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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5호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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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Oct 17. 2021

우리 부지런히 사랑합시다

[헤집기] 편집위원 곤지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성인이 된 이후 적지 않은 연애를 경험했고, 연인이라는 결속 아래 남들이 한다는 것은 부지런히 따라 했다. 사귄 날짜를 세고, 매일 카톡과 통화를 주고받으며 둘도 없는 사이임을 표방했고, 적절한 질투와 사소한 이벤트를 통해 관계의 긴장을 만들어냈다. 사랑한다는 말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데이트를 통해 쇼잉의 기쁨을 누렸으며, 몸을 맞대며 둘만의 견고한 세계를 구축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보편적인 연애 코스를 순항 중이던 나의 연애는 어딘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고 끝내 다른 옷으로 갈아입기를 반복했다. 상대가 다섯 번째 바뀌었을 때쯤, 나는 연애의 방향성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관계에 대한 회의감, 연인과 행했던 모든 의례에 대한 피로감과 기시감. 무엇보다 스스로가 어떤 사랑과 연애를 원하는지조차 모른 채 무작정 관계에 뛰어들었다는 허무함이 나를 덮쳐왔다. 동시에 사랑으로 확신했던 감각들이 흐릿해지고, 사랑의 외피를 입었던 허영의 욕망만이 선명해졌다. 낭만적으로 연기했던 감정의 발화, 사랑의 속삭임, 관계의 실천들이 사실 나의 것이 아니었음을, 어쩌면 고도로 내재화된 ‘모방’에 불과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동안 무엇을 모방하는데 몰두했을까? 부끄럽지만 오랜 시간 나의 연애는 ‘낭만적 사랑의 신화’에 젖어있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사랑의 신화는 진정성 있는 세계로서 내부 세계를 추앙하며 기계화와 물질화가 진행되는 속물적인 외부세계를 분리해냈다. 또한, 내부 세계의 존재 증명으로서 사랑에 절대적 지위를 부여하고, 오랜 시간 사랑을 고결한 인간성의 촉발이자, 감정이 오류 없이 작동하는 정상적인 인간의 조건으로 상정했다. 사랑은 개인의 내면에서 기인한 순수한 감정의 발로이자 자유의 상징으로 평가받았고, 규범과 질서로부터의 해방, 매정한 도시 문명 속 온전한 안식처가 되는 ‘낭만적 유토피아’가 되었다. 이러한 낭만적 사랑의 신화는 각종 미디어와 예술, 다양한 의례와 문화를 통해 전수되어왔다.         

  

신화화된 사랑은 사랑하는 개인들에게 자유를 권약했다. 사회적 개인은 냉정한 자본주의 경제 질서와 삼엄한 제도적 규범에 ‘포섭된 존재’로 고통받지만, 사랑하는 개인은 내면의 욕구를 돌보고 감정을 표현하는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사랑은 자유를 보장하는가? 애초에 사랑이 사회문화적 진공상태에서 형성되는 순수한 감정인가? 사랑은 어떤 욕망의 발현이고, 그 욕망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우리는 누구와 사랑에 빠지고,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는가? 그것은 오직 나만의 고유하고 개별적인 로맨스일까?    

       

사랑에 대한 진실한 사유는 사랑을 신화적 위치에서 끌어내리고 그 실천이 가진 허구성을 해체하는데서 시작할 수 있다. 사랑은 내부 세계에서 탄생하여 개인의 욕망과 생리적 각성만을 먹고 자라는 고여 있는 경험이 아니다. 외부세계와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세계로부터 사랑의 의례와 관습, 규범과 가치, 사유체계를 이식받는 ‘사회적 실천행위’에 가깝다.           


에바 일루즈에 따르면, 문화는 성적 각성에 불과한 강렬한 ‘생리적 경험’을 사랑이라는 ‘부호화된 감상’으로 진화시키는 전 과정에 개입한다. 사랑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이를 기반으로 관계를 형성하고, 관계의 모습을 결정하고, 그 안에서 사랑을 행위하는 모든 과정이 실은 문화가 제공하는 사랑의 서사에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우리들의 사랑에는 어떤 문화적 맥락이 이식되고 실천될까?  




