특정한 종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인간에 의해 양육되고 통제되는 방식으로 포획되어있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예컨대 ‘두렵고 무서운’ 동물인 사자나 곰도 동물원에서 잘 훈육된 모습으로 마주하는 경우에는 귀엽게 여겨질 수 있다. 반면에 인간이 쉽게 통제하거나 기를 수 없는, 커다란 뱀이나 야생의 맹수들은 가장 ‘귀엽지 않은’ 존재가 된다. 그들은 카카오톡 이모티콘 창에서 실제보다 훨씬 큰 머리와 지나치게 축소된 몸, 최대한 귀여운 형태로 왜곡된 이목구비를 가진 모습으로 등장할 때에나 귀여워질 수 있다.


한편 인간의 포획은 동물이 어떤 ‘대접’을 받느냐의 문제를 넘어, 그의 생존을 결정짓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반려동물로서의 고양이와 길고양이가 경험하는 삶의 차이에서 이런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반려동물로 길러지는 고양이들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표상되는 반면 길거리에서 시끄럽게 울며 자꾸만 쓰레기봉투를 뜯어놓는 길고양이는 많은 이들의 화를 돋우는 골칫덩어리다. 이들은 길거리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조차도 ‘어쩔 수 없는 죽음’으로 치부되어 쉽게 외면받는다. 최근 몇 년 사이 굶주린 길고양이들에게도 돌봄을 제공하며 그들을 ‘사랑해주는’ 이들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길에서 살아가는 고양이들은 여전히 많은 위험을 맞닥뜨리며 살아가야 한다. 배고픔과 학대, 죽음의 위험에 상시적으로 노출되는 길고양이들에게는 소수의 다정한 인간들에게 선택받고 양육되는 행운이 따르는 것만이 가장 안전한 삶의 형태가 된다. 이처럼 동물들을 귀여워하고 돌봐주는 인간의 행위에 따라 한 종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반려동물 천만 시대’에도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쉽게 무력화될 수 없는 거대한 위계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반려동물이 될 수 있는 존재는 한정적이다. 비인간 동물은 인간이 포용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다종다양하지만, 인간의 반려로 상상되는 것은 주로 개와 고양이다.[18] 그 이외의 종들 - 소나 돼지와 같은 동물 - 은 반려동물로 언급되지도 않을뿐더러, 개나 고양이와 별다른 바 없이 (혹은 훨씬 더)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더라도 이들을 기꺼이 ‘기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처럼 인간이 느끼는 귀여움, 또는 측은지심으로 어떤 생명체를 사육하며 통제하는 것은 푸코가 말한 ‘생명권력(bio-power)’의 한계이기도 하다. 생명권력은 “살게 만들거나 죽음 속으로 쫓아내는”, 또는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한인데, 이때 생명은 ‘내버려 두는’ 대상이 아닌 ‘만들기’의 대상이자 권력이 관여해야 하는 요소가 된다.[19] 강압적으로 지배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방식의 권력은 아니지만, 생명권력은 누군가를 양육하고 보호하고 ‘케어(care)’하는, ‘모성적 차원’을 내포하는 사목적인 형태로 작동한다.[20] 즉 인간은 마땅히 ‘귀여워하고 사랑할 수 있는’ 비인간 동물을 유아 또는 새끼의 형태로 규정하며 기르고, 보호하고, 사랑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귀여움’을 넘어선, 축축하고 울퉁불퉁한 만남을 위해

 

