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erry Chae Jan 23. 2021

Back to the 2015, Cities 1

선물 같은 휴식

벨기에는 주변 나라들에 비하면 국토가 좁은 편이라서 근교 도시 다녀오기가 정말 편리하다. 그리고 내가 가고 싶은 벨기에의 도시들은 런던이나 파리 같은 대도시도 아니어서(그 정도 규모의 도시가 없기도 하고) 근교 도시 세 곳을 묶어 하루에 다녀오기로 했다.


오스텐트(Oostende) – 브뤼헤(Brugge) – 헨트(Ghent)


이 세 곳은 브뤼셀(Brussels)에서 서쪽으로 일직선 상에 있는 도시들이다. 벨기에에 다른 매력적인 도시들도 많지만 바다를 보고 싶어 해안 도시 한 곳을 포함했고 거리 자체가 아름다워서 걷기만 해도 좋은 도시들을 가 보고 싶었다. 오로지 도시의 정취를 느끼기 위한 하루, 아침부터 설렌다.

하루에 세 도시 가능합니다
와이파이 원시인은 오늘도 기차 시간표부터 찍습니다



오스텐트(Oostende)는 브뤼셀에서 기차로 1시간 20분 거리, 북해 연안에 위치해 있고 동쪽(Oost)과 끝(End)이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가 어원이다. 아니 잠깐만, 벨기에 서쪽 끝에 있는 도시 이름이 왜 동쪽 끝이지? 내가 동서남북 방향을 잘못 알고 있었나, 도시의 이름을 붙인 시대에는 방위 체계가 달랐나, 대륙에서 동쪽이 아니라면 바다 기준으로 동쪽이라는 건가, 수많은 가설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리 유명한 도시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가 아니라 오래 걸리긴 했지만 결국 이유를 찾아냈다! 중세 시대에는 벨기에 본토 바로 서쪽에 Testerep이라는 섬이 있었고 그 섬에서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도시여서 Oostende라는 이름이 붙었던 것. 현재는 본토와 연결되어 더 이상 섬이 아니라 벨기에의 서쪽 해변이 된 것이었다. 그야말로 ‘알아 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 따로 없다.

출처 : https://pin.it/28f1VpW
네이버 지식백과 수정이 필요합니다!

유럽에서 기차로 1시간 반이면 도시 간 이동 치고는 길지 않은 시간이다. 기차역에서 일단 해변 먼저 갔다가 도심지를 둘러보고 성당을 들러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오는 계획. 날씨도 어쩜 이리 화창해서 발걸음도 기분만큼 가벼워졌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항구가 보인다. 이쪽만 쭉 따라가면 해변이 나올 것 같다.

해안을 향해 기분 좋게 걸어갑니다

7월 말은 한여름이라 더울 거라는 나의 상식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바다 바람은 매서웠고 바닷가는 추웠다. 열심히 그늘을 피해서 예쁜 모래사장을 천천히 걸었다.

언제나 푸른 하늘과 깊은 바다와 넓은 모래사장은 왠지 모를 해방감을 준다

예상대로 도심은 작았고 지도를 보며 찾은 것도 아닌데 얼마 가지 않아 대성당을 만났다. 역시나 웅장한 성당이 마을 규모와는 대조적으로 위풍당당하게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성당은 언제나 꼼꼼히

바닷물에 발 한 번 담그지 못하고 오스텐트를 떠났다. 특별히 볼거리가 많지 않지만 그래서 이렇게 한 바퀴 둘러보고 가는 게 아니라 며칠 여유롭게 머물며 진정한 휴양을 즐기러 오면 더 좋을 도시.



기차로 20분이 채 걸리지 않아 브뤼헤(Brugge)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 일정에 브뤼헤를 넣은 것은 순전히 페이스북에서 본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페이스북에서 본 출처 미상의 사진 (문제 시 알려주세요)

역에서 나와서 지도 없이 걷기 시작했다.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는 이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 중심지겠거니. 역에서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분위기가 조금씩 바뀐다. 길이, 담장이, 건물의 색과 무게감이 현대의 것들과는 다르다.

성문을 들어서는 순간 ‘자, 여기부터 중세야!’라고 외치는 듯했던 독일의 로텐부르크나, 눈앞에 있지만 마치 다른 세계의 존재인 것만 같았던 프랑스의 몽생미셸과는 또 다르게 도심을 향해 걷고 있으면 배경이 서서히 중세로 바뀌는 듯했다.

조금씩 조금씩 중세로 들어가고 있는 듯한 착각
이런 색감과 이런 질감, 그저 좋다

이곳은 교통편을 알아볼 필요도 없고 지도도 필요 없다. 그냥 내키는 대로 걷다 보면 금방 성당이 나오고 또 금세 시청 앞 광장에 도착했다가 다시 한적한 골목이 나타난다. 그냥 걸어만 다녀도 좋은 곳. 누구나 너무 바쁘고 복잡한 현실에 살고 있으니 그것들을 피해 온 여행에서만큼은 이렇게 나만의 여유를 찾아보는 게 어떨런지.

