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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친절하고 고마웠던 그 친구를 그렇게 떠나보냈다

내가 에너지 뱀파이어의 먹잇감이었다니

by 유리멘탈 심리학자

그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는 박사과정 유학생 시절이었다. 온통 현지 백인들과 유럽에서 유학온 백인들 천지였던 환경에 외국 생활이 처음이었던 나는 적응이 쉽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비록 어린 시절 이민 왔다 해도 같은 동양인인 그 친구의 등장은 나에게 한줄기 빛과 같았다. 그 친구는 친절하게 나의 현지 적응 및 학업 적응을 도와주었다. 나는 그 친구와의 만남이 항상 즐거웠고 사람으로서 많은 부분 좋아하고 존경도 했다. 학업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지 약 10여 년이 흘렀지만 우리는 자주 연락했고 그곳으로 다시 여행 갔을 때도 만나기도 하며 친분을 이어갔다. 그 친구와는 세부전공이 달라 업무적으로 얽힐 일이 전혀 없는데도 그저 그 친구가 좋아서 친분을 이어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그에게는 내가 그저 에너지 뱀파이어의 먹잇감에 불과했다는 엄청난 사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이 건강하지 못한 관계의 시작은 나의 외로움으로 부터였다. 유학생 시절 나는 많이 외로웠다. 나 자신이 사막에 홀로 남겨진 풀 한 포기 아니면 외딴섬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무서웠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생존하는 것 자체에 불안감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이런 상황에서 그 친구가 내 뒤로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너무 반가웠다. 어렸을 때 이민 왔다지만 그 친구는 현지 문화 반, 본인의 헤리티지 문화 반을 적절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겠지만 나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느꼈다. 친절하고 따뜻하고 다정한 그 친구에게서 편안함과 안전함을 느꼈다.


많이 고마웠다. 언어적, 문화적, 경제적, 학업적으로 내가 그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눈곱만큼이라도 그 친구에게 받은 도움을 돌려주고 싶었다. 그 아이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설사 내가 관심 없는 주제에 대해서 떠든다 할지라고 그저 배운다는 자세로 대화에 열정적으로 임했다. 음. 그게 잘못이었을까나. 그 세월이 오래가자 조금씩 쌔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뭔가 그 친구와 대화하면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 친구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우월성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즐겼고 나에 대해서 내가 가진 것에 대해서 폄하한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그 친구는 뽐내고 나는 손뼉 치고 있는 형국이랄까.


그래도 그냥 넘겼다. 내가 예민해서 일 거야 내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일 거야. 은인에게 그러면 안 되지.라는 말로 나 자신을 타이르며. 그러다가 드디어 터졌다. 그간에 쌓여왔던 쌔함이 한계치를 넘긴 것이다. 그 계기는 최근에 그 친구가 가족을 떠나보낸 힘든 일로 인해서였다. 처음에는 나도 너무 슬펐다. 멀리 떨어져 있어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는 상황이 너무 답답했다. 내 상황에서 최대한으로 도움이 되고 싶었다. 친구니까. 그 친구를 나만의 말로 정성껏 위로했다. 그 친구의 슬픔을 내가 나눠가진다 해도 전혀 상관없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자신이 얼마나 이 역경을 잘 헤쳐나가고 있는지에 도취되어 나의 칭찬만을 쏙쏙 받아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족을 잃은 상황에서 이 슬픔까지도 성숙하게 잘 대처해 나가는 자기 모습에만 집중하다니. 섬뜩했다. 마치 드라마 속 주인공에 빙의된 것처럼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옆에서 나는 그 친구를 숭배하고 추앙하고 손뼉 쳐주는 주인공 친구 1로서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 이게 뭐지. 띵했다. 나는 이 친구에게 동등한 입장에서 솔직한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아니라 자기를 추앙하고 떠받들어주는 시녀였구나. 아. 이제 이 드라마에서 탈출할 때가 온 거구나.




슬프게도 나는 여전히 죄책감을 느낀다. 그 친구가 유학시절 많은 의지가 된 것은 팩트다. 나는 도움이든 뭐든 받았으면 2배로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고 검은 머리 짐승은 은혜를 알아야 한다는 인생관에 맞춰 살아왔기에. 뭐 정서적으로 나를 이용했다 한들 그게 뭐 그렇게 죽을죄인가 싶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사람 손절하다 보면 내 옆에 아무도 안 남을 것 같기도 싶고 타인에게 높은 잣대 들이대기엔 나도 꽤나 엉망진창이고, 아니 분명 누군가에게는 나도 쓰레기지 뭐. 아무튼 마음이 복잡하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 속이 후련하다. 그 친구와 인연을 이어가면서 그 친구는 교묘하게 내가 영어를 잘 못한다는 자괴감을 끊임없이 느끼게 만들었고 그 친구보다 일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열등한 존재임을 인지시켰다. 또한 내가 전혀 관심 없는 주제에 대해 끊임없이 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주었기에 이 부정적인 감정들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드디어 그간 느꼈던 쌔함의 원인을 찾은 것이다. 이제서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일까. 아직도 확신은 크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다가오는 친절하고 다정한 가면을 쓰고 있는 에너지 뱀파이어를 경계할 수는 있겠지. 그래. 그거면 되었다. 우당탕탕 실수하면서 배우는 거지 뭐. 명심하자. 다음에 또 속으면 그때는 진짜 나의 지능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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