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촌년, 바다를 덕질하다 거제에 내려가다
<2020.09.19 씀, 2021.02.02 고침>
바닷가에 대하여 - 정호승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잠자는 지구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싶을 때
지구 위를 걸어가는 새들의 작은 발소리를 듣고 싶을 때
새들과 함께 수평선 위로 걸어가고 싶을 때
친구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지 못했을 때
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었을 때
모내기가 끝난 무논의 저수지 둑 위에서
자살한 어머니의 고무신 한 짝을 발견했을 때
바다에 뜬 보름달을 향해 촛불을 켜놓고 하염없이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싶을 때
바닷가 기슭으로만 기슭으로만 끝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하나씩 있으면 좋다
자기만의 바닷가로 달려가 쓰러지는 게 좋다
대학 시절 국어교육을 전공했지만 ‘교사’라는 직업에 큰 뜻이 없어 남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 하지만 책을 사랑하고, 문학을 좋아하고, 시를 종종 필사하며 나름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중 나태주 시인과 정호승 시인의 따스한 글들은 힘든 순간순간마다 나에게 큰 위로가 되곤 했다.
여러 개의 아르바이트와 대외활동, 봉사활동을 병행하며 마음과 몸이 모두 지쳐갈 적 우연히 정호승 시인의 ‘바닷가에 대하여’라는 시를 접했다. 여수 출신인 시인은 그 얼마나 많이 바다를 보며 자라고, 살고, 울고, 웃었을까.
악착같이 살아서 성공해야겠다는 지독한 몰입과 결핍에 따른 금전적 집착, 빡빡하게 짜인 스케줄 사이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생긴 피로감으로 인해 마음이 어둠으로 뒤덮여갈 때였다.
흔히 사람들은 가슴이 답답할 때 바다를 본다고 한다. 바다를 보면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라던가 상쾌함, 여유로움 등을 느낀다고들 하기에. 그러나 내가 ‘바다’를 생각함에 있어 해소의 감정보다 포용과 이해라는 단어가 먼저 다가온 건 아마 이 시 때문이 아닐까.
‘바닷가에 대하여’를 처음 만난 그 순간, 열 번 스무 번이고 시를 하염없이 반복해 읽으며 위안을 얻고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시구 하나하나가 마음으로 스며들어와 한구석을 톡톡 두드리며 조그만 물방울을 만들어내자, 물결이 모여 푸르른 파도를 일으키며 시린 마음의 색을 곁에서 다독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인가, 언젠가 삶에서 꼭 한 번쯤은 바다 근처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시인이 바다를 보며 느꼈던 저 수많은 감정과 위로들을 나도 바다 근처에 살게 된다면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저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안정감을 찾고 삶의 활력을 다시 얻을 수 있을 것만도.
다만 서울 태생으로 바다를 자주 볼 일이 없었기에, 최대한 다양한 바다가 있는 곳으로 여행 다니며 익숙함과 안정감을 찾아다녔다. 곳곳에서 짧게 접하는 바다만으로도 행복함을 충분히 느껴 크게 만족하지는 못하더라도 소소한 활력을 얻을 수 있었다.
2017년 겨울, 미국 유학과 대학 추가 학기를 마무리하는 즈음 졸업 직전 IT 숙박 기업에 취업했다. 직무는 마케팅이었으나 정작 마케팅 외적인 업무도 수없이 밀려들어 왔다. 1년에 30번도 넘는 출장을 다니며 숙박업소를 인터뷰하고, 글을 쓰고, 매거진을 만들고, 교육하는 것 외에도 PR과 여러 부수적인 업무가 따르니 갈수록 심신이 지쳐갔다.
또 산업군 특성상 바다 근처 지역을 자주 방문하게 되면서, 장거리 운전과 과도한 업무가 더해져 마음의 안정을 얻고자 했던 바다가 일과 연루되어 지루하거나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대부분 숙박업소는 바다 근처에 많이 포진되어 있다)
바다가 싫어지다니, 큰 충격이야. 무심코 이 멘트를 친구에게 뱉었을 때 내 친구는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다며, 여전히 넌 바다를 보며 감동하고, 소리를 지르고, 사진 찍고, 눈길을 돌리지 않는 사람이라면서 날 위로했다. 그리고 얘기했다.
“진짜 바다를 보러 가보는 건 어때?”
진짜 바다라니, 바다에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었나? 내가 지금까지 지겹게 보던 바다는 바다가 아닌 강이었나? 얘가 나랑 장난하나 싶은 마음에 “나 진지해… 무슨 헛소리야!”라고 짜증 아닌 짜증을 부렸다. 그러나 친구의 말은 다른 생각 없이 온전히 바다 그 자체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시간과 공간을 찾아가 보자는 의미였다.
지난가을부터 올해까지 이 친구의 개인사업을 조금씩 도와주곤 했는데, 학원 강사를 하는 친구까지 셋이서 참 많이도 붙어 다녔더란다. 우리 셋의 공통점은 바다를 좋아한다는 것.