누군가를 ‘귀여움’ 속에 구겨 넣으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그 테두리에서 삐져나온 모습들을 어색하게 여기고 심지어는 혐오하게 만든다.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마음들 사이에서 귀여운 것들은 사랑과 애정이 묻은 말들로 칭송되다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쫓겨나고, 혐오의 대상이 되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괴리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살펴보았다.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들은 저마다 복잡하고 다층적인 모습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타자와의 만남은 언제나 지난한 충돌과 분열을 동반하는 것이며, 그 과정과 결과는 예측 불가능하다. 귀여운 존재들이 ‘복잡한 타자’의 모습을 보일 때 쫓겨나고 버림받는 일이 반복되어 온 것은 그들의 타자성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한 상상이 절대적으로 부재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리는 귀여운 대상으로만 간주하고 싶은 존재들의 타자성을 발견할 때 그들을 내쫓고 혐오하여 긴장을 유보하는 방식으로 납작한 형태의 만남을 지속해 온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존재의 귀여움을 찬탄하며 영원히 사랑할 것이라고 믿는 태도를 단호히 거부하고, 그것에 함축된 혐오와 배제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귀여운 것이 언제나 ‘최고’일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 시선을 해체하려는 과정이 동반될 때에만 이전과 다른 새로운 만남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노력들 끝에서, 사회를 함께 구성하는 타자로서의 아동과 동물이 지니고 있는 복잡한 면면을 받아들이고, 이때 마주하는 분열과 충돌을 기꺼이 함께 겪어내는 축축하고 울퉁불퉁한 만남이 시작될 수 있기를 바란다.  




편집위원 아리 (ououpp@naver.com)



[1] 이 글에서 ‘동물’은 인간을 제외한 비인간 동물들을 칭한다.

[2] 김홍중, 2009,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69~70쪽.

[3] 최근에는 전통적인 남성성/여성성을 해체하는 다양한 시도 안에서 이런 경향이 변화하고 있지만, 이전까지 많은 남성들은 자신이 ‘귀엽다’는 사실을 칭찬보다는 모욕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4] 김현경, 2015,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122~123쪽.

[5] 장애는 사회적인 구성물이나 정체성으로 이해되기보다는 개인의 비극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미디어는 차별과 억압을 ‘이겨내고’ 장애를 ‘극복하는’ 서사를 강조하며 이런 시선을 적극적으로 강화해왔다. 장애 운동가와 연구자들은 장애인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감동적이고 영감을 준다고 멋대로 간주하는 것을 “슈퍼 불구” 서사라고 칭한다.

[6] 아동과 비인간 동물은 김현경이 말한 ‘낙인자’ 개념의 조건을 완벽히 충족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귀여움’이 분명한 권력 관계 위에서 작동하는 것이며, 후술하겠지만 ‘귀여운’ 존재들이 낙인이라 부를만한 취약성과 약자성을 지닌 존재임을 고려한다면 김현경의 논의를 적용할 수 있다.

[7] 김원영, 2018,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파주: 사계절, 65~71쪽.

[8] 김원영, 2019, 「낭만적 예찬을 넘어서 – 이미지 시대의 아동을 생각하다」, 『창비어린이』, 64호, 32쪽.

[9] 김원영, 위의 책, 33쪽.

[10] 김현경, 앞의 책, 125~126쪽.

[11] 김도균, 유보배, 2016, 노키즈존 확산, 어떻게 볼 것인가?. 이슈&진단, (221), 5-11.

[12] 여성국, 2017, “쫓겨나는 아이들... 인권위 노키즈존 차별 지적했지만 논란 계속”, 중앙일보, 접속 일자 2021.06.12., https://news.joins.com/article/22162814.

[13] 김원영, 2019, 앞의 책, 34쪽.

[14] 김현경, 앞의 책, 285쪽.

[15] 김홍중, 앞의 책, 67쪽.

[16] 마사 누스바움, 2016, 강동혁 역, 『혐오에서 인류애로: 성적지향과 헌법』, 뿌리와이파이

[17] 윤덕환, 채선애, 송으뜸, 이진아. (2019). 반려동물 양육 경험 및 인식 조사. 리서치보고서, 2019(12), 1-30.

[18] 앞서 언급한 윤덕환 외(2019)의 조사에 따르면 양육 경험이 있는 반려동물은 개(79.5%), 금붕어/열대어(35.3%), 고양이(27.8%), 햄스터(25.0%) 등으로 나타났다.

[19] 진태원, 2006, 「생명정치의 탄생 – 미셸 푸코와 생명권력의 문제」, 『문학과 사회』, 19(3), 220.

[20] 김홍중, 앞의 책,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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