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된 도자기 - 이수경
<번역된 도자기> 작품 이미지에서 처음 연상된 것은 “미쉐린 타이어” 마스코트와 영화 <고스터 버스터즈> 속에 나오는 귀여운 유령 캐릭터였다. 이 캐릭터들처럼 동글동글, 울룩불룩 비규칙적으로 튀어나온 작품 외관이 귀엽고 익살스러운 느낌이라 친근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작품의 소재와 작업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니, 처음 받았던 밝은 느낌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수많은 이음새와 도자기 조각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오랜 시간 애지중지 공들인 작품을 직접 깨는 도예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옛날에 봤던 도자기 장인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장인은 흙을 고르는 재료 손질부터 시작해서 매 공정마다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심지어 장작 가마 근처에서 며칠씩 잠도 줄이고 직접 불조절 하면서 완성품을 기다린다. 인고의 시간을 거쳐 어렵게 마주한 작품이지만, 장인의 눈에 미치지 못하거나 작은 흠이 발견된 작품이 대다수다. 결국 장인은 그런 도자기들을 가차 없이 망치로 깨부순다. 실패작에 대한 미련이 있거나, 그것에 안주해 버리면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다는 이유였다. 실패를 깔끔하게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한계를 미리 단정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는 모습, 꺾이지 않는 예술가의 집념을 부각했던 다큐멘터리였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를 봤을 때나 지금이나 나는 깨진 도자기에 더 마음이 쓰인다. 완전 무결한 ‘궁극의 도자기’라는 목표를 위해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정신은 그 자체로 박수받을 만한 일이지만, 단 하나의 기준으로 그 기준에서 벗어난 많은 도자기들을 골라내 순식간에 부수는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고 폭력적이었다. 우리나라처럼 획일적인 기준으로 진학, 취업, 재산까지 전 생애의 성공의 기준을 들이미는 분위기에 숨 막혀 본 경험 때문일까? 나는 도예가가 아닌 깨질 처지에 놓인 도자기에 감정이 이입되어서 도자기가 깨질 때 내가 깨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성공이라고 일컫는 것들 중에 순수하게 나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될까?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다양한 변수에 따라 결과에 영향을 미치고, 성공이라는 기준이 누구에게나 일정하거나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경험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가정과 학교 안에서 계속 주입받았던 ‘근면 성실한 노력을 통한 성공’의 메시지는 늘 강력하게 작동해서 실패의 원인을 나 자신, 한 개인의 탓으로 돌리게 한다. 그러면서 성공하지 못하면 곧 실패자, 나태한 사람, 심지어 무가치한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내면화시켰다. 더욱이 한 번의 판정으로 망치에 깨진 도자기처럼 우리 사회는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하지 않는 냉혹한 무한 경쟁 체제로 치닫고 있다. 이 과정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도자기 파편들처럼 묻혀서 사라진다. 우리 사회의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생률 수치는 이런 깨진 도자기들이 내는 조용한 아우성이지 않을까?
이렇게 깨진 도자기에 이입되어 상처받은 마음은 조각조각 이어주는 작가의 손길을 천천히 따라서 감상하다 보면 서서히 치료받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도자기 파편들을 이어 다시 도자기 형태로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는 비정형 형태를 띠고 있는 점은 파편이 된 조각들, 그것에 이입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다. 딱 떨어지는 절제와 균형만이 절대적인 미가 아니고 계속 끓고, 움직이는 것 같은 생동감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미의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면서 포기하지 말라고 응원하는 것 같다.
조각과 조각을 모아서 생기는 이음새들은 기존의 도자기 기준에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흠결이지만, 이수경 작가의 작품 속에서는 계속 쌓고 확장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레고 블록의 돌기 같은 역할이다. 레고 블록처럼 자유로운 상상의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했다. 더 이상 도자기 파편들은 장인이 무수히 실패한 작품의 한 조각이 아니라 작가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작품을 완성해 줄 기대감 가득한 레고 블록이 되는 것이다.
섬세하게 연결하고 장식한 조각들과 그것들이 모여서 구성된 커다란 전체 형상을 다시 바라보면 이음새 사이로 온기가 뿜어져 나올 것 같은 따뜻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세상의 기준에 상처받고 금이 갔던 내 자존감도 나만의 기준과 관점으로 천천히 보수하다 보면 오히려 상처받기 전보다 단단하고 굳건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건네주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