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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모 May 24. 2023

심야 맥주


깊은 밤 홀로 깨어 부엌으로 간다. 설거지 기계가 열심히 설거지를 끝내고 띠링ㅡ하고 종료를 알린다. 말끔하게 치워진 식탁 위 벽시계 소리가 유일한 소음이 되는 시간. 모든 가족이 잠든 이 시간. 세상의 워킹맘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간일 것이다.

직장에서 종종걸음을 치고 허겁지겁 귀가해 집안 뒷치닥거리를 하고 나면 하루는 순식간에 끝나버린다. 게다가 오늘은 갑작스레 연락이 온 친구를 만나기 위해 낮시간을 나노단위로 잘라 쓴 탓에 마치 하루가 연기같이 사라져버린 것 같다. 꼭 일은 한꺼번에 몰린다.


단 1분도 허투루 쓰지 않은 나를 위해, 오늘도 무탈하게 귀가한 가족의 내일을 위해, 분리 수거되지 못한 채 침전해버린 만남의 찌꺼기를 씻어내기 위해 차가운 맥주를 유리컵에 채운다. 말 걸 사람도 잔을 부딪칠 사람도 없지만 맥주는 기분 좋게 몽글몽글 유리컵을 황금색으로 물들인다. 넘칠 듯 차오르던 거품은 이내 공기와 닿으면서 ‘쓰으스스...’하고 가라앉는다. 적당히 가라앉은 거품은 입술을 촉촉하고 부드럽게 적시며 입안 가득 청량한 탄산을 쏟아붓고 목구멍을 알싸하게 지나가서는 뱃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앙금들을 토해내게 한다. 식탁 위에 다시 내려놓은 맥주잔 속에서는 다시 ‘쓰으으으...’하는 거품이 터지는 소리가 난다. 귀가 후 보낸 카톡에 친구는 답이 없었다.

 


친구의 딸은 우리 딸과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이다. 사는 동네가 달라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여러 번 같이 여행도 가고 모임도 했다. 이제는 훌쩍 커서 중학생들이 되어 관심 분야가 달라 같이 잘 놀지는 않지만 그래도 카톡도 하고 왕왕 연락을 한다.

우리 딸은 아직 엄마 품을 못 떠나는 아기같은데 반해 친구의 딸은 매사에 적극적이고 게임을 하면서 일본친구랑 이야기하려고 일본어 자격증을 따는 학구적인 아이라 내심 부럽기도 했다. 그런데 친구딸이 지난 주에 중간고사를 치면서 학교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친구의 딸 A는 그 일로 몹시 마음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친구는 딸 때문에 속상한 마음에 보자고 연락을 하고서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술도 한 잔 나누지 못했다.


A가 과학 시험을 칠 때였다. 마킹 실수로 종료 5분 전에 답안지 교체를 했는데 그것 때문에 감독 선생님이 징계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 학교는 종료 5분 전에는 답안지 교체를 해 주지 않는 게 규정인데 교체해주었고, 학생들이 그것을 부정행위라고 학생부에 신고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A 때문에 징계를 받게 되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A를 비난했다. 당연히 A는 학교에 있을 수 없어서 계속 조퇴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너무나도 화가 났다.

중학교 중간고사 따위가 무엇이라고 그렇게 속상해하고 경쟁하고 감시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같은 학생이면서 A를 비난한 아이들이 참으로 징그러웠고 감독 규칙도 모르고 징계를 받았을 리 없음에도 아이들을 겁주기 위해 거짓말을 한 그 교사의 인격이 의심스러웠으며, 답안지 교체를 굳이 시간 제한하는 이기적인 학교의 행태가 답답했다. 그 무엇보다도 어른이자 엄마인 친구가 A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더 억울했다.


이제 겨우 열 너댓 살. 한창 정신없고 말랑말랑한 아이들은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해가 떠서 달이 뜰 때까지 공부를 한다. 내 아이도 밤이 되어야 집에 오고 시험 기간엔 새벽 두 시까지 졸면서 책을 본다. 그렇게 해도 성적은 고만고만하다. 수학은 나보다 못한다. 서울에 사는 아이들은 이것보다 더한다. 나도 딸을 영어 캠프에 보내려고 등록하는 날 남편을 시켜 현금 수백만원을 들고 은행 앞에 줄을 세웠었다. 보통 10분이면 400명 정원이 다 차버린다. 재수생이 빠져나간 재수학원에서 하는 윈터스쿨에 가려고 몇 개월 전부터 예약도 한다. 지인의 아이는 초4부터 미국에 유학을 갔다. 강남에서 일하는 올케의 7살 난 아들은 한 달에 사교육비를 200만원씩 쓴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시험을 치기 위해 학교를 가고, 한국의 모든 학교는 무사히 시험을 치르기 위해 교사와 학생들을 쥐어짠다. 그러면 학원가에서는 호갱을 기다린다.



 이 아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배우며 자라는 것일까. 도대체 학교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는 것일까. 나는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도대체 이 나라의 어른들은 아이들이 자라 어떤 사람이 되길 바라는 걸까. 미래를 함부로 떠넘긴 주제에 무엇을 아이들에게 해 주고 있는지.


뽀얗고 노르스름한 거품이 유리잔 벽에 그물처럼 희미하게 남아있다. 친구가 오늘이 지난 시간에 답을 보내왔다. 학교 폭력으로 신고하겠다고 남편이 항의했더니 학교에서 아이들을 불러 지도한다고 했단다. 나라면 조금 더 강하게 대응했을 것 같았지만 ‘다행이네. 잘 마무리되면 맥주나 한잔하자’라고만 답했다.

발바닥에 자석이 붙은 듯 중력을 간신히 거스르며 일어나 잠든 딸아이를 보러 들어갔다. 오늘(사실은 어제) 중간고사를 끝낸 딸이 꼭 개구리처럼 엎어져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잠들어 있다. 한없이 뽀뽀해주고 싶은 아이의 얼굴에서 안경을 벗겨주고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아 주었다. 보물1호가 방전되면 안 되니까.

창문을 잠그려고 내다보니 맞은 편에 우람한 태산목이 수줍게 어둠에 기대어 봉우리를 올리고 있었다. 희미한 가로등보다, 뿌옇게 테두리가 뭉개진 달보다 더 하얗고 환하게 등을 올렸다. 성숙한 어둠이 봉우리를 격려하듯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어린 것들은 어른들이 소중하게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을 어둠도 아나 보다.

우리 딸은 나보다 키도 크고 발도 크고 손도 큰데 잠든 얼굴은 한없이 아가 같아서 집 앞에 피어있는 태산목의 하얀 봉오리 같다. 요 봉우리를 어떻게 지켜주어야 할까 정말로 궁금하다. 보들보들한 뺨에 뽀뽀를 하며 산다는 건 정말 힘이 드는 일인데 나는 또 어떻게 내일을 살아갈까 묻고 싶었다. 나는 제대로 된 어른일까 알 수 없다.


대답해 줄 이도 없이 혼자 잔을 비운다. ...쓰으으으...

이토록 투명하고 차가운 맥주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은 바로 이 거품스러지는 소리이리라.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 여자처럼 혼자 앉아 있는 나에게 맥주의 거품이 속삭인다. 쓰으....으. 고생해...쓰...으... 내일도 힘내...쑈..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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