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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5호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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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Oct 14. 2021

동물 動物: 동물 쓰기

[헤아리기] 편집위원 퓨

[원제목] 동물 쓰기: 동시대 한국 시 속 파편적 동물 이미지 목록


동물 쓰기

 의도적인 맥락의 제거는 실험적, 통제적 조건이라는 새로운 맥락의 부여와도 같습니다. 또는 그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코 제거될 수 없는 맥락을 새삼 깨닫게 만들기도 하죠. 시의 형식과 언어는 지금껏 우리가 본 적 없는 맥락의 능청스러운 재조직에 유용한 도구입니다. 그렇다면 시가 동물에 관해 말하거나 동물로서 말하거나 동물을 경유해 말하는 방식으로 쓰일 때 외부의 맥락들은 어떻게 요동칠까요. 나희덕은 비유나 상징, 의인화된 표상으로서의 동물을 그려내던 이전의 경향과 달리 2010년대 이후로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론을 바탕으로 사회문화적 접근이나 생태적 관점을 보여주는 동물시”들이 다수 창작되기 시작했다고 진단하며, 2019년과 2020년에 차례로 출간된 반려견, 반려묘에 대한 앤솔로지 시집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와 『그대 고양이는 다정할게요』를 그러한 움직임의 단적인 징후로 제시합니다.[1] 그렇게 동시대 한국 시들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동물을 둘러싼 우리의 관습을 계속해서 계승, 거부, 변형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열된 몇 개의 구절과 조각들은 그 시도의 일부입니다. 인용되지 않은 부분의 시 전문이나 시집 전체의 분위기, 시인의 창작 스타일 등을 고려하지 않는 방향의 시 소비, 이를테면 SNS를 통해 떠도는 짧은 감성 글귀의 일종으로 시를 ‘전락’시키는 활용은 분명 자주 비판받아왔지만, 그럼에도 텍스트 자체로 뚝 떨어진 시들이 어느 곳을 향하는지 들여다보는 일은 새로운 독법의 가능성도 품고 있습니다. 여기에 단편적으로 나열된 사례들은 그저 거대한 흐름 속을 떠다니는 파편들의 아카이브일 수도, 맥락의 의도적인 삭제를 통해 새로운 맥락을 상상케 하는 표지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무엇도 아닐 수 있고요. 목적은 맥락의 응시. 동물 쓰기를 통해 나는 어디까지 나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가, 인간은 어디까지 인간을 내려놓을 수 있고 세계는 어디까지 세계를 벗어던질 수 있는가, 그것이 질문입니다.



동물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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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사람이었다면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십육 미터의 거대한 오리를 보며

자꾸 귀엽다고 말하고 있어


황인찬, 「조건과 반응」[2] 中

-

 네덜란드의 예술가 플로렌타인 호프만은 2007년부터 톨로(TOLO) 사의 노란 고무 오리 인형 러버덕을 거대한 사이즈로 제작해 도시 공간 한복판에 설치하는 러버덕 프로젝트를 진행해왔습니다. 2014년 10월, 서울 석촌호수에도 16.5m의 거대 오리가 한 달 동안 모습을 드러냈죠. 개를 화자로 내세우는 황인찬의 시 「조건과 반응」은 “커다란 고무 오리를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한 “호수공원 옆의 까페”를 묘사하는데, 이 장면은 러버덕이 설치된 석촌호수의 풍경을 자연스레 떠오르게 합니다. 화자의 반려인으로 추정되는 ‘너’는 “그냥 창밖의 오리를”, “아니면 오리를 보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며 울고 있습니다. 그 울음의 이유를 궁금해하며 ‘너’를 부르자 “너는 슬픔과 다정함이 구분되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쓰다듬어” 줍니다.

