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여전히 처음 해보는 것들 투성
모두 경북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에서 벌어졌다.
[ 전씨네 ]
아빠 : 진해 씨
엄마 : 송여사
아들 : 치수, 나는 '야'라고도 자주 부른다.
막내딸 : 막돼먹은 혜원 씨, 나
이모부 : 시내에서 우리 집으로 출퇴근하신다.
[ 동네 아저씨들 ]
기선이 아지아(아재)
초희 언니네 아저씨
옆집 아저씨
밖이 소란스러웠다. 어랏 아직 5시 안 됐을 텐데. 양말 속으로 바지 밑단을 쑤셔 넣고는 헐레벌떡 겉옷을 챙겨 나갔다. 아저씨들이 믹스 커피를 한 잔씩 마시며 잠을 깨우고 계셨다.
치수 : (비몽사몽) 안녕하세요.
초희 언니네 아저씨 : 치수야 미리 커피 딱 끓여놓고 기다려야지
혜원 : (이상하게 쌩쌩) 안녕하세요!
기선이 아지아 : 혜원이도 가려고?
혜원 : 예!
아빠 : 체험학습 간다 안카나
6월 4일 자 채밀 크루는 아빠, 오빠, 이모부, 동네 아재들, 그리고 짐덩이 혜원. 총 일곱 명이었다.
트럭에 탈봉기와 채밀기, 말통을 싣고 꿀을 뜰 장소로 향했다. 처음 해보는 것들이라 설레서였을까. 전날 한 번 와봤었는데도 오늘따라 더 멀게만 느껴졌다. 굽이굽이 휘어진 산길을 끝없이 올라갔다.
혜원 : 지엽어서(지겨워서) 여길 어째 맨날 다니노? 여름엔 피서객도 많아서 오가기 안 좋겠다.
치수 : 꿀 뜰 때만 옮겨둔 거라.
혜원 : 아하
아카시아 꿀은 이미 5월 말에 끝났고, 요샌 야생화 꿀을 뜨는 시기였다. 한 20년 전엔 아빠가 동네 아저씨들이랑 일주일 넘게 전국을 돌아다니며 아카시아 꿀을 떠서 돌아왔었는데 지금은 그렇게까진 안 하는 것 같았다.
야생화 꿀은 잡화꿀이라고도 하는데, 이름 그대로 여러 꽃들에게서 얻은 꿀이다. 야생화 꿀들마다 맛과 향이 조금씩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아카시아 꿀보다는 색이 짙고 밤꿀보다는 옅다. 마니아층 사이에서 야생화 꿀을 찾는 편이다. 면역력과 피로 해소에 좋다고.. 꿀에 대해 적으려던 글은 아니기에 여기까지만 하고..
서로 품앗이를 하다 보니 분업화가 잘 되어 있었다. 각자의 일을 하느라 분주스러웠다. 기선이 아재는 집엘 갔나, 어디 딴 길로 샜나. 우리가 도착한 지 10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았다. 오빠 말에 의하면 통시(변소)에 갔을 거라고 했다.
나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간식과 벌망 모자를 차에서 내려두곤 사진이나 찍었다. 다들 내 카메라를 의식하고 더 열심히 하는 눈치였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오빠 이건 뭐야? 아빠 저건 뭐 하는 거야? 이거 여기 둘까? 우와 신기하다!> 옆에서 쫑알쫑알 귀찮게 굴었다.
어릴 때 아빠 벌장에 가면 벌들이 <네가 주인 딸이냐>며 다가온 것뿐인데 겁이나서 고함치며 달아나다 되려 쏘이곤 했다. 그래서인지 한동안은 아빠가 날 안 데리고 다녔다. 중, 고등학생 땐 아빠가 벌을 키우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무관심했다.
서당 개 삼 년에 풍월한다고 이젠 꿀벌을 잡아먹는 말벌을 잠자리채로 잡아 발로 삐대 죽인다거나, 벌통을 2단으로 만드는 개상 작업 정도는 옆에서 도울 수 있게 됐다. 나름대로 공짜로 먹는 꿀값은 하고 있다. 오빤 내가 겁도 없이 벌통 입구 앞을 성큼성큼 걸어 다니면 <쟤 한 방 쏘여봐야 되는데> 저주하지만 용케 아직 한 번도 안 쏘였다.
오빠는 작년부터 아빠에게 양봉을 배우고 있다. 아빠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께 양봉을 부업으로 이어받았다. <인터넷에 꿀 파는 사람들 보니깐 '몇 대째' 하면서 홍보하던데 그럼 우리 집도 3대라고 적어야 하나?> 농담 삼아 물었더니 오빠는 <말만 3대째지. 아빠 잘 모르는 것 같아여>라고 했다. 그러기엔 아빠가 매해 꿀을 많이 떴는 걸. 올해 양봉가에서 꿀벌들이 떼죽음을 당해 걱정했는데 다행히 우리 집은 비껴갔다.
아빤 내게 시범을 보이더니 그새 싫증이 났는지 내게 떠넘기고 다른 일을 하러 떠났다.
