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리기] 편집위원 물결
1.
살아있는 돼지를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새삼스레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자신을 비건이라 부른지 2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매일 엄청난 숫자의 돼지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회를 손가락질하면서도 막상 그들을 마주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건 대체로 내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고통에 찬 그들의 얼굴을 똑바로 보려고 노력하지 않아서, 나는 꽤 속 편하게 비건으로서의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나는 동물을 위하는 사람이라고 계속해서 스스로를 위안해왔다.
돼지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것은 작년 여름이었다. 서울 애니멀 세이브(Seoul Animal Save)에서 주관하는 비질(vigil)에 참여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비질은 공장식 축산의 폭력을 증언하기 위한 직접 행동으로, 참여자들은 도축되기 직전의 동물들에게 물과 음식을 나누어 주고 그들의 마지막을 지키게 된다. 그날의 비질은 경기도 화성시 외곽에 위치한 어느 도축장에서 이른 아침부터 열렸다. 잠시 당시의 기억을 되짚어 본다.
대략 아침 8시가 되니 도축장 밖에 돼지들을 꽉꽉 밀어 넣은 2층 트럭들이 하나둘씩 도착했다. 서울, 경기, 충북... 번호판을 보니 2-3시간가량을 비좁게 달려왔을 것이다. 생전 본적이 없는 돼지의 수에 잠시 압도되었다가 어떤 소리가 귀를 뚫고 들려왔다. 고통에 찬 울음. 서로의 무게에 짓눌리고, 차 안을 가득 메운 열기에 질식하는 돼지 몇백 마리가 동시에 내지르는 소리. 가까이 다가가니 독한 냄새가 코를 비집고 들어왔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처리되지 못한 채 잔뜩 섞여버린 오물, 그 오물을 뒤집어썼다가 피부가 짓무른 곳에 차오른 고름, 장시간의 이동으로 인한 구토가 한데 모여 나는 냄새. 물과 음식을 건네면 배고픔에 정신없이 달려들거나 그럴 힘조차 없어 바닥에 그저 쓰러져있었다.
그런 끔찍한 소리, 냄새 사이로 보이던 얼굴들을 기억한다. 그 얼굴 구석구석은 내가 전혀 알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돼지라면 필히 갖고 있을 몸통에 비해 짧은 다리, 몽탕하게 말린 꼬리 같은 대강의 형태 말고, 각각의 눈, 귀, 주름들 말이다. 돼지라는 종(種)에 가려져 있던 구체적인 얼굴들이 그제야 보였다. 트럭들이 차례대로 도축장에 들어갔다가 몇 분이 지나 텅텅 빈 채로 다시 도로에 나왔다. 나는 내가 방금 누구를 떠나보냈고, 무엇을 목격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로 꽤 오래 멍하니 서 있었다.
2.
그날 이후 나는 비질에서 본 돼지의 얼굴, 표정 같은 것들을 자주 떠올렸다. 아니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그게 맞는 것 같았다.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어떤 모습으로 누워있었는지 같은 크고 작은 형태들을 최대한 머릿속에서 붙잡으려 했다.
물론 기억은 언젠가 닳아 없어지기 마련이다. 1년이 넘게 흐른 지금 나의 기억 속에선 그날 무더위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돼지들의 얼굴이 흐릿하다. 언젠가 주워들은 한 동물권 활동가의 말이 떠오른다. “도살장이 집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잔인함을 목격하고 그 비명소리를 듣게 되면 절대 쉴 수 없겠죠.” 정확한 복기는 아닐 수 있다. 앞뒤 맥락도 뚜렷하게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왜인지 저 문장이 지닌 절박함이 종종 떠오르곤 한다.
동물의 고통은 인간의 말로 전해지지 않는다. 아픈 인간은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 그러나 동물의 고통은 몇 개의 문장으로 붙잡아둔다 해도 금세 이해로부터 달아나버린다. 남은 선택지는 상(象), 소리, 냄새 같은 것들로 그 고통을 끊임없이 가늠해보는 것뿐이다. ‘도살장이 집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이 갖는 절박함도 이러한 한계에서 비롯하는 것일 테다. 어떤 상-소리-냄새를 힘겹게 이어붙인 기억을 기어코 잊지 않고 싶은 마음. 인간은 그저 동물을 대신해서 말할 뿐이라는 한계가 인간과 동물 사이를 가로지른다.
3.
즉, 동물은 인간의 말을 가지지 못한 타자로 여겨진다. 도나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해러웨이 선언문』, 2019)에서 에코 페미니스트 바버라 노스케를 따라 동물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SF에 나오는 ‘다른 세계’를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들의 말마따나 동물의 고통은 인간의 말로 들려오지 않는, 이종(異種)의 것이다.
다시 비질로 돌아가 본다. 동물, 고통, 동물의 고통... 내가 그날 본 것 중 확신에 차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지만, 한 가지만큼은 또렷하게 보인다. 바로 동물의 고통을 피부에 가깝게 느끼고 감각해야한다는 요청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 말이다. 점점 세련화하는 공장식 축산 시스템. 이 시스템이 뇌관이 되어 퍼지는 전염병. 그리고 그것이 악순환이 되어 다시 촉발되는 살처분. 이 비참한 현실은, 지금 이곳에 인간과 동물이 함께 존재한다는 새삼스러운 진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다른 종의 고통을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제대로 전할 수 있기나 한 걸까? 우리가 그들로부터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물론 한 마디도 없다. 그러나 지금도 갇히고, 맞고, 떨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동물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그들은 잘 보이고 들리지 않지만, 분명 우리의 곁에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인간과 동물이 서로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는 한계에 좌절하는 대신, (어디선가 읽은) 이런 문장을 떠올리고 곱씹고 싶다. “결국 우리가 간직하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뿐이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뿐이요,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배우는 것뿐이다.” 우리가 배우는 것, 이해하는 것, 그리하여 사랑하는 것을 모조리 바꿔놓을 때, 비로소 ‘다른 세계’가 보이고 들릴 것이다.
이것이 내가 돼지의 얼굴을 마주하며 배운 한 가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