 한편 이 풍경에 존재의 일부를 걸치고 있는 “옆 테이블의 남자”는 슬픈 얼굴로 말합니다. “개는 너무 슬픈 동물이야”, “자꾸 뭘 바라잖아, 사람 얼굴을 보면서……”, “자기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게 너무 슬프다고……”. 화자는 “그의 말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개는 “맛있는 음식, 따뜻하고 안전한 집, 마음껏 뛰기와 힘껏 물어뜯기,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건네는 칭찬” 외에 “많은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박동억은 동물을 그려낸 황인찬의 시들이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이해의 충동으로 묶는다”고 파악하며 「조건과 반응」에서 “인간은 개가 바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울상을 짓고, 개는 인간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너를 부른다’”고 씁니다.[3] 그러나 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해석과 달리, 시 속 남자가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이미 개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개보다도 자신이 더 잘 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정작 개는 스스로가 구체적으로 뭘 원하는지도, 그렇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도 확실히 알고 있는데 말이죠.

 타자의 속내를 함부로 짐작하지 않는 태도는 인간이 아닌 개가 더 잘 체화한 것처럼 보입니다. ‘너’와 옆 테이블의 남자, “십육 미터의 거대한 오리를 보며 자꾸 귀엽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둘러본 후 황인찬의 화자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내가 사람이었다면/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개가 진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개를 안다는 듯 굴고 러버덕이 말짱히 살아서 세상에 발 딛고 있는 동물의 형상을 본뜬 모습이란 것도 잊어버린 채 거대한 고무 조형물이 자꾸 귀엽다고 말하는 인간들과는 다르군요. 종을 뛰어넘는 상상력의 가능성일까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것은, 인간인 시인이 되어본 적도 없는 개의 속내를 어떻게 알고 이런 시를 썼을까 하는 것입니다.



동물 옹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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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구경하는

군중 속으로 비둘기가 날아들었는데

모두 욕을 하며 피했어 간혹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었지


모두가 춤을 추는 계절이 지나고

비둘기는 예전과 다르게 읽힌다


홍지호, 「왈츠」[4]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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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왈츠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작품번호 1번 비둘기 왈츠(Täuberln-Walzer op.1)는 츠바이 타우벤(Zwei Tauben, 두 마리 비둘기) 정원에서 초연되면서 그 이름을 갖게 되었고, 이는 초연 장소의 이름을 딴 수많은 비엔나 왈츠의 시초가 되었습니다.[5] 실제 비둘기를 상정하고 작곡한 곡은 아닐 테지만, 경쾌하고 우아한 선율을 듣는 감상자에게 어쩐지 원을 그리는 두 마리 새의 몸짓을 떠오르게 하는 것은 표제음악의 숙명이겠지요. 여기에 홍지호의 시 「왈츠」의 장면을 겹쳐 봅니다. 이 시는 “한 발자국도 확신할 수 없”는 얼어붙은 강을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누구도 “얼음의 두께를 의심하지 않”으며 “모두가 얼어붙은 강을 건너고 있”는 여기, “두 사람이 원을 그리는 춤”인 왈츠를 추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춤을 구경하는 군중 속으로 비둘기가 날아들”자 “모두 욕을 하며 피”하는군요. “간혹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습니다.

 홍지호는 “요즘 사람들이 비둘기를 읽는 방식은/시나브로 슬프게 읽”힌다고 씁니다. 평화를 상징하는 새 또는 반가운 소식을 전하는 새와 잘 날지도 않고 거리를 배회하는 거무튀튀한 새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는 세상입니다. 비둘기는 츠바이 타우벤 같은 이름을 소유할 만큼의 권리를 지닌 정원의 합당한 주인 또는 손님이 아니라 그저 반갑지 않은 불청객, 해로운 골칫덩이로 여겨지게 된 지 오래죠. 그러나 길가의 비둘기를 몸서리치며 혐오하는 사람들, 어떤 동물들이 ‘인간이 소유한 공간’을 함부로 침범하기라도 한 듯 여기며 몰아내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정말로 우리에게 저들을 쫓아낼 권리가 있나? 분명 “비둘기는 누군가의 맘에 들기 위해/태어난 적이 없”을 텐데요.

