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위에 그리는 '인간', '예술'
요즘 나를 가장 많이 찾아오는 말이다.
나는 사람이지만, 진정 '사람'이기를 가슴 깊이 염원하고 희망한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이유와 조건 하나만으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게는 너무나 불명확하고 어려우나, 결코 피할 수 없는 물음이다. 이 물음의 연장선은 ‘나의 예술’에 맞닿고야 만다. 인간과 예술은 떼어내려 안간힘을 다해도 뗄 수 없는 ‘자석의 양극’과 같은 것이다. 즉, ‘한 몸, 한 쌍’이라는 것이다. 이 둘 사이에 전류가 통하여 흐르고, 하나로 감응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에서 출발한, 인간의 마음에서 형성된 어떤 느낌과 온갖 생각들을 고스란히 받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예술'이다. 즉 나에게 예술이란, ‘심상(心想)의 심상(心象)’을 일컫는 다른 이름이다. 더불어 그 예술은 ‘소통’의 길 위에서 온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 존재, ‘나’라는 사람(人), 세상(世上), 생(生), 삶과 소통(疏通)”에 대해 묻는 것은 언제나 곧 '예(藝)'와 직결된다.
‘인간과 예술의 관계’와 각각의 ‘본질 혹은 의미’에 관한, 이 유구한 질문은 끝이 나지 않겠으나, 나 역시 '답'을 찾고 있지는 않다. 그 답은 이미 하나가 아닐뿐더러, 나는 답보다 ‘질문을 찾는 과정’ 위에서 사람다울 수 있다. 적어도 ‘나’라는 사람에게는 '끊임없는 반추와 나아감'만이 있을 뿐이라 생각한다. 위 질문의 연속에서 다다르게 될 종착지는, 나에게 ‘사람다운 삶’을 향한 방향을 논할 것이다. 아울러 ‘사람에 가장 가까운 예술’에 다가가는 한 자락 실마리를 맛보게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은, '단원 김홍도'라는 사람을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던 유일한 확신이다.
‘예인(藝人)’이라는 말을 곱씹고, 돌아보며 다짐한다. ‘무언가를 심는 사람이 되겠노라-’라고. 작은 가슴에 큼지막한 글씨로 ‘재(栽)’와 예(詣)’를 새겨놓았다. 그저 그렇게, 빠르게 흘러가는 오늘날의 세월 속에서 적당히 알맞게 부유하고, 구색을 맞춰 여행하고 싶지는 않다. 재능과 기예에 따라 한 시대를 흘러가는 사람이 아니라, 정성스레 모내기를 하듯 세상에 적어도 담박하게 ‘뜻깊은 한 뿌리’, ‘아름다운 줄기’를 박아 놓을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자 한다. 다소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렇게 ‘진심’을 다한 모습들은 고개를 숙여 ‘더 좋은 이삭’을 피워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좋은 이삭의 의미’를 함께 ‘음미’하고자 한다면, 나의 소박(素朴)하지만 절절(切切)한 ‘말’ 들을 따라 조금 더 걸어 들어와 주기를 간곡히 바란다. 논지의 끝까지 동행하고 같이 한 걸음 고민해준다면, 필자로서 너무나 감사할 것이다.) 물론 나는 삶의 끝에서 이삭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심(盡心)과 진심(眞心)”은 늘 그 자체로 아름답지 않은가.
직접 허리를 숙여, 애써 머리를 감싸 매며 고생스럽게 한 모씩 심어 내고 싶은 생각들, 형상들이 나에게는 있는 것이다. 팔딱팔딱 싱싱하게, 살아 꿈틀대며 숨 쉬는 생각과 관찰, 창작의 바탕은, 온전히 ‘진심’으로 채워지고 존재한다. 그 진심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스스로 의심하지 않는다면 최소한, ‘그날의 내가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다하겠지. 모를 심기 위해 내 안에서 싹을 꾸준히 길러낼 것이다. 충분히 가슴 뛰게, 제대로 살 수 있는 마음가짐을 나는 잊지 않는다.
때로 이 마음가짐에 자국과 얼룩이 남아 흐려지더라도, 어쩌면 ‘나’라는 사람에게 굳은살이 깊게 박이더라도 말이다. ‘미묘한 떨림’과 ‘잃는 것’은 두렵지 않을지언정, 혹 나에게로 돌아와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적거나 없되, 반드시 단단한 ‘나’를 세상에 심어 내고야 말 것이다.
이 점, 나 자신에게 있어 어떤 양보도 타협도 불가하다.
이제 나에게 남은 건, ‘무엇’을 심어낼 것인가, ‘어디에’ 이를 것인가에 관한 고찰이다.
앞서 말한 ‘진심’의 마음가짐 중심에, 나는 정확히 다음의 두 가지를 그릴 것이다.
하나는, ‘사람’. 또 다른 하나는, ‘사랑’이다.
나에게 예인(藝人)이란, 무릇 ‘세상의 흐름과 삶이라는 시간 위에 “생각하는 자신, 감각하는 자신”을 오롯이 담아내고, 두고두고 심어내는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느낌, 자신의 서사를 펼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오랜 예인들의 순간들이 이를 방증한다. 지금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나는 ‘자신만의 독특한 색과 유일무이한 언어’를 펼쳐내는 사람이 예술가라 믿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의 눈은, 그러한 방법론적인 결과와 형식보다 그 안에 내재하는 ‘심지’, 예인(藝人)의 근본적인 의미와 가치를 먼저 보고 있다. 예인의 독창성(獨創性)을 넘겨짚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여기되 그 독창성이 단지 맹목적으로 ‘독창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만’ 예술에 자리하지 않기를, 자칫 피상적인 틀에서 인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주의하는 마음이다.
