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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란 Sep 21. 2021

밀가루 안 먹는 삶 Ⅱ

밀가루로 인해 내 우주가 바뀌었다


밀가루를 안 먹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참 쉬운(?) 사람이 됐다.



식당에서 친구가 "사란이 파스타 못 먹으니까, 우리 스테이크 하나 더 시키는 거 어때? 리조또는 괜찮아?"

라는 말을 하면, 흐억... 이 아이가 어떤 약속에서 말없이 1시간을 늦는다고 해도 나는 앞으로 애정을 듬뿍 담아 기쁘게 기다리고 말거야 라고 생각 하며 무한 신뢰 생성.


지인들 중 "사란 씨는 밀가루 못 드시니까, 이걸로 사 왔어요. 이거 ~로 만들어서 되게 좋다던데, 이건 괜찮으시죠?"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사람이 어쩜 이리 아름다운 마음씨를 갖고 자랐을까... 급 사랑에 빠진다.


만약 어느 날 어떤 이성이 "사란 씨, 그 식당 글루텐 프리 메뉴 있는데 진짜 맛있어서 사란씨 생각나더라고요. 언제 저랑 같이 가요"라고 한다면, 그 남자 뭐 거의 나랑 오늘부터 1일인 것이다(!)



어려서부터 아토피로 고생하다가 얼마 전부터 밀가루를 중단하면서,

사실 밀가루만큼은 아니더라도 동시에 많이 줄이게 된 음식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우유, 단 음식, 돼지고기, 술 등등.


그래서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까다로운' , 조금 '피곤한' 사람으로 보는 것을 안다.

대놓고 "아 ~~ 사란씨 그거 먹는다고 안 죽어요!"라든지 "자꾸 먹어버릇해야 몸이 적응도 하고 그러는 거예요" 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아휴, 그렇게 음식을 가려서 어떡해요. 나는 사란씨랑 못 만나겠어~ 사란씨랑 만날 남자는 진짜 힘들겠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진짜 있다)


살면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사람들에게 전부 내 사정을 설명할 수는 없다.

사실은 나도 "아 그게 아니라요! 제가 아토피 때문에 어릴 때부터 고생했는데 음식이 엄청 중요하다는 걸 알아서 밀가루 못 먹게 된 거예요. 먹으면 점점 피부가 안 좋아지고 해서 힘들어지고.. 맛있는 건 저도 알아요! 먹고 싶은 거 엄청 많은데, 제 맘대로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그래요. 일부러 먹어버릇하면 괜찮아지고 그럴 일은 없답니다!! 그랬으면 진작 먹었겠죠?!"

라고 반박하고 싶지만 나의 대답은

"하하하. 그러게요 제가 참 까다롭죠?"

그냥 꿀꺽. 삼키고 만다.

아니 누가 엽떡에 허니콤보 안먹고 싶겠냐고.


밀가루를 끊었을 뿐인데,

외로워졌다.

그래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느냐고?

절대 아니다.


나는 입이 짧은 게 아니며 편식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팩트는 지금 누구보다 편식하고 있지 않은가.

그냥 인정해야 마음이 편하다.


나는 유명한 양식 식당은 잘 모르지만,  한식 맛집 콜렉터가 돼버린 덕분에

약속을 잡을 때면 가만히 약속 장소가 잡히길 기다리고 걱정하기보다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는, 친구들도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있는

나의 n년간의 빅데이터로 뽑아낸 맛집 리스트를 지역별로 도출해 추천한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나도 지인들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뿌듯함은 덤이다.)


무엇보다 내가 속상한 건 생일에 생일케잌을 못 먹는다는 건데

베이킹을 하는 내 소중한 친구는, 생일에 밀가루 없이 만든 바스크 치즈케잌을 만들어 선물해 주었고

엄마가 만들어주신 쌀 케이크로 축하파티를 하게 되었다.

또 요즘 제작 떡 케이크가 얼마나 예쁜지, 떡 케잌에 생일 초를 꽂고 소원을 빌 때면 왠지 특별해진 기분도 들었을 만큼 예상치 못한 기쁨도 느껴보았다.


친구 동생이 생일에 특별히 만들어 준 쌀가루 딸기케이크


친구 집에서 집밥. 오른 쪽 파스타는 풀무원 두부면으로 만든 두부면파스타



너는 이런 것도 같이 못 먹느냐며 서운해하거나, 내게 아무 생각 없이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집 밥 먹자며 집으로 불러 지극정성으로 차려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앞으로 살면서 내가 누구에게 잘해야 할지,

차근차근 시간이 알려주었다.


사람들과 맛집을 갔을 때 내가 못 먹는 음식이 앞에 있는걸 보고 괜히 속상한 적도 많았지만

과거의 아파서 이 자리에 나올 수도 없었던 나를 떠올리면 소중하고 감사한 순간이 되었다.

간지러움이나 따가운 상처에 대한 생각 없이 아무 생각 없이 누군가를 만나서 웃을 수 있다는 것.

예전 같으면 상처받았을 법한 상대의 말도 가볍게 받아주고 받아칠 줄 안다는 것.

그렇게 나에게도 힘든 시간을 버틸 '여유'가 생긴다는 것,

그것은  인내의 시간이  보상이다.


/

다음엔 소소한 음식 꿀팁에 대해 써볼까합니다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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