차라리 랍스터가 될지언정



영화 『더 랍스터』포스터 사진


2015년에 개봉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더 랍스터』는 독특한 세계관을 배경으로 사랑의 신화를 비틀고, 그 속물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랑에 대한 ‘기묘한 상상’으로 출발한 영화는 어느 순간 사랑에 대한 ‘기묘한 현실’을 폭로하며 끝을 맺는다. 영화는 주인공 데이비드(콜린 파렐)가 근시라는 이유로 아내에게 이별 통보를 당하고, 숲속에 위치한 호텔로 연행되며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파트너가 없는 사람은 모두 도시(주류사회)로부터 쫓겨나 짝을 찾기 위한 숲속 호텔(격리된 비주류들의 집합소)로 강제 이송된다. 도시사회에서 솔로들은 열등하고 불완전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들은 강제 이송된 호텔에서 45일간 완벽한 짝을 찾지 못하면, 비밀스럽고 끔찍한 과정을 거쳐 ‘동물화’가 진행된다. 동물이 될 위기에 처한 솔로들은 호텔에서 자신과 어울리는 짝 찾기에 몰두한다.    


“(양성애자는) 지난여름부터 금지됐어요.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지금 결정하셔야 해요.”


전반부의 주요 무대가 되는 호텔은 두 개의 보기를 제시하고 선택을 강요한다. 이성애자 혹은 동성애자의 선택지만을 허락하거나, 44 혹은 45 사이즈의 신발만 제공한다. 양성애자이자 44.5 사이즈의 발을 가진 데이비드는 이내 이성애자로 기록되고, 45 사이즈의 신발을 제공받는다. 이렇듯 편협한 이분화와 폭력적인 강요는 이 세계를 이루는 거대한 규범 질서의 본질이기도 하다. 도시와 호텔로 상징되는 주류사회는 ‘커플’이 되는 것만이 가치 있는 일이며, 올바른 일이고, 일생에 걸쳐 추구할만한 것이라고 강요한다. 호텔은 솔로보다 커플의 삶이 윤택함을 체험시키기 위해 온종일 한쪽 팔을 묶어놓거나 솔로들에게 배구나 테니스 같은 2인 이상의 스포츠를 금지하는 등 일상적 제재를 가한다. 일상적인 제재와 반복적인 세뇌를 경험했음에도 기어코 짝을 만들지 못한 자, 즉 규범을 실천하는 데 실패한 자는 동물화를 통해 인간의 자격을 박탈시켜버림으로써 이 체제의 완결성을 유지한다.      


“동물이 돼도 짝은 찾을 수 있어요. 물론 공통점이 있는 동물을 선택해야 하죠.
늑대와 펭귄은 절대 함께 못 살죠. 낙타와 하마도 그렇고요.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말도 안 될 일인지.”   


호텔은 사랑을 강제할 뿐 아니라 사랑의 형식과 대상도 제한한다. 이들은 ‘완벽한 짝’이 있다고 상정하고, 똑같은 결함, 똑같은 성격, 똑같은 특징이 있는 자들의 만남만이 온전하고 합당하다고 인정한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와 비슷해 보이려는 솔로들의 발버둥은 우스꽝스러운 상황들을 연출해낸다. 코피를 자주 흘리는 여자와 완벽한 커플로 보이기 위해 자해를 하여 코피를 꾸며내는 인물이 등장하는 한편, 주인공 데이비드는 감정이 없는 여자와 완벽한 짝이 되기 위해 피도 눈물도 없는 척 연기하다 파국의 소용돌이를 맞는다. 이들은 자신의 자작극이 들통나는 순간, 어김없이 사랑을 잃고 추락한다. 이는 상대를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유기체로 사랑했다기보다 근시, 코피, 사이코패스적 기질 등과 같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주요한 ‘특질’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2021년 대한민국이라는 세계에서도 동질성을 사랑하겠다는 욕망이 점점 노골적으로 발현되고 있다. 동질성에 대한 갈망은 때로 엽기적인 현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특정 학교, 특정 업계,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적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만 가입할 수 있는 소개팅 앱이 늘어나고, 각종 결혼 주선 업체에서는 매칭의 실패 확률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개인의 특징(예컨대, ‘활발한’, ‘차분한’, ‘내성적인’ 등)을 수집한다.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분산해내는 역동적인 유기체로서의 개인은 딱 맞는 짝꿍과의 매칭 앞에서 자신의 복잡한 삶의 맥락을 삭제한 채, 몇 가지 특징과 조건을 가진 납작한 인간으로 변모해야 한다. 우리는 대체 상대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걸까.      


