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서 일어난 일
2주 전 초등 6학년 둘째 아이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과학 시간에 H라는 남학생이 선생님께 크게 혼났다. '선생님이 째려보고 계신 것 같으니 조용히 하세요'라고 했다는 이유였다. 실습을 하던 딸아이는 갑자기 다른 조에 있던 H가 너무 크게 혼이 나는 것을 보고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억울한 면이 있었다고 했다. H의 의도는 학급을 조용히 시키려는 것이었다.
H는 평소 수업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해서 특히 과학 시간에 지적을 많이 받던 터였다. 과학 시간에는 교실에서 과학실로 이동하고, 전담 선생님이 수업을 하신다. 익숙했던 공간. 아이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모두 벗어나는 과학 시간은 아이들에게 자유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실험이라도 하게 되면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떠들거나 돌발 행동을 할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초등학교 6학년 아이의 시각에서, 제삼자의 입장에서 전해준 이야기다. 그러나 충동성이 높은 아동이 교실에서 어떤 사건에 연루되고,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해 보면 아이의 이야기는 일리가 있었다. H는 돌발 행동을 많이 하기는 하지만 남을 괴롭히거나 나쁜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평소 과학시간에 자주 혼났던 H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켜 칭찬을 받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선생님 귀에 들릴 정도로 '선생님이 째려보고 계신 것 같다'는 구절을 넣어버린 아이의 문장은 선생님에게 조롱의 의미로 가닿았을지도 모른다. H는 어떻게 말해야 상대가 기분이 덜 나쁜지 정제된 언어로 적절한 톤으로 표현하는 법을 모를 확률이 높다.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기에 느낀 대로 말했을 것이다.
문제는 선생님의 지적이 훈육이나 지도가 아닌 분노가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같은 학급 학생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꽤 오랫동안 H는 홀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딸아이는 '너희 반에 괜찮은 애들도 많은데 하필이면 너 하나 때문에 반을 이렇게 만드냐'는 선생님의 고함을 기억했다. 교육자가 아닌 내가 감히 여기에 대해 판단할 수는 없다. 이러한 돌발행동은 하루 이틀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행동을 넘어 '존재'에 대한 가혹한 언어는 아이에게 반성이나 배움 대신 상처만 남겼을 것이다. 나 역시 육아의 현장에서 아이에게 교육의 의미를 넘어선 분노를 표출한 적이 있기에 선생님의 입장에 공감이 가기도 한다. H는 평소에도 수업을 자주 방해하거나 선생님 말씀을 끊었던 학생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에게는 주어진 시간 내에 반 아이들을 교육해야 할 임무가 있다. 그러니 선생님은 양육자나 치유자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2025년의 교실에는 단순히 '말을 듣지 않는 아이, 산만한 아이'라고만 볼 수 없는 아동들이 생각보다 많다. 지도와 교육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 버릇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스스로 충동성을 조절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끝없는 지적과 비난에 상처를 쌓아간다. 행동에서 시작된 문제지만 존재 자체가 비난받을 때, 아이들은 수치심을 키워간다. 수치심은 감정의 심연으로 내려가지만, 어느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공격성으로 고개를 쳐들 수 있다.
내 아이의 일이 아님에도 이토록 마음이 갔던 이유는 나도 어릴 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아이였기 때문이다. 엉뚱한 질문, 사소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나에겐 그럴만한 사람이 없었다. 엄마는 내가 너무 말이 많아서 피곤하다며 들어주지 않았고, 동생은 다섯 살 차이가 나서 대화 상대가 되지 않았다. 2년 넘게 수업했던 미술 과외 선생님에게 내적 친근감을 느끼고 그림을 그리며 이것저것 얘기해 보았다. 그룹 수업을 했던 선생님은 나를 '수업시간에 쓸데없는 말이나 하는 아이'로 치부해 버렸다. 그려야 할 그림은 다 그렸는데도 말이다. 행동이 아닌 존재를 비난했던 선생님의 눈빛과 말투를 기억한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유령이 되어 딸아이가 겪었던 과학시간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H의 말을 오롯이 들어주고 싶다. 아이들이 떠들고 선생님이 째려보시는 것 같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지막이 상의해보고 싶다. 그렇게 수업을 해야 하는 선생님의 수고도 덜어질 것이다.
H가 성장하면서 덜 상처받고 행동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교육현장의 선생님들에게도 이 혼란과 버거움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지원이 제공되기를 바라본다. 나처럼 주워듣는 이야기 말고, 정부가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