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리기] 편집위원 곤지
소설 「눈 속의 에튀드」는 ‘북극이 아닌 곳’에서 ‘북극곰’으로 존재해야 했던 북극곰 삼대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들의 이야기는 자신에 의해 직접 전달되거나 서커스 조련사의 손을 빌려 서술되기도 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지적인 누군가에 의해 쓰이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북극곰들은 자신의 언어를 갖기도 하고 잃기도 하지만 결국 할머니 북극곰 – 딸 북극곰 토스카 – 손자 북극곰 크누트로 이어지는 삶의 흐름은 인간사회에서 이들이 점차 언어를 박탈당한다.
작품의 제목이 되는 ‘에튀드’는 연습곡을 지칭할 때 주로 쓰이지만, 견습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할머니 북극곰은 서커스 곰으로 매일 다른 공연을 연습하길 요구받았고, 딸 토스카와 손자 크누트 역시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전시된 동물로서 관중의 환호를 끌어내는 연습을 거듭한다. 이들은 생애에 걸쳐 ‘야생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어려운 무대예술을 익히는’[1] 법을 요구받는 견습생이었다. 지구의 북쪽 끝에서 온 새하얗고 거친 최상위 포식자가 위대한 인간에 의해 길들고, 복종을 약속하며, 재롱을 피우는 것은 인간의 주요한 오락거리였다. 동시에 그들이 여전히 길들지 않은 자연의 모습, 태초의 본능을 발산하는 것은 이 오락에 스릴과 정복감을 더해주었다. 북극곰은 ‘인간처럼’ 자전거를 타고 뜀틀을 넘길 요구받았지만, 동시에 절대 인간이 될 수 없는 영원한 타자이자 종속적 존재임을 확인받았다. 북극곰들은 인간이 던져주는 얼음덩어리에 의지하여 어렴풋이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을 떠올렸다. 극도로 예민한 사냥꾼으로서의 감각과 ‘머리끝부터 내밀한 곳까지 두꺼운 털로 덮인’ 이들의 몸은 사계절이 있는 인간들의 나라에서 늘 고통과 불편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들은 따뜻한 나라에서 숨 쉬도록 강제되었고 세발자전거를 달리도록 훈육 받았으며 동시에 ‘북극곰’일 것을 요구받았다. 이들은 애초에 인간사회에서 절대 완성될 수 없는, 그 자체로 자신일 수 없는, 평생에 연습곡만을 연주할 수밖에 없는 견습생이었다.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이상한 느낌을 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주로 의견을 외부로 전달하기 위해서 언어를 사용했다.
이제 언어는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안에 부드러운 부분을 건드린다.
마치 내가 뭔가 금지된 것을 하는 기분이었다. ”[2]
할머니 북극곰은 한때 소련 서커스단의 유명한 곡예사였지만, 이후에는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서전을 쓰는 작가가 된다. 할머니 북극곰은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감으로써 타자에 의해 만들어졌던 기억을 자신의 감각들로 재배열하는 데 성공한다. 글은 내면의 발화인 동시에 세상을 향한 발화다. 그러나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질 때 그녀는 다시 목소리를 빼앗긴다. 출판사는 그녀를 다시 독자들을 위한 오락거리로 대상화하고 그녀의 글을 상업화하여 ‘쓴다’는 행위를 착취하고자 한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교묘하게 속이려는 인간들과 ‘관대함을 팔아서 그녀를 조종하려는’ 인간들에게서 벗어나, 추운 나라로 망명을 신청한다.
“나는 ‘손잡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렇다, 나는 내 운명을 조종할 수 있는 손잡이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내 자서전을 계속 써야 한다. 내 자전거는 바로 내 언어다.
지나간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일어날 모든 것에 대해 쓸 것이다.
