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2. 서글서글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참고서를 사러 서점에 가야 했다. 당시 학교 앞 문구점에는 문구 외에도 수업에 필요한 참고서를 판매하기도 하였는데 주말이라 모두 문을 닫은 시점이었다. 급히 근처 서점을 찾다 ‘삼일문고’라는 새로운 이름의 서점을 발견했고 호기심 반 조급함 반으로 방문했다.
그날 삼일문고에서의 기억은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남아있는 장면이 있다. “이거 어떻게 여는 거지?” 처음 본 형태의 문을 어떻게 여는지 몰라 한참을 문 앞에서 끙끙거리던 나. 한 오 분 정도 지났을 때였나, 어떤 중년 남자가 다가와 “이 문이 조금 그렇죠? 다들 열기 어려워하시더라고요.”라고 말하며 문을 열어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 남자가 김기중 대표님이었던 거 같다.)
필요한 참고서 한 권만 사러 나와야지. 했던 다짐은 서점을 들어가는 순간 잊어버렸다. 책처럼 켜켜이 쌓인 빨간 벽돌과 식물, 수만 권의 책이 테마별로 큐레이션 되어 있는 삼일문고는 ‘이것만 사고 가야지’가 이뤄질 수 없는 공간이었다. 어느새 두 시간이라는 시간이 흘러있었고, 내 손에는 다섯 권이 넘는 책이 들려있었다.
그 이후로 삼일문고는 마음의 환기가 필요할 때, 복잡한 머리를 정리할 때 혹은 시간이 남아 뭘 할지 모르겠을 때 무작정 찾고 보는 공간이 되었다. 내면이 복작복작 거리는 날, 삼일문고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과 함께 책 구경을 하다 보면 현실과 멀어져 책 세상에 빠져든다. 자연스레 내면은 가벼워진다. 그래서 나는 삼일문고를 ‘구미 속 작은 여행지’라고 부른다. 여행지 거리를 걷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듯 삼일문고도 내게 그런 공간이다.
삼일문고가 세워진 배경이 궁금해요.
구미에서 가장 큰 서점인 춘양당이 문을 닫고 ‘서점이 없는 도시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상실감이 있었어요. 여기서 저는 고향을 떠나기보단 서점을 만드는 선택을 한 거죠.
다른 서점들과는 접근 방식이 조금 달라요. 예를 들어 대부분 중형 서점은 참고서의 비중이 70% 이상인데, 저희는 참고서가 없이 종합 서점으로서 책이 중심이 되는, 즉 단행본이 중심이 되는 서점을 차렸죠. 그다음엔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시민의 마음에 놀이터 같은 공간으로 남아, 책을 읽겠다는 사람과 책을 잇는 서점이 되고 싶었습니다.
경상북도에서 가장 큰 서점을 열면서 '지역상생'이라는 가치를 실천하고 계시잖아요.
저는 지역이니까 꿈꿀 수 있다고 생각했고, 사회를 바꿔나가며 함께 살아간다는 느낌을 정말 필요로 했거든요. 제가 좋은 사람이라서, 선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라기보단 정말 개인적으로 하고 싶었고 보람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판단해 투자한 사업으로 이해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착한 사람이 선한 일을 한 게 아니라, 많은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 사회에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방법으로 고마움을 돌려주고 싶어 했던 거죠.
이전 인터뷰들을 통해서 대표님이 미국과 서울이라는 큰 도시가 주는 소외감, 무력감, '부속품이 되는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셨단 걸 알게 됐어요. 나를 작게 만드는 도시에 내가 굳이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라고 고민하셨다고요?
구미에서는 삼일문고를 하면서, 제가 도시와 함께 변화하는 것에서 오는 행복감이 제 삶의 원천임을 발견했어요. 큰 도시에서는 내가 있으나 마나고, 내가 뭔가를 해도 소수자로서 겨우 개인적 성공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내가 사회를 함께 바꿔 나가고, 함께 살아간다는 그런 느낌을 받고 싶어서 지방을 선택했죠. 제가 아팠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사회에 소속되고 싶다, 함께하고 싶다는 사회적 결핍이 컸기에 이런 선택을 했는지도 몰라요.
삼일문고를 찾은 분들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분이 계셨나요?
한 분께서 1년에 한 권 나가는, 일반인이 절대 안 보는 책을 주욱 가져가시더라고요. 범상치 않은 느낌 때문에 혹시 작가인지 여쭤보고 싶었지만 별말씀 없이 가셨어요. 그런데 나중에 어떤 아버님께서 오셔서는 딸이 상을 받아서, 책이 나오면 친구들한테 나눠줘야 한다고 20권을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회원 번호를 불러줄 때 깨달았죠. ‘아, 그 사람이구나.’하고요. 구미에서 문학 신인상을 받았더군요.
지방 서점으로서 처음 5년 간의 적자 시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으셨어요?
이 시기를 보내면서 제가 혼자 카운터를 봐야 하는 시간이 많았는데요. 그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서점을 해줘서 고맙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기부나 장학재단처럼 호의를 베푸는 일들에 속해져 있지만 서점에서는 진짜 ‘고맙다’고 전달하는 기운이, 이 사람이 정말 고맙다는 게 느껴져요. 제가 책을 팔아 돈을 벌고 있는데, 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저에게 고마워하는 거죠. 이게 한두 명이 아니에요. 그 시기를 버티게 했던 힘이 되었죠. 반대로 제가 어느 가게에 가서 그런 얘기를 해본 적은 없거든요. 한 마디 더 내어주는 마음을 가진 분들께 참 감사해요.
대표님의 독서 루틴이 궁금해요. 책을 주로 읽으시는 장소라던가, 책을 셋업하는 방식 같은 거요.
주로 혼자서 읽었던 것 같아요. 대학교 입학 초반 땐 도서관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법이라고, 이 책을 읽으면 이 책의 저작들을 파고파고 들어가는 식으로 거의 1년에 300-400권씩 독서만 했었죠. 이 시절 즈음에 이미 제 독서 세계는 거의 잡혔어요. 지금은 하루에 신간이 300권 정도 들어오면 그 중에서 제가 30권 정도를 골라내야 하는데, 책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워낙 걸리니 이젠 책을 안 펼쳐도 책이 뭔지를 알아야 할 정도죠.
독서의 가장 큰 가치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시민들에게 독서가, ‘몰입하는 즐거움’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숙제처럼 읽히지 않고 책이란 걸 잊는, 그런 책을 추천해드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죠. 이런 독서의 즐거움을 잊어버리면 제가 서점을 하는 즐거움도 반감될 것 같아요.
글, 편집 : 김가은, 김예빈
사진 : 김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