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라는 감정의 진짜 얼굴

트라우마가 남긴 화의 자리

by 밝은영은쌤



"선생님 안의 충동성이 창조가 될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예술가가 될 수도 있었죠."

나의 불안이 이렇게 해석될 수 있음을 만난 지난주 1회기 상담을 마치고 나는 반복된 환영에 시달렸다. 계속 리와인드 되었다.


1993년 어느 여름날의 그 장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아주 깊은 곳의 나.


초등학교 5학년의 여름, 피아노 학원에서는 내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다른 아이들과 다른 반주법 책을 추가로 가르쳐주셨고, 매우 빠르게 음악을 빨아들였다. "이 언니가 우리 학원에서 진도 제일 빨라" 라는 어느 동생의 말에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여름날, 그 때 입고 있던 옷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무더운 날씨, 피아노가방을 손에 들고 걷던 달동네의 구불구불한 길..

누군가 나를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그림자로 가늠해봤을 때 나보다 무척 큰 사람이고 남자일 것 같았다. 내 걸음이 빨라지면 같이 빨라졌다.

'조금만 더 가면 집이다'

집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들어갈 수 없었다.


'이 아저씨가 따라 들어오면 어쩌지? 더 위험할 것 같아'


집을 지나쳐 계속 걸어갔다. 그 순간.


뒤에서 나를 끌어안으며 가슴을 주무르는 아저씨의 손길. 발버둥쳤으나 자그마한 5학년 여자아이는 벗어날 수 없었다. 한참을 그러다가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골목으로 달아난 남자.


왔던 길을 되돌아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울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엄마, 나 피아노 학원 안다닐래" 이 말밖에는..

그렇게 나는 좋아하던 피아노를 갑자기 그만두었다.


"그 때 자신에게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좌절, 원망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다른 이유로 좋아하는 것을 그만둬야 했던 그 상황이. 왜 말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에 내가 바보같기도 해요. 근데 갑자기 왜 그 날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어요."

"그걸 우리는 이렇게 불러요. 트라우마."

"내가 예술가가 되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 날의 상처가 떠올랐나봐요."

"네. 선생님 더 깊은 곳에 자리한 감정은 화에요. 자신에 대해, 상황에 대해. 더 어린시절에도 스스로 화가 있다는 생각 해보셨나요?"

"네.. 남동생과의 차별, 나도 사랑받을 수 있을까 조마조마하던 마음들.."


상담은 이렇게 계속 되었다. 가라앉은 먼지가 일어나듯, 내 안에 쌓여 있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확 일어났다. 누군가 후 하고 불은 것처럼.


" 지금 그때의 나를 보면 어떠세요?"

"가엾어요."

"그 아저씨에게 뭐라고 하고 싶나요?"

"당신은 이기적인 사람이야. 자신의 욕구만 중요하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한테.."


그 사건 이후로 나는 내 몸을 사랑하지 못했고, 나를 나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트라우마와 화.

불안이라는 감정의 진짜 얼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그토록 화가 나는 이유.

벗어날 수 없었던 그 날의 결박이 화 라는 에너지로 내 안에 자리하고 있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교사가 되고 잘 자라셨어요?"

"아빠의 사랑 덕분에요."

"그래요. 단 한사람. 믿어주는 단 한사람만 있어도 됩니다."


하지만 나는 상담사님께 아빠가 내가 고등학생일 때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차마 드리지 못했다. 그 말씀을 드리는 순간 그녀 앞에서 펑펑 울 것 같아서..

아빠의 죽음 또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그렇게 일찍 40대 초반에 떠난 아빠에 대한 연민과 화가 있었기에.


상담사님은 말씀하셨다.


"다음 상담 때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 나눠봐요. 죽음에 대해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죽음은 아름답기도 해요. 길가의 낙엽처럼 자기 자리를 스스로 내어주는 일이에요. 일주일 지내시면서 문득 문득 만나는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이야기해봐요"


다음에는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난 아직 아빠를 보내드리지 못했나보다.


지난주에 그림자를 처음 마주하고, 이제 그 그림자의 실체를, 불안이라는 감정의 진짜 얼굴을 만나는 일이 두렵고 힘들다. 하지만 미해결과제로 남는다면 언젠가 계속 나를 괴롭힐 것만 같다.


이제 먼지를 쌓아두지 말고, 누군가 지나가기만 해도 먼지가 일어나는 힘든 나의 마음을 깨끗하게 청소해보자. 아주 오래된 묵은 먼지를. 손대기 두려웠던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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