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캠핑장에서 낯선 사람들과 저녁자리를 가졌다. ‘의도치않게’, ‘충동적으로’ 따위를 붙일 행동이긴한데, 사실 난 이런 일을 반긴다. 언뜻 불편할 것만 같지만서도 한켠으론 묘한 해방감이 있다. 평소 내가 입었던 역할과 편견을 벗을 수 있으니까. 내가 뭘 입어도 되는 상태인 셈이고, 그건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이런 연유로 낯선 이와 만남은 여러모로 내게 소중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것이 생각만큼 의미있는 일로 이어지진 않는다. 대부분 주어진 유니폼(역할)을 입고 살던 나는, 무엇을 입어야할지 갈피를 못잡는다. 다시 말해, 나를 소개하는 일을 어려워한다. 회사의 나, 친구들 속의 나로 행동할 때, 대화를 잇는 건 쉽다. 나는 그들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공유받았으므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는 과정이 필요없다. 또는 알필요 있는 정보의 범위가 명확히 정해져있다. 한마디로 해야할 말의 범위가 정해져있다는 말인데 이 지점은 득이자 실이다. 사회의 네비게이션이 안내한 대화 경로는 좀처럼 다른 길로 새지 않는다. 이 익숙한 길만 따르다간 나는 그 안에서만 존재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던 어떤 나는 점차 쪼그라들고 있는 건 아닐까.
낯선이와의 대화도 물론 패턴이 존재한다. 처음 까는 패는 직업, 나이. 결혼유무 등의 사회적 정체성이다. 사람들에게 공유된 사회적 정체성으로 개인의 대략적인 외연을 가늠해보는 작업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좋은 대화는 그 외연을 비틀고 깨는 작업이다. 그래서 결국 낯선이와 만남은 나를 어떻게 세련되게 보여줄 것인가하는 문제다. 낯선이에게 나의 사회적 정체성(편견)에 속하지 않는 개인적 정체성을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일이다.
개인적 정체성이란, 결국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하는 ‘의견’이다. 낯선이와의 대화에서 모두가 아는 생각과 대화패턴을 나눈다면, 그래서 결과적으로 내가 알던 사실을 강화하는 일이라면 그건 하등 의미없는 일이다. 편할 수는 있겠지만.
반대로 의견을 표시할 땐 조심해야한다. 이건 냄새 같은 거다. 은은할 때는 호도 있고 불호도 있지만, 너무 강하면 대부분에게 불호다. 농담에 섞어서, 관련된 무언가에 슬쩍 빗대서 은근히 전해야한다.
나는 이 짓을 매번 실패하기 마련이고, 실패의 기억은 보통 샤워 중에 찾아오므로 아앜 소리를 지르곤 한다. 낯뜨거운 얘기지만, 그 소리는 새로운 내가 내는 소리가 아닐까란 우스운 생각을 해본다. 그 미숙한 내가 잘 다듬어지면 더이상 소리지르지 않겠지하는 생각. 그래서 일단은 소리지를 일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