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대한 어떤 사설을 보았다. 30대 후반 9급 공무원에 신규 임용된 직원에 대한 글이었다. 그 직원은 국내 일류대학을 다녔고, 사법고시 응시에 거듭 실패하자 부모님께 미안하고 더 이상 공부만 할 수 없어 시험을 봐서 공무원이 된 자신을 원망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글쓴이는 밝지 않는 직원의 얼굴을 보고 ‘기분은 좋지 않겠지만 시험에 떨어진 수 천명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행복한 것 아니냐, 성실하게 일하며 밤이면 열심히 공부하여 다시 도전해보게’라고 말한다. 뒤이어 그 직원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우울한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불행할 일도 행복해진다며 정신 능력과 긍정의 힘을 기르라는 말로 마무리된 글이었다.
몸에 좋은 약이 쓰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하는 걸까? 모두 맞는 말인데 읽고 나니 쓰다. 신입 직원의 우울감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은 ‘이해’는 가나 누군들 행복하고 싶지 않아 그러겠는가? 글을 읽고 씁쓸해진 마음은 영화 러브레터 주인공의 “오갱끼데쓰까?”처럼 듣지 못할 그에게 외치고 싶었다. 그러는 당신은 행복하시나요?
행복은 무엇일까? 조금만 검색하면 행복에 관한 많은 글을 찾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왜 행복을 글로 쓰고. 정의하려 하고,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찾는 걸까? 추상적 개념인 ‘행복’을 일률적인 틀로 맞추어 놓고 나의 삶을 그 행복 틀 안에 어떻게든 맞추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된 것은 아닐까?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행복해져야 성공이라는 공식을 따르며 사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최근 읽은 양귀자의 소설 『모순』에서는, 쌍둥이이던 엄마와 이모가 나온다. 두 사람은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되는데 이모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부유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지만 삶의 단조로움에 질려하고, 오히려 술주정뱅이 아빠와 아들의 감방살이를 건사하기 위해 활력을 낼 수밖에 없는 엄마의 삶을 부러워한다. 소설 속 문학적 과장을 감안한다 해도 우리의 삶은 이렇듯 알 수 없는 모순이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모순 속에 모두 다르게 행복과 불행의 삶을 산다.
내 삶도 그렇다. 우리 집 아이가 셋이 되고 넷이 되자 주변 사람들은 모두가 약속한 듯 청약을 이야기했다. 다자녀 특공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새 아파트에 살 기회나 그로부터 오는 시세차익을 누리라고 한 마디씩 거들었다. 청약을 생각하지 않던 우리 부부를 이미 손에 쥔 최적의 기회를 놓친 것처럼 아쉬워하며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결혼의 시작부터 작지만 항상 내 집이 있었다. 아이만 많을 뿐 청약 특공 조건을 맞추기 위해서는 고민하고 감수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쉽게 말했다. 마치 내 삶이 자기 삶인 것처럼 지나친 애정으로. 물론 한때 치솟는 아파트값을 보며 지금처럼 살겠다는 내가 너무 순진한 것은 아닌지 고민도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지금 사는 집의 커다란 창문으로 산과 하늘을 보며 살기로 결정했다. 뭐 우리에게는 더 늦기 전에 도전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여전히 있다.
누가 감히 나의 행복을 왈가불가하는가? 나의 행복을 묻는 그대의 질문에 내 행복을 의심하며 작아지지 말고 오히려 당신은 행복한지 되묻고 싶다. 자신이 진정한 행복 속에 있다면 타인의 행복은 굳이 궁금할 틈이 없을 것 같은데. 내 행복 잣대는 나만의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잣대가 무엇인지 늘려보고 줄여보고 깎아보며 맞추어 가는 것이 살아가며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저 9급 공무원도 원하는 삶을 위해 힘차게 삿대질을 하고 있는 중인지 모른다. 그런 충고보다 우울한 표정의 그에게 말없이 커피 한 잔을 내밀어 보면 어땠을까 싶다?
행복을 대하는 글에서는 더 신중한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고 행복에 대해서는 훈계조나 교훈적이지 않도록 말이다. 왜냐하면 행복한 사람은 굳이 행복에 대한 글을 찾아보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사설을 읽고 울컥하는 마음에서 쓴 나의 글도 그렇지 않은지 조심스럽다. 나의 행복에 대해 타인의 지지와 토닥임은 스쳐 가는 손길로 나를 지지할 뿐, 각자의 행복 그릇은 본인의 만족과 공명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