내 삶은 내가 글로 고정시킨 그대로 흘러갈 것이다.”[3]
할머니 북극곰은 어느 나라에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녀에게 글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회고가 아니다. 그녀에게 글쓰기란, 착취당한 기억을 증언하며 잃어버린 주체성을 되찾고, 내면의 자신을 마주하는 행위이자 존재의 선언이었다. 이는 챕터의 마지막까지도 드러나지 않는 그녀의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녀는 삼대 중 유일하게 자신의 언어를 가진 개체인 동시에 유일하게 어떠한 이름으로도 명명되지 않는다. 대개 이름을 갖는 것들은 존재를 증명받고, 정체성을 확보하지만, 북극곰 삼대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인간에 의해 호명되던 토스카와 크누트는 오히려 자신이 스스로 존재를 정의할 기회를 강탈당했다. 이들의 부자유를 떠올려볼 때, 다른 존재에 의해 명명되거나 호명되지 않았던 할머니 북극곰은 역설적으로 가장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존재였음을 암시한다. 할머니 북극곰은 인간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언어’를 가진 존재이지만 비인간동물의 몸을 가진 비인간동물종으로서 인간사회 어디에서도 환대받지 못한 삶을 살았던 경계적 존재다. 따라서 할머니 북극곰의 이름 없음은 인간사회와 자신의 고향 그 어디에도 편안히 안착할 수 없었던 경계적 정체성에 대한 비유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이제까지 아무도 들어설 수 없었던 그 영역에 이미 들어가 있었다.
그곳, 그 어둠 속에서는 다양한 언어들의 문법이 그 색깔을 잃고 서로 녹아들어 섞이고 다시 얼었다가 바다 위에서 떠돌다가 바다에서 돌아다니는 유빙이 되었다.
토스카와 나는 단둘이 같은 유빙 위에 앉아 있고 토스카가 나에게 하는 모든 말을 다 이해했다.
우리 옆에는 밍크와 눈토끼가 같이 앉아서 수다를 떠는 유빙도 하나 떠다니고 있었다. ”[4]
할머니 북극곰이 낳은 딸 토스카는 서커스 극단 소속의 곰이 된다. 극단의 인기 있는 맹수조련사 바바라는 토스카와 파트너가 되어 그녀를 훈련한다. 사실 바바라는 실력있는 조련사지만 가족과 극단 모두에게서 소외된 존재다. 그녀 주위의 남성들은 그녀를 착취하거나 소진시킬 뿐, 그녀의 욕망과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다. 바바라는 남성들의 고압적인 태도와 무관심 속에서 말을 할 수 있음에도 ‘말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녀는 언어를 박탈당한 절망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꿈을 꾸는 초현실의 시공간에 들어선다. 바바라는 이곳(꿈)에서 토스카와 만나게 되고, 이들 사이에는 문법화된 언어가 오가지 않지만,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곳에서는 ‘인간의 언어’라는 수단을 거치지 않고도 감각적으로 서로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고, 마침내 서로의 존재에 대한 포옹이 가능해진다. 아무도 들어설 수 없는 영역, 오직 두 개체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 영역 안에서 바바라와 토스카는 깊은 연결감을 느낀다.
“나는 각설탕을 자기 혀 위에 올려놓는 바바라의 손가락을 보자 신경이 예민해졌다.
이 순간에 우리가 내내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이 드디어 완전히 분명해졌다.
나는 바바라 아주 가까이에 서서 내 위치를 눈에 띄지 않게 수정했다.
나의 목은 어깨에서 자라나고 나의 혀는 앞으로 내밀어져 바바라의 입속에서 각설탕을 끄집어냈다."[5]
초현실적 시공간에서 깊은 존재론적 연결을 경험하는 바바라와 토스카는 이후 서로를 온전히 신뢰해야만 가능한 무대를 선보인다. 이들 언어 없는 두 존재는 ‘죽음의 키스’라는 무대를 공연하며 서로에게 입을 맡기고, 각설탕을 나눈다. 이들이 입을 맞출 때, 언어를 주고받는 기능을 가진 지극히 인간적인 입은 사라지고, 종을 횡단하는 연결, 존재와 존재의 결속을 만드는 입만 남겨진다. 해러웨이는 말한다. “우리는 금지된 대화를 나눠왔다. 우리는 입으로 정을 통해 왔다. 우리는 구성적으로 본바탕이 반려종이다. 우리는 서로를 살 속에 만들어 넣는다. 서로 너무 다르면서도 그렇기에 소중한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지저분한 발달성 감염을 살로 표현한다. 이 사랑은 역사적 일탈이자 자연문화의 유산이다.”[6]이들의 키스는 언어를 박탈당한 존재들이 서로를 깊이 위로하는 존재론적 포옹이자 언어보다 먼저 지각되는 소통의 감각이다. 또한 여성과 자연에 대한 뿌리 깊은 타자화와 차별적 낙인에 대한 ‘역사적 일탈’인 것이다.