 「왈츠」가 실린 시집 말미의 해설에서 박혜진은 강의 흐름을 역류하며 강을 ‘건너가는’ 행위와 달리 “원을 그리는 왈츠는 강의 흐름에 따라 더 멀리 흘러가는 움직임에 가깝”다고 씁니다.[6] “도착을 예정한 움직임이 아니라 아무데도 도착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부유하는” 이 춤은 어떤 자리를 항시적으로 점유하지도, 소유하지도 않으며 회전을 거듭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공간 속의 타자를 배척하지 않는 태도로 쉽게 연결될 수 있죠. 「왈츠」의 두 사람은 “모두가 춤을 추는 계절이 지나고”도 미끄러지며 춤추기를 계속합니다. 아무리 다른 이들이 “비둘기를 욕하고/춤을 추는 사람들의 미래를 대신 걱정해”준다고 해도, 홍지호의 화자가 생각하듯 “모든 것이/비둘기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들이 계속해서 “원을 그리며/스텝을 밟아도//앞으로 나아가지는//강을 건너지는 못할 것”이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비둘기도, 우리도 이 순간 서로의 존재를 승인하며 당당히 빙판 위의 정원에 서 있으니까요.



동물 지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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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잠깐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늙은 개를 쓰다듬으며


나는 흰 벽에 빛이 가득한 창문을 그렸다

너를 잃어야 하는 천국이라면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안희연, 「면벽의 유령」[7]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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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전원시인 프랑시스 잠은 「당나귀와 함께 천당에 가기 위한 기도」[8]를 통해 동물과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을 한껏 담아낸 바 있습니다. “나는 이 짐승들을 너무 사랑합니다.” “당나귀와 더불어 당신께 나아가게 하여 주소서,” “저 영원한 사랑의 투명함 속에 저들의 겸손하고 온화한 가난을 비출 당나귀들을 닮게 하여 주소서.” 동물을 향한 그의 애정 어린 시선을 읽다 보면 금세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동물과 함께 천국에 갈 수 없다면 어떡해야 할까요? 안희연의 시 「면벽의 유령」 속 화자는 프랑시스 잠을 떠올리며 “이젠 정말 다르게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늙은 개를 품에 안고 무작정 집을” 나섭니다. 이윽고 천국을 연상케 하는 “빛으로 가득한 집”에 당도하죠. 그런데 한달음에 달려간 “입구에 세워진 팻말”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버리십시오/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달성하는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것이 당연하지만, 동물을 희생시키는 종류의 제의로 그 대가를 치를 수 있다고 믿어온 인간들의 관습은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소모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프랑시스 잠이 당나귀와 함께 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을 담아 기도문을 쓴 것이 무색하게 기독교는 인간의 죄를 씻고 천국에 가기 위해 죄 없는 어린 동물들을 대신 죽이는 속죄제를 부추기거나 인간 생명의 신성함만을 강조하면서 동물을 도덕적 관심의 범위에서 배제해왔습니다. 「면벽의 유령」에서 설정된 규칙은 이런 익숙한 배경과 쉽게 연결됩니다. 인간을 살리기 위해 동물쯤은 죽여도 좋다는 인식이 만연한 세상에서 환한 빛 속의 아름다운 천국이 그토록 잔인한 공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그리 충격적이지 않습니다.

 천국에 “다다를 수 있다는 믿음은 길을 주”지만, “다다를 수 없다는 절망도 길을” 줍니다. “누군가는 버려져야”만 열리는 이 견고한 문 앞에서 안희연의 화자는 나의 안녕을 위해 타자를 내버리고 싶어지는 슬픈 충동을 이겨내고 끝끝내 개를 지키길 선택합니다. “벽 앞으로 되돌아”와 “너를 잃어야 하는 천국이라면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이 결연함은 빛이 가득한 집과 동물과 함께하는 벽 가운데 어느 쪽이 진짜 천국인지를 아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겠지요. 거기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구하기를 ‘선택’하는 자리에 인간이 있을 수 있다는 위계적 상황 자체가 세상의 어떤 맥락을 반영하고 있는지 짐작해보게 됩니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버리라는 팻말 앞에서 갈등하는 인간에만 주목하지 않고, “늙은 개도 그것을 보고 있었”다고 쓰는 안희연의 섬세함에 대해서도요.