“이 직장은 최고 수준이죠. 아내와 애들한테 시간을 낼 수 없는 게 유일한 흠이죠.”
“저희는 아이가 넷이에요.”
“제 아내를 정말 사랑합니다.”  


한편,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와 짝이 되기 위해 감정이 없는 척 연기했던 데이비드는 거짓말이 들통나자 처벌을 피해 숲속의 외톨이 집단으로 도망치게 된다. 숲속은 호텔과 완전히 다른 규범 체계를 갖고 있지만, 구성원들에게 부조리한 사랑의 규범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 숲속의 외톨이 집단은 '반드시 혼자일 것'을 강요한다. 외톨이들은 사랑에 빠지는 순간 핏빛 처벌을 받게 된다. 이들은 생필품을 얻기 위해 정기적으로 도시에 가야하지만, 문제는 도시가 매 순간 커플임을 증명해야 하는 살벌한 검열의 장소라는 것이다. 도시에 가는 외톨이들은 혼자임을 들켜 처벌되거나 다시 호텔로 이송되는 끔찍한 상황을 피하고자 서로를 사랑하는 연기에 필사적이다. 이때 이들이 사랑을 연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결혼과 가족'이다. 서로를 아내 혹은 남편으로 칭하는 순간부터 사랑이 권위를 부여받고, 자식의 존재를 꾸며내는 순간 사랑의 증명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들은 가짜 가족이 되어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고 도시를 드나든다. 물론, 적절한 순간에 자연스러운 키스와 가벼운 뽀뽀도 잊지 않는다. 섹스는 사랑의 주요 증명으로 평가받고, 스킨십은 두 사람 사이에 섹스가 오가는지에 대한 비밀스러운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직장이라는 설정은 이들 가짜 커플에 동질성을 부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외톨이들이 결혼, 섹스, 동질성을 주요 위장 수단으로 도시를 활보하는 모습은 주류사회가 제시하는 사랑의 사회적 증명이 얼마나 얄팍하고 허구적인지 폭로한다. 동시에 스크린 밖 사회에서도 주요한 사랑의 증명으로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결혼과 섹스, 사랑의 조건으로서 동질성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운명의 장난처럼, 데이비드는 외톨이 집단에서 그와 비슷한 결함을 가진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데이비드가 아내에게 버림받았던 이유인 '근시'는 여자를 사랑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둘은 커플 됨을 엄격히 금지하는 외톨이 집단을 떠나 다시 도시로의 편입을 꾀하지만, 이들의 계획은 들통나고 집단의 우두머리는 여자의 눈을 멀게 한다. 우두머리는 이들의 관계를 감싸고 있던 동질성의 울타리를 앗아감으로써 자연스럽게 이 사랑을 파탄에 이르게 한다. 그럼에도 여자를 데리고 도시로 도망친 데이비드는 커피숍에 앉아 여자를 관찰한다. 여기까지 보면 위기를 극복하고 사랑을 쟁취하는 해피엔딩 클리셰인 듯하지만 이어지는 장면은 멜로를 가장한 호러 다큐의 면모를 보여준다. 데이비드는 난시 외에도 무언가 공통된 결함을 찾기 위해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관찰한다. 하지만 이내 실패하고, 결국 자신의 눈을 찔러 같은 결함을 만들어내고자 화장실로 향한다. 카메라는 그를 기다리는 여자의 모습에 한참 머무르지만, 관객들은 끝내 그의 선택을 알 수 없는 채로 엔딩 크레딧을 맞이한다. 엔딩 크레디트마저 올라간 후 나지막이 들려오는 파도 소리만이 데이비드의 선택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극의 초반, 데이비드는 커플이 되지 못하면 어떤 동물로 변하고 싶냐는 호텔 매니저의 말에 '랍스터'라고 대답한 바 있다.        