“흔히 동물은 본능적인 욕구에 순응하면서 먹을 것을 찾고, 자손을 남기며 자연스레 죽어갈 수가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도 의문입니다. 올여름 전 유럽의 인기를 모은 북극곰 크누트는 냉전의 희생자로 어미 곰이 동독의 서커스에서 사용되면서 노이로제에 걸려 새끼를 돌보지 않게 되자 북극곰 새끼로는 처음으로 인간의 손에 의해 길러졌습니다. 무엇보다 얼음 없이는 살 수 없는 동물인 까닭에 지구 온난화를 멈추게 하려는 캠페인의 상징으로서 정치가들도 크누트를 보려 방문을 하는 등 역사적, 정치적 콘텍스트 속에 살고 있습니다. 동물에게 ‘자연’이라는 이미지를 투영하는 것이야말로 동물이 자연이 아니라는 증거겠지요.”[7]
한편 토스카의 아들 크누트는 동물원에 전시되고,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간들의 마음대로 냉전 시대 화합의 상징으로 소비된다. 그러나 무언가의 상징이 된다는 것은 보편성을 획득하는 대신 다채롭고 입체적인 유일한 개별 주체가 되는 것을 좌절시킨다. 크누트는 이름을 얻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고유성을 상실한다. 크누트의 이름과 외형을 본떠 만든 굿즈가 판매되고 신문에는 연일 그의 몸동작 하나하나가 보도되지만 그 안에는 복제되고 모방한 크누트만 있을 뿐, 좁은 공간에 갇혀 사육사가 자신을 보러오기만을 기다리며 외로워하는 진짜 크누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때 크누트는 실재적 존재로서 한 개체가 아닌 화합의 상징, 자연의 이미지, 귀여운 북극곰과 같이 인간들이 제멋대로 언어화하는 살아있는 허상으로 소비된다. 결국 사육사도 찾아오지 않고 더 이상 관람객들도 관심을 두지 않는 어느 동물원의 골방에서 유리창을 통해 날리는 눈을 바라보는 크누트의 모습으로 소설은 막을 내린다.
“인간적인 것 너머에 있는 존재들과 우리가 맺는 관계에 주목할 때
우리는 인간적인 것에 관한 우리의 잘 정돈된 답들에 의문을 던지게 된다.”[8]
이들 북극곰 삼대의 삶은 인간들에 의해 고통받지만 사실 소설은 이들의 고통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간에 의해 관찰되고 쓰이는 일방적 서술이 아닌 북극곰의 눈으로 인간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의 전복을 꾀하면서 독자들이 인간을 하나의 낯선 종으로 감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책의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당신은 인간임이 부끄러워질 것이다) 또한 그 속에는 이들 북극곰이 찾아내는 생의 기쁨과 의미, 매번 좌절되지만 그런데도 삶에 거는 기대, 눈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과 욕망이 얽혀있다.
우리는 너무나 인간이어서 매번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를 존재 그 자체로 상상해내는 데 실패한다. 동시에 세계를 더 정확하게 목격할 기회를 놓치고 있다. 그러니 이 당연한 이야기를 기억하길 바란다. 사실 북극곰은 어느 음료 기업의 로고로 존재하지 않는다. 귀엽고 불쌍한 자연의 상징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기업광고나 신문지가 아닌 어떤 곳에서 각자의 생을 살고, 각자의 방식으로 소통한다. 놀랍게도 그들은 숨쉬고, 살아있고, 욕망하고, 응시하는 존재이다!
편집위원 곤지(yonzgonz@gmail.com)
[1], [2], [3], [4], [5] 다와다 요코,「눈 속의 에튀드」, 현대문학, 2020
[6] 도나 해러웨이,「해러웨이 선언문」, 책세상, 2019
[7] 서경식, 다와다 요코,「경계에서 춤추다」, 창비, 2010
[8] 에두아르도 콘,「숲은 생각한다」, 사월의 책,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