<오예 할 일이 생겼군. 맡겨만 주소>
사라졌던 기선이 아재와 초희 언니네 아저씨가 드디어 도착을 했다. 그제야 제대로 된 분업 시스템이 가동에 들어갔다.
1번(치수) : 집게처럼 생긴 전동 탈봉기로 벌집을 하나씩 들어 올려 벌을 털어주고, 3번 아저씨께 전달. 빈자리엔 채밀을 끝낸 벌집을 다시 넣어주기
2번(옆집 아저씨) : 훈연기 및 1번 보조 봐주기
3번(초희 언니네 아저씨) : 1번이 털어낸 벌집을 자동 탈봉기에 살살 넣었다 빼서 4번에게 전달
4번(혜원) : 전달받은 벌집을 차곡차곡 상자에 넣어 힘차게 "가져가세요!" 외치기
5번(기선이 아지아&아빠) : 벌집 운반 및 채밀이 잘 되고 있나 확인. 이 사람 저 사람 간섭
6번(이모부) : 채밀기에 벌집 꽂기. 말통 싣기
원래는 내 역할이 형진이 아저씨 담당이었다. 상자가 가득 차면 채밀기까지 운반하고, 채밀을 끝낸 벌집 상자를 다시 가져오는 것까지 도맡으셨다고 했다. <그럼 아빠랑 기선이 아재는 뭐해요?> 물었더니 모두가 한 입으로 <놀지!>라고 대답했다. 형진이 아저씬 초상을 치르러 부산에 가셔서 오시지 못했다.
멤버들의 키가 다 작아서 만화 영화 미니언즈 마을 같기도 했다.
일을 하며 적막을 깨는 사람은 초희 언니네 아저씨와 나였다.
벌이 오빠에게 달려들자
아저씨 : 야들이 주인도 못 알아보노. 술이 덜 깼나
혜원 : 잔뜩 취해뿟네요.
게으름 피우던 기선이 아재가 벌에 쏘이자
아저씨 : 네가 수도 사는 놈이냐? 인사하러 왔네
혜원 : 객식구를 왜캐 많이 데려왔냐고 혼내는 건가 봐요.
꿀을 잔뜩 머금고 있는 벌집을 들어 올리면서는
아저씨 : 아따~ 담배도 안 피고 일했나
혜원 : 주인(아빠)이랑은 다르네요
아저씨와의 티키타카가 즐거웠다. 벌을 친구처럼 이야기하시는 게 아이 같고 재치 있어서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드문드문 주위의 나무들을 둘러보며 <옛날에 저 나무가 진짜 많았는데> 하시는 모습이 어쩐지 구슬프기도 했다. 아저씨껜 내가 여기서 보고 자란 숲과 산보다 더 울창하고 푸릇한 추억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아저씨 : 치수야 여기 췽췽나무가 많네. 벌들이 췽췽나무 좋아해
층층나무를 아저씨는 '췽췽나무, 췽췽나무'하시며 수줍게 웃으셨다.
새참을 먹느라 잠시 작업을 멈췄다. 빵을 먹었더니 배가 불러 아침밥이 잘 안 넘어간다는 민원에 간단하게 카스타드로 준비했다. 아이처럼 철퍼덕 땅에 앉는 어른들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이 동네 아저씨들은 각자의 어린이를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지나가는 등산객 아저씨들께 <꿀 좀 먹고 가소>하는 아빠와 아저씨들은 마치 동네 아이들이 꿀을 머금고 있는 꽃잎을 나누는 모습 같았다.
이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벌과 함께했다. 오후엔 형진이 아저씨네 벌도 봐줘야 했다. 부산에 가시기 전에 오빠에게 벌을 부탁하고 가셨다. 우리 집 벌들이 윙윙~하고 움직인다면 아저씨네 벌은 왕왕왕!!! 잽싸게 움직였다.
혜원 : 느낌이 싸한데.. 아무래도 한 방 쏘일 것 같아여
치수 : 진짜 왜캐 달려들지
다음날 만난 아저씨께 <아저씨, 벌 진짜 무섭게 달려들던데요> 했더니 아저씬 <사람 억수로 좋아하제~~> 하셨다. 며칠 전 우리 집 벌에 쏘인 아저씨 한 분이 <전사장, 나 여기 볼에 쏘였어> 투정을 부리자 <형님! 5천 원! 봉침 값 주소>하던 게 문득 떠올랐다.
아, 능청스러운 천덕꾸러기 마을이롤세. 나도 위트 있는 농담을 자연스레 던지는 노련미 풍부한 어른이자 시꺼멓게 탈만큼 자연에서 뛰노는 아이이고 싶어라.
엄마는 30여 년 간, 채밀을 하고 돌아온 이들에게 아침밥을 해줘야 해서 꿀 뜨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건 이렇게 하는 거고, 저건 저렇게 하는 거라며 체험학습 기념 사진과 영상들을 보여줬다. 엄마에게 일일 선생님이 되어주었다.
탈봉기 아래에 모여있는 벌들이 위로 올라오지 못하는 걸 바라보며 <들어올 수는 있어도 나갈 수는 없다며~>란 노랫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 노래는 가수 파제의 미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