회사를 퇴근하는 순간부터 우리만의 제2의 업무가 시작되면 우리는 새벽 2시고, 3시고 모여서 친구의 사무실이나 동네 카페에서 함께 일하곤 했다. 그러다 일이 힘들 땐 노트북을 덮고 동네 산책을 하고, 한강에서 따릉이를 타고, 대화하고, 우리의 아지트인 동네 이자카야나 맥줏집에 갔다. (참고로 알코올 섭취 불가인 친구들은 탄산수만 마셔도 밤을 새우는 능력자들이었다) 종종 게임방에 가 농구 대결을 하기도, 코인 노래방에서 밤새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건 바로 충동적으로 바다에 가는 행위였다. 술을 못 마시는 친구 한 명 덕분에 우리는 언제나 기동성이 좋았고, 차를 늘 끌고 다녔던 나와 내 친구는 툭하면 서로 “바다 GO?”를 외치곤 했다. 서로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말없이 새벽녘 갑자기 떠나 만나는 바다의 느낌이란. 늘 설레고 반가웠다.
우리의 단골 바다는 늘 월미도와 오이도, 인천 앞바다, 강화도 즈음이 되었다. 종종 제부도 쪽을 들르기도 했다. 새벽이면 서울의 밤거리는 어둑어둑해지고, 통행량은 줄어든다. 차를 타고 때로는 180km가 넘게 속력을 밟아보기도 하고, 차량 오디오 볼륨을 크게 높인 뒤 노래를 가장한 소음을 맘껏 질러보기도 하고, 선루프를 열어 바람을 힘차게 맞다 보면 어느새 짙푸른 바다 앞에 도착해있었다.
바다 앞에서는 많은 것을 하지 않아도 늘 좋았고, 설렜고, 행복했다. 바닷가 앞 매점에서 소소하게 불꽃놀이 장난감을 사 와서 불을 붙이고, 간단하게 맥주 대신 음료수로 짠하면서 바닷가를 거닐고, 휴게소에서 컵라면을 끓여 먹고, 트렁크의 돗자리를 꺼내 모래사장에 앉아 밤하늘과 바다를 같이 구경하곤 했다. 엽기 사진을 잔뜩 남기다가도 서로의 인생 샷과 프로필 사진을 건져주고, 가끔 날이 선선할 때면 파도치는 바닷물에 발을 담가보기도, 가슴이 답답한 날에는 단전부터 소리를 끌어모아 시끄럽게 바다를 향해 소리치기도, 파도를 보며 서로 엉엉 울기도 하며 우리만의 추억을 하나둘 쌓아나갔다.
우리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 함께 했기에 서로 의지가 되었고 그 가운데에는 바다가 존재했다. 그렇게 우리에게 바다는 진정한 ‘바다’로 언제 건, 어디에서건 우리의 곁에 남아주었다. 같이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갈등도, 오해도, 싸움도 늘 있었지만 언제나 이를 해소해주던 매개체도 바다가 되었다. 우리에겐 “바다 보러 갈래?” 한 마디가 화해의 시작이자 깊이 서로의 마음을 듣고 이해하는 지름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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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의 모든 일을 접고 거제로 내려오겠다는 결정을 했을 때(물론 정말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가장 많이 말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최종적인 결정에 열렬한 응원을 보내준 친구들. 다른 건 모르겠지만 딱 하나 내가 부러운 건 “바다 앞에서 산다는 것”이라는 친구들에게 헤픈 웃음 대신 시니컬한 미소를 날리며 “다 같이 바다 앞에서 살자.”라고 말했을 때. 흔쾌히 먼 미래에 바다 근처에 오손도손 집을 짓고 함께 살자고 농담 아닌 농담조로 이야기를 나눴을 때. 우리의 눈빛 속에는 푸르른 바다가 담겨있었던 것 같다.
거제 바다 앞 숙소에 머물던 한 달 살기를 끝내고, 이제 정말 바다 바로 앞, 바다가 보이는 창문을 가진 집을 구해 바다와 함께 매일 아침을 열고 밤을 닫는 지금. 나는 그 언제보다도 따뜻하고 충만한 삶을 산다고 느낀다. 바다 앞에 가게를 열고 소소하게 하고픈 일을 하며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꿈이 하나 둘 현실로 나타나는 게 실감 나지 않기도 하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가득한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지 생각하며, 앞으로의 삶에서 고난과 시련이 있다 하더라도 바다가 치유해주리라 믿어보며. 누군가 여기에서 나와 같은 뜻으로 마음 맞춰 함께 할 날을 기다리며. 그렇지 않아도 마음으로 같이 머무는 사람들이 많음을 기억하며. 이렇게 거제에서의 여러 달이 지나가고 있다.
바다와 우리, 그리고 바다와 나. 함께 할 수 없었지만 항상 함께하고 싶었던 지난날을 지나, 이제 함께하고 있음에도 또 함께할 수 없는 날이 올 수 있음을 인정하는 날들을 보내며. 그렇게 가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