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사무라이> 또는 <고독> 또는 <한밤의 암살자>
※ 제목과 상관없는 잡설이 대부분입니다
<시네마 지옥>이란 영화 모임에 간 적 있다. 영화 모임은 아니었었나? 아무튼 새벽내 술과 폭력 영화를 즐기며 낄낄 대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처음 영웅본색 2를 봤다. 너무나 웃기고, 조악하고, 폭력적이며, 간지나는, 그런데 왠지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런 영화였다. 그 뒤 영웅본색2는 내 최애 영화가 됐다. 어디가서 영웅본색2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리 반가울 수 없었다. 고향 사람을 만난 기분 뭐 그런거 비슷했다.
그 뒤로 오우삼 영화를 많이 찾았다. <첩혈가두>, <첩혈쌍웅>, <종횡사해> 등등. 쭉 돌고 나서도 갈증해소가 안 되던 나는, 홍콩 느와르라 불리는 여타의 작품들을 찾아봤지만 영 그 느낌이 안 났다. 서양으로 넘어가 필름 느와르도 찾아봤지만 마찬가지였다. 결국 포기하고선 내가 느낀 느낌은 오우삼만이 가능한가...하고 잊고 살았다.
우연찮게 어제 'Le samurai'라는 영화를 봤다. 일단 프랑스 영화인데 뭔놈의 사무라이를 제목으로 해놓은거지. 주인공이 칼이라도 들고 설치는 건가. 잘생긴 프랑스인이 페도라에 레인코트를 걸치고 뭘 한다는걸까. 포스터와 제목만 보고 끌리는 건 오랜만이었다. 시리즈온에서 1,500원을 결제하고 봤다.
나의 감상은 이렇다. 이 영화를 예찬하는 수많은 말이 있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비로소 어렸을 때 이해하지 못했던 '느와르'에 대해 이해한 것 같다. 느와르란 무엇이냐. 개똥폼을 잡는 장르다. 하지만, 똥폼의 특성상 그건 관객에게 언뜻 우습게 비춰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 웃음을 압도할만한 개똥폼이란 게 존재한다. 그걸 영상적으로, 특히 캐릭터적으로 구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느와르였던 거다....고독하고 심각하고 마음을 알 수 없는 캐릭터. 그리고 그의 무채색 같은 마음에 감정의 물감을 흩뿌리는 주변 인물과 서사...(반박 시, 설득할 자신 없음)
좋은 느와르 캐릭터가 갖춰야할 덕목은 무엇이냐.
잘 생길 것, 코트, 흰장갑 같은 아이템을 사용할 것, 고독할 것, 자그마한 애완동물을 키울 것...등등 이겠지만 내가 알랭들롱에게 꽂힌 부분은 페도라를 고쳐 쓰는 모습이었다. 이것이 바로 <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이 양아치 운전자를 패기 전에 자켓 단추를 잠그는 모습!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이 바바리 코트를 휘리릭 입어 제끼는 간지의 원조일까...! 알랭 들롱이 루틴처럼 페도라를 섬세하게 고쳐쓰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게 뭐라고 인상적이냐. 알랭들롱은 딱히 대사가 없기 때문이다. 즉, 캐릭터의 빈 공간이 많다. 때문에 관객으로서는 저 새끼가 왜저러나 하면서 행동 하나하나가 눈이 간다.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나름대로 캐릭터를 추측해가는 맛이 있다.
그래도 그렇지, 그렇다곤 해도, 빈 공간이 커 상당히 불친절한 영화다.
마지막에 피아니스트가 왜 전화를 안 받고 쨌는지, 피아니스트 집에는 왜 보스가 와 있었는지. 알랭들롱은 왜 빈총으로 피아니스트를 찾아갔는지. 명확하지가 않다. 이것도 대략 추측해서 넘겨짚어야 하는데, 내 추측은 이렇다.
일단 피아니스트는 왜, 살인자인 알랭들롱을 못본 척 하고, 종극엔 범죄집단에 척을 지는 일을 했을까. 범죄집단 놈들이 싫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합리적인 추측은 '피아니스트가 알랭들롱에게 반해서'로 봐야한다. 이건 딱히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다. (근거: 위 사진의 알랭들롱 얼굴) 다음, 왜 피아니스트는 일부러 알랭들롱의 전화를 받지 않았을까. 이유는, 알랭들롱을 궁금하게 해서 직접 자신의 집으로 오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왜냐면 거기 알랭들롱에게 줄 선물을 갖다 놨으니까. 영화엔 생략됐지만, 피아니스트는 여차저차해서 보스를 자신의 집에다 불러다 놓은 걸거다. 먹기 좋게. "타겟은 갖다 놨으니, 숟가락만 드십쇼"하는 거다. 그렇게 알랭들롱은 최종적으로 복수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알랭들롱은 피아니스트가 있는 바에 갔을까. 일단 윗 문단의 전개를 따를 때, 알랭들롱은 피아니스트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상태다. 그는 그녀에게 고마움을 전하러(혹은 사랑하는 마음을 주고 받으러) 갔다고 봐야한다. (만약 사랑하는 마음을 주고 받으러 갔다고 한다면, 직전의 알리바이녀를 만나는 시퀀스는 알리바이녀와의 이별을 의미한다고 봐야할 것이다) 근데 고맙다는 놈이 피아니스트한테 총을 겨누고 지랄일까. 그것도 빈총을! 이 부분이 매우 미스터리한 부분인데, 나의 결론은 이렇다.
이 새끼는 너드 킬러다. 사람이나 죽여댈 줄 알지 저런 마음을 '일반적이게' 표현할 줄 모르는 놈인 거다. 프로페셔널한 너드 킬러입장에서 보자. 바에서 대놓고 장갑을 끼고 스테이지에 총을 가지고 올라가 겨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바로 그러니까 그에겐 일종의 농담이었을거다. 하지만... 사회성이 부족했던 그는 중요한 사실을 놓쳤다. 존나 안 웃기다는 사실을. 이 개그는 피아니스트는 물론이고 좌중을 얼어붙게 만들었고, 그 적막은 오직 총소리로만 깰 수 있었다.
사실 이 장면이 없었다면... 영웅본색2까지 굳이 꺼내며 얘기를 안 했을 거다.
왜냐면 이 장면은 내 기준 웃긴 장면이기 때문이다 . 이 장면으로 하여금 르 사무라이는, 웃기고, 조악하고, 폭력적이며, 간지나는, 그런데 왠지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나에게 그런 영화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