우리의 몸과 몸을 포개고        


“타인의 사랑이 내가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결여를 인지하도록 이끄는 것,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타인의 사랑에 응답하게 만드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1]


데이비드는 랍스터가 될지언정 여자를 사랑하지는 못했다. 결국 데이비드가 여자를 계속 사랑하는 데 실패한 것은 그가 가진 결여를 통해 그녀의 결여를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그는 오직 자신과 동질한 형태의 결여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의 근시는 오직 나의 근시를 통해서만 무마될 수 있다는 편협함. 나의 결여와 상대의 결핍을 철저히 견주어보고 그 팽팽한 균형이 기울어지는 순간, 관계로부터 도망쳐버리는 비겁함. 사랑을 계속하는 일은 내가 가진 한 종류의 결여에서 벗어나, 이를 타인의 결여로 확장하여 이해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니 자신 안에 어떠한 결여도 발견하지 못한 사람, 혹은 자신의 결여를 통해 타인의 결여와 인간의 취약성을 이해하는데 실패한 사람은 상대의 결여를 통해 자기충족적 사랑을 할 뿐이다. 영화의 포스터 속 데이비드가 안고 있는 형체 없는 무언가가 타인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마 이런 이유일 것이다. 타인의 형상을 한 무언가를 걷어내면 결국 그는 누구를 안고 있는가. 자신이 아닌가.           


“우리는 몸 자체를 무시할 수 없다. 우리의 심장과 폐, 근육과 힘줄의 감각적인 경험은
언어로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우리와 세상에 이야기해준다”[2]     


한편, 우리의 몸은 세상과 조우하는 매개이자, 타인과 감각과 인식을 주고받는 피부가 된다. 피부 아래에는 젠더, 계급, 인종, 질병의 경험을 켜켜이 축적해내는 정체성의 온상지이며, 나의 결여를 경험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나에게 몸은 든든한 삶의 토양인 동시에 나의 세계에 결핍과 고통을 그려내기도 했다. 내 몸은 때로 예측할 수 없는 때에 나를 취약하게 만들었다. 특히 내 몸에 부여된 사회적 맥락, 젠더의 권력구조는 몸에 대한 자신감보다 먼저 무력감을 훈육했다. 내 몸에 부여된 금기는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 일어날 일들에 대한 공포를 동반한 채로 내가 존재할 수도 있었던 시간과 공간, 타인과의 관계에 한계를 만들어냈다. 또한, 건장한 몸을 기준으로 세워진 대부분의 사회적 활동 속에서 내 몸의 맥락은 쉽게 간과될 수 있는 것이다. 약한 몸에 대해서라면 책임감부터 운운하는 공동체와 날 선 시선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모멸감을 부여하는 발화들, 다시 내 몸에 대한 자기혐오로 이어지는 순간들. 기준이 되지 못하는 몸들은 이들 존재의 취약성을 매 순간 뼈저리게 감각할 수밖에 없다.


“네가 나를 처음으로 껴안았을 때, 그 몸짓에 어린, 간절한, 숨길 수 없는 욕망이 느꼈을 때,
소름끼칠 만큼 명확하게 나는 깨달았던 것 같아.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샅은.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3]