동물 부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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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 튀기는 안초비 프린스 두유해브타임 개들이 살 비비는 센트럴 파크 따발총 칭챙총 호퍼의 창문 하루 종일 키스미 미트볼 뚱뚱한 금요일 고져스


이소호, 「캣콜링」[9]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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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캣콜링(catcalling)은 여성 행인을 대상으로 길거리에서 이루어지는 남성의 성희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폭력을 반영하고 있는 이 끔찍한 행위는 특정 젠더를 향한 혐오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 예컨대 동양인 혐오와 같은 측면과도 얽혀 있습니다. 서구권 국가 한가운데의 동양인 여성들은 쉽게 폭력의 객체가 되죠. 이소호의 시 「캣콜링」에는 실제로 길거리의 여성을 희롱하는 데 동원되곤 하는 표현들이 이탤릭체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돈츄스피크잉글리쉬”, “행아웃위드미”, “스마일걸 아유얼론”, “룩앳미걸 두유워너퍽”, “퍼킹비취”… 고양이를 부른다는데(cat-calling) 정작 자주 사용되는 언어에는 암컷 개를 낮잡아 부르는 표현이자 욕설의 일종인 비취(bitch)가 포함되어 있군요.

 혐오 표현이나 욕설, 그 외에 일상적으로 발화되는 부정적인 말들에는 동물을 가리키는 단어가 잔뜩 들어갑니다. 뚱뚱한 체형의 사람들에겐 ‘돼지’라는 멸칭이 따라붙습니다. 특정한 방식으로 프레임화된 어떤 여성들은 ‘여우’나 ‘꽃뱀’ 같은 단어로 비하되지요. 바쁘고 힘들게 일하는 모습에는 ‘개처럼’, ‘소처럼’ 일하는 이미지가 덧씌워지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두고 ‘개소리’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몹시 흔한 일입니다. 우리의 언어가 동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을 어떤 방식으로 반영하고 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소 자명합니다. 캣콜링과 비슷하게 거리의 여성에게 큰 휘파람 소리를 내는 행위를 ‘울프휘슬링(wolf-whistling)’이라고 칭하는데, 희롱의 객체는 고양이로 비유되는 반면 그 주체가 늑대로 비유된다는 사실은 그동안 인간들 사이에서 형성해온 어떤 동물의 이미지들,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러한 세상의 맥락을 자꾸만 상기시킵니다. 고양이를 부르듯 여성의 관심을 끄는 ‘캣콜링’이라니, 이 유치한 폭력을 명명하는 일에 도대체 어떤 관습이 개입된 걸까요. 그 명명 앞에서 여성들은 나를 고양이 취급하지 마라, 하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말해도 되는 것일까요.

 이소호는 이탤릭체로 표기된 캣콜링 표현에 더해 맥락을 알 수 없는 다양한 언어들을 뒤섞어 나열하고, 이렇게 완성된 「캣콜링」 전문을 읽다 보면 곧 거리의 소음이 난잡하게 섞여 들려오는 모양새를 상상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안초비, 개, 미트볼, 망아지, 도살장처럼 직간접적으로 동물과 연결되는 단어들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여전히 이 단어들이 시 속에서 어떤 맥락을 이루는지는 쉬이 파악할 수 없지만, 그것들을 그냥 ‘맥락을 알 수 없는 다양한 언어’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마음이 찾아옵니다. 어떤 동물을 동원하는 표현을 쓸 때 반드시 따라오고야 마는 이미지의 기원들을 생각해봅니다.



동물 묘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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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닭을 먹으며 닭을 사랑한다고

애인을 때리며 애인을 사랑한다고


쥐를 사랑하지 않고

쥐를 먹지도 않고

쥐를 스케치하는 바람 앞에서


쥐는 두 손을 모아요


배수연, 「쥐와 그림」[10]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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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쥐만큼 현실과 매체 속 이미지의 괴리가 큰 동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현실의 쥐는 인간의 활동 반경에 숨어 지내며 질병이나 지저분한 것들을 옮기는 혐오스러운 존재로 인식되면서도 번식력과 싼 가격 등을 빌미로 가장 쉽게 실험용으로 사용되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가공된 쥐는 다릅니다. 거대 미디어 기업 디즈니의 대표 캐릭터 미키마우스를 생각해 보세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이 버린 손톱을 먹고 둔갑해 인간을 곤경에 빠뜨리는 쥐(<손톱을 먹은 들쥐>)를 등장시키는 전래동화가 있는 한편, 어떤 애니메이션의 쥐는 약삭빠르고 영리해 고양이를 골탕 먹이는 재주를 뽐내고(<톰과 제리>), 심지어는 천부적인 요리 실력을 갖춘 쥐(<라따뚜이>)가 영화 주인공이 되기도 하는 세상입니다. 잽싸고 귀엽고 똑똑하고 호기심 많은 쥐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합니다.