무심코 눈앞에 펼쳐진 중앙 광장과 마켓
드디어 만난 사진 속 그 광경

평소에는 내가 화려하고 복잡하고 서로에게 무관심한 도시의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해왔는데 여행을 다니면서 의외로 한적하고 여유로운 쉴 곳을 찾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내, 며칠 정도만 고요한 곳에 있어도 그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이것저것 할 일을 만드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한다. 처음에는 나라는 한 사람에게서 이런 극단적인 두 성향이 나타나는 것이 꽤 당황스러웠고 둘 중에 하나를 ‘이게 나의 성향이야.’라고 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괴롭게 고민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한 사람의 캐릭터를 전형적인 성격 유형처럼 한 가지로 정할 필요도, 그럴 수도 없다는 당연한 결론에 도달하고 나를 괴롭히지 않게 되기까지 정말 많은 여행이 도움이 되었다. 아니, 도움을 넘어서 여행이야 말로 내가 나 자신을 발견하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다.

현실에서는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빠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에 대해 생각해 줄 시간이 많지 않으니 여행을 통해 이렇게 일부러 현실에서 벗어나는 시간을 갖고 내가 모르던 나의 어떤 부분을 발견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 인생에 큰 즐거움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길게 쭉 뻗은 나무들과 예쁘게 피어있는 수국, 평화롭다
이 장면에서 가장 좋았던 건, 저런 여유


여행에서 제일 자주 만나는 건,

언제나 나 자신.



그저 생각에 잠겨 걷기 좋은 브뤼헤를 떠나 헨트(Ghent)로 출발했다. 이곳 역시 페이스북에서 사진 한 장 보고 근교 도시 리스트에 올린 곳이다. 다시 기차로 30여 분.

사람 홀리는 이런 사진 (출처 미상, 문제 시 알려주세요)

역에서 밖을 얼핏 보니 내가 사진으로 본 그 모습이 아니다. 중심부까지 꽤 가야 할 것 같은 직감이 든다. 직원에게 물었더니 걸어서 30분은 가야 할 거란다. 날씨가 좋으니 걸어도 괜찮을 거라며 길을 알려준 친절한 직원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기차역 부근은 신시가지로 깔끔하고 반듯하다. 구시가지 중심부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감 가득 걷기 시작했다. 큰길을 따라 쭉 걷다 보면 아주 쉽게 구도심을 찾을 수 있다. 넓은 보행자 도로 양쪽으로 대형 상점들이 들어서 있고 인파에 떠밀려 그 거리를 지나면 이내 사진에서 보던 그곳에 도착한다. 레고로 금방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주택과 성들, 그리고 도시의 중심인 대성당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찾았다
투박하고 무게감 있는 건물들

성당 앞 종탑에 올라 도시 탐색을 시작했다.

높은 곳은 일단 올라가 본다

이럴 때야말로 무거운 카메라의 광학 줌 기능이 빛을 발한다. 높은 곳에서 도시를 쭉 둘러보다가 눈에 들어오는 건축물이나 조형물이 있으면 줌을 당겨서 자세히 살펴보고 가 볼만하다 싶은 곳을 기억해 둔다. 방향만 대충 알면 찾아가는 건 그냥 본능에 맡기면 된다.

카메라만 믿고 줌 한 번 최대로 당겨봅니다

평소에도 길 찾는 건 굳이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몸 가는 대로 가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다. (아, 운전은 또 다른 얘기다.)

어느새 도착한 목적지

누군가는 어떻게 길을 이렇게 잘 찾냐며 신기해하지만 사실 그건 나도 설명하기 어렵다. 심지어 목적지를 한 번에 찾아야지, 마음먹고 가는 길을 고민하고 출발하면 오히려 이리저리 헤매게 되는데, 반대로 여기 골목이 예쁘니 좀 돌아다니다 가자, 하고 정처 없이 걸으면 금방 목적지에 도착해버리니 이게 길을 잘 찾는 게 맞기는 한가 싶기도 하다.

굳이 목적지를 정하지 않아도 좋은 곳



동쪽 끝이라는 이름의 서쪽 끝 해안 도시 오스텐트, Oostende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았던 브뤼헤, Brugge

거대한 레고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중세 도시 헨트, Ghent


누군가에게는 볼거리 많지 않은 작은 도시로 보이겠지만

도시 안으로 들어가 천천히 걸으며 살펴보면

매력에 푹 빠질 수밖에 없는

벨기에의 아름다운 도시들.

매거진의 이전글 Back to the 2015, Brussels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