그러나 한편으로 내가 가진 취약한 몸은 타인을 사랑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나의 몸이 타인의 존재와 돌봄이 필요하지 않은 완벽히 독립적이고, 온전한 몸이었다면, 타인의 결핍을 흔쾌히 사랑할 수 있노라고 장담할 수 없다. 내가 겪은 결핍, 결여, 고통과 취약함은 타인이 가진 결핍을 사랑하는 기반이 된다. 사랑은 내 몸이 가진 취약성과 결여, 결핍과 결함을 기꺼이 보여줌과 같다. 상대와 사랑을 나누고, 피부를 맞대고, 몸을 포개는 것은 단순히 표피 간의 접촉을 넘어, 나의 취약성으로 너의 취약성을 이해하겠다는 뜻이다. 각자가 지녀온 세계의 경계를 흐리고, 서로의 외부와 내부를 찬찬히 느끼는 일이다. ‘몸’이라는 가장 작은 나만의 공간에, 어쩌면 가장 취약한 정체성의 근원지에, 때로는 내 삶에 까마득한 고립과 폐쇄를 만들어내는 나의 세계에 너를 초대하겠다는 것이다.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을 지속해나가기 위해서.
짐작에 짐작을 거듭해, 최선을 다해 오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 사랑한다는 건 그래서 그의 고통을 짐작하려고 노력하는 것에 다름 아니고”[4]


그러니 그 초대에 응하는 우리의 태도는 수색하듯이 서로의 몸에 있는 동질성을 헤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감싼 연약한 피부와 그 안에서 쉴 새 없이 온몸으로 피를 뿜어내는 생명의 작은 떨림에 경이롭게 입을 맞추는 것이어야 한다. 두 몸이 그려온 신비롭고 복잡한 세계가 포개지고, 서로의 몸이 가진 ‘필요, 이해관계, 욕망, 취약성, 희망, 관점을 이해하고 그에 응답할 수 있는 것’[5]이어야 한다.      




‘사랑’말고, ‘사랑하는 일’


「2021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김지연 작가의 단편소설 <사랑하는 일>은 사랑의 신화를 벗어던지고, 서로의 실재에 가닿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려진다. 소설에서 5년째 동거하고 있는 레즈비언 커플 은호와 영지는 부지런히 서로를 사랑한다. 그러나 점차 섹스를 하지 않게 되면서 도대체 서로가 친구와 다른 점이 무엇인지, 섹스가 없는 관계에서 무엇으로 사랑이 입증되는 것인지, 아니 그전에 ‘사랑 같은 게’ 대체 무엇인지 고민한다. 이들은 동성애 커플이기에 법적으로 부부로 결합될 수도 없고, 섹스도 하지 않고, 게다가 사랑 같은 게 무엇인지 헷갈려 빈말이라도 “사랑한다”라고 속삭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은호는 어느 날 아침, 잠이 덜 깬 자신의 귀에 “너와 함께라면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다”며 그 이유를 길게 읊조리는 영지의 말에서 어렴풋이나마 사랑한다는 마음을 듣는다. “사랑한다”는 발화가 빠진 다소 낯선 이 사랑고백은 은호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 “아빤 엄마를 진짜 사랑했어…”라며 꼬장이 섞인 선언적 사랑고백을 하는 것과 조금 다르다. 가족들에게 “사랑했다”는 말을 남발하지만 정작 아무도 그에게 사랑받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은호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결코 ‘사랑하는 일’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는 것을 목격한다. 은호 아버지의 의무적이고 피상적인 사랑은 영지와 은호가 결코 자신들의 사랑을 단언하거나 확신하지 않고, 그저 찬찬히 서로의 손길을 느끼고, 함께하기 위해 용기를 내고, 행복을 위해 물러서지 않는 실천적 사랑과 대비된다. 주인공 은호는 사랑하는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가족들을 사랑하는 건 이미 주어진 일 같은 거였는데, 그 사랑을 이어가는 일, 계속해서 사랑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무조건적인 사랑 같은 건 없으니까.
내가 영지를 계속해서 사랑하는 일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합의한 일종의 공동선을 향해 함꼐 나아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일 다른 삶이 되고 매일 사랑하는 일을 한다.”[6]