 배수연의 「쥐와 그림」은 제목 그대로 쥐를 그리는 일에 대한 시입니다. 시에서는 재현의 주체가 누구인지, 어떤 목적으로 쥐를 그리는지와 같은 정보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제시되는 것은 오직 쥐의 이야기. 많은 경우 동물을 이미지화하는 일에 동물의 의사는 고려되지 않는다는 걸 떠올리면, 재현의 객체가 된 쥐에 주목하는 시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쥐는 그림 같은 건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재현의 윤리를 둘러싼 물음은 필연적으로 객체화에 대한 논의를 수반합니다. 타자를 도구화하지 않는 무해한 재현이랄 게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일까요. 현실 그대로의 쥐를 담아내는 것? 허구 속에서 양산된 쥐의 모습을 계승하는 것? 쥐에게 의사를 묻는 것? 동물의 이미지를 생산/소비하는 것과 동물을 먹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인가, 동물 쓰기(write)는 동물 쓰기(use)와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는가. 그걸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동물을 객체로 묘사한다는 것은 재현의 윤리성의 탐구와 파괴를 넘나드는 위험한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존의 재현이 지닌 위력을 이겨내기 위해 그것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복시키는 시도들이 끊임없이 연구되어야 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배수연은 그 위험성과 필요성을 모두 받아들이며 과감히 동물 쓰기에 도전했습니다. “누군가는 닭을 먹으며 닭을 사랑한다고/애인을 때리며 애인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폭력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랑을 이용하는 관습이 팽배한 세상에서 이 시는 “사랑한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쥐를 사랑하지 않고/쥐를 먹지도 않고/쥐를 스케치하는” 것은 배수연의 시가 동물을 입체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입니다. 동물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며 동물을 쓰는 것과 사랑 같은 변명을 단호히 거절하며 동물을 쓰는 것 중에 어느 쪽이 사랑에 가까운지는 아는 이들만 알겠지요. “닭들을 잡아먹”으며 “이렇게 먹으면 스케치할 수 없는 건가” 묻는 쥐도, 자신을 “스케치하는 바람 앞에서” “수염이 간지러워 은근한/미소를” 짓는 쥐도 배수연의 묘사에는 생략이나 미화 없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편집위원 퓨 (rachopin329@naver.com)



[1] 나희덕, 「인간-동물의 관계론적 사유와 시적 감수성 - 2010년대 한국시를 중심으로」, 『문학과환경』 제20권 2호, 문학과환경학회, 2021, 61쪽.

[2] 황인찬, 『사랑을 위한 되풀이』, 창비, 2019 수록.

[3] 박동억, 「[탈인간중심주의로서 동물시의 가능성] 황야는 어떻게 증언하는가 - 2010년대 현대시의 동물 표상」, 『계간 시작』 제19권 제1호, 천년의시작, 2020, 31쪽.

[4] 홍지호, 『사람이 기도를 울게 하는 순서』, 문학동네, 2020 수록.

[5] The Editors of Encyclopaedia Britannica, 「Johann Strauss I」, 『Encyclopedia Britannica』, 2021.03.10.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Johann-Strauss-I>

[6] 박혜진 해설, 「슬픔의 기원」, 『사람이 기도를 울게 하는 순서』, 177-178쪽.

[7] 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 2020 수록.

[8] 프랑시스 잠, 『프랑시스 잠 시집』, 스타북스, 2017 수록.

[9] 이소호, 『캣콜링』, 민음사, 2018 수록.

[10] 배수연, 『쥐와 굴』, 현대문학, 2021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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