우리가 결혼과 섹스, 사회적 인정에 자꾸만 우리의 사랑을 위탁해버리는 것은 그것이 빠르고 쉽고 명료하기 때문일 것이다. 신화적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 모방을 통해 관계를 꾸려가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일은 때때로 지난한 과정을 포함한다. 은호 역시 이들의 사랑이 증명되지 못함에 불안함을 느끼고 남들과 같지 않음에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은호와 영지는 조금 헤맬지언정 길을 잃지는 않는다. 이내 자신들이 사랑하는 모습이 틀리지 않음을 받아들이고 행복하겠다고 다짐하고 다시 사랑해간다. 소설은 시종일관 사랑에 대해 질문하면서 소설의 제목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는 일’이다. 애정을 주고받고, 기꺼이 어깨를 내어주며 상대의 감정적 지지가 되어주는 관계는 사랑이라는 보통명사를 선언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공동선으로 함께 나아가고 있다는 매일매일의 감각과 행위, 즉 부지런히 사랑하는 일에서 성립 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은호와 영지가 되지 못했고 은호 아버지의 꼬장에 더 가까운 연애를 했다. 상대와 깊이 대화하고 협력하면서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을 ‘선언’하기에 바빴다. 서로의 필요와 욕망, 내면을 마주하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결여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관계가 끝났지만 나는 아직도 사랑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제 내가 꿈꾸는 사랑하는 일이란 이런 것이다. 서로의 취약성을 알고, 욕망을 알고, 함께 나아가야 할 미래를 아는 것. 동시에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는 단호해질 줄 아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사랑하는 것.     

     



나는 더 많은 사랑이 탄생하길 바란다

 

섹슈얼리티를 기반으로 한 이성애 중심의 사회 안에서 사랑의 정의는 너무나 협소하다. 섹슈얼리티를 동반하지 않은 사랑은 ‘우정’으로 포섭되고, 비이성 간 관계는 혐오스러운 것으로 분류된다. 편협한 사랑의 각본 아래서 언어를 잃어버린 사랑은 너무 많다. 검열되고 조작된 마음들, 쉽게 매도되는 관계의 형상들, 나아가지 못한 채 묻혀버린 말들이 너무 많다.   

  

나 역시 끊임없이 증명받는 사랑에 목을 맸지만, 언젠가 찬찬히 더듬어봐야만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나누기도 했다.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공유하는 끈끈한 감정적 결속,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하고 있는 관계의 고유성과 개별성, 애틋하게 일렁이는 마음을 가진 관계가 있었다. 그것은 결코 우정이나 인류애라고는 통칭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친구와의 관계는 동성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성욕을 느끼지는 않기 때문에 우정이 되었고, 그저 소녀시절에 응당 겪는 강력한 끌어당김이 작용했다고 치부했다. 이성애 중심의 섹슈얼리티, 성기 중심의 섹스, 결혼을 비롯한 각종 사회적 증명으로 점철된 사랑에 회의를 느끼는 요즘, 나는 이 관계를 떠올린다. 이 관계가 내게 주었던 따뜻함, 안정적인 결속, 기쁨과 신뢰를 상기해본다. 누구도 소진되거나 착취되지 않았던, 온전히 이해받고, 온전히 사랑받았던, 상대의 필요를 알고 서로의 행복을 알았던 이 관계를 나는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다.         

  

더불어 나는 더 많은 사랑이 탄생하길 바란다. 억압되거나 침묵 되지 않고, 틀에 맞게 개조되거나 강요되지 않고, 각자가 각자만의 사랑을 충실히 해냈으면 좋겠다. 우린 더 많이 행복해질 수 있다. 생이 준 사랑이라는 선물을 더 당당하게 누릴 수 있다. 모두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              




 편집위원 곤지(yonzgonz@gmail.com)




[1]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2] 일라이 클레이, 「망명과 자긍심」, 현실문화, 2020

[3] 한강, 「희랍어시간」, 문학동네, 2011

[4] 염승숙, 「세계는 믿을수없이 아름다워」, 문학동네, 2019

[5] 수나우라 테일러, 「짐을 끄는 짐승들」, 오월의 봄, 2020

[6] 한정현 외, 「2021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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