‘예인은 누구일까. 누가 예인이 될까. 혹은 예인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나를 멈춰 세우고 고민스럽게 만드는 질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예인은, 남들과 다르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과정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이 고유한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가까이에 두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 세상과 사람들은 다양성 그 자체다.”라는 사실을 견지한다면, 예인으로서 나의 단단하고 성숙한 삶만이 아니라, 나아가 예술의 무한한 확장을 고대할 수 있다. 따라서 일차원적으로 막연히, 형식적으로 ‘다름’을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정 지금 ‘어떤 관점’에서 ‘어떠한 가치’를 갖고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예인으로서의 자세로 더욱 온당해 보인다. '다름'은 여기서부터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것이다. 즉, 외부에서 독창성을 쫓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언제나 ‘나’라는 사람의 중심으로 돌아가고 머무르고 나아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나’에서 비롯해 굳혀지는 일련의 흐름이 예(藝)이다. ‘나’라는 사람의 생각을 떠나지 않고 ‘나’라는 사람의 감각에 소홀하지 않는다면 고민의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나’로 부터 출발하여 나에게서 벗어나는 듯하다가도 나에게로 회귀한다. 그리고 나의 예(藝)를 다른 사람과 나누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누군가와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정처 없이 떠도는 예술과 예인에 대한 무거운 생각’을 여기저기 흩뿌리는 것보다 값질 것이다.
“지겨워 지칠 때까지 ‘나’를 보고, 크고 작은 나의 생각과 스쳐가는 이미지를 하나씩 관찰하자."
닳고 닳아도 빛을 잃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빛을 머금는 것이 ‘나’라는 존재이다. 꼼꼼하고 섬세하게, 아주 치밀하게. 그 모든 것을 간직하고 기억하다 보면, 거기에 '나만이 할 수 있는 예인(藝人)의 뜻'이 있다.
내가 현재 바라보고 있는 '삶의 의미'에 더없이 정직하고 당당하다면. 지향하는 가치인 ‘사람’과 ‘사랑’을 가슴에서 잃지만 않는다면, 적어도 예인으로서의 생애가 두렵지는 않다. 설령, 중간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나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내재하고 있는 것은 ‘사람과 사랑에 대한 솔직하고 순수한 나의 믿음’이다.
예인에 대한 생각과 자세를 전과 달리 갖게 된 것은, ‘인간 김홍도’를 만나면서부터이다. 문자와 그림을 통해서만 감각하고 상상해볼 수 있는 영원한 고전. 지금은 대면할 수 없는 사람, 그러나 가장 ‘사람과 가까이에 있는 화가’를 만났다. 내가 그에게 다가간 것이 아니라, 그의 그림과 인품이 시간을 초월하여 나에게로 뚜벅뚜벅 다가온 것이다. 걷잡을 수 없이 숨 가쁘게 나의 머리를 세게 울리며 감탄 어리게 마비시키기도 하며, 한없이 고아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편히 잠재우는 듯하다가, “멈춰서는 안 되노라.”하고 꾸짖음과 격려를 동시에 하는 것이다. 단원 김홍도와 그의 작품들을 보며 나는 어렴풋이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예술이 비롯하는 곳은 ‘사람’이며, ‘예술의 힘’이 곧 ‘사람의 힘’이다. 다시 그 역(逆)도 성립한다.”
예술은 ‘나’라는 사람, ‘당신’이라는 사람, ‘우리’라는 '삶을 말하고 꿈꾸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 내가 '심어낼 수 있는 것'의 종류와 양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지만, 그중에서도 무엇을 심어낼 것인지 ‘나의 선택’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아니, 어쩌면 ‘무엇’이라는 구체적 대상에 앞서는 ‘선결적 요소’가 있지는 않은가. 나에게는 ‘행(行)함’보다 언제나 나를 ‘행하게 하는 의식과 원동력’이 훨씬 중요한 것이다. 결국 현재 '무엇'을 심을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질문보다, ‘어떻게’ ‘왜’ 심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첫째로 던져져야 함에 틀림없다.
화선(畵仙) 김홍도의 생애, 일상,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위대한 작품들, 그 앞에 먼저 놓여 있는 ‘사람’이 보였다. 신선이기 전에 그 사람은, 참으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삶을 향해 따뜻한 정(情)을 근본에 두고, 애(愛)를 뜻으로 품고 있는 존재임을, 나는 감각할 수 있었다. 맑은 운치, 담박하기 그지없는 청초한 선들, 발묵의 청아함은 그 사람의 격으로부터 자연히 우러나오는 듯하다.
그림은 정직하다.
그리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꾸밈없이 받아들인다.
김홍도 그림의 진정성은 항상 ‘삶’과 멀어지지 않은 데에 있다.
그의 작품, <삼공 불환도(三 公不換圖)>, <화성능행도 8폭 병>에 그려진 수많은 작은 인물들, 변화의 풍경들을 면밀히 뜯어본 사람이라면, 그 ‘다채로움의 사실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다름이 공존을 허용한다. 다르면 다를수록, 세상은 더욱 아름답고 특별하다. 그래서 재미있다.”
그의 한 작품에 빠져들다 보면 세상이 정말 다채롭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저절로 찾아온다. <단원풍속도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히 숨이 턱 막힌다. 어떻게 이토록 사람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기운생동(氣韻生動)”하는 그림이다. 몇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 저잣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땡볕 아래에서 고생하며 노동하는 사람들의 짜증과 한숨 섞인 볼멘소리까지 나에게 들려올 수 있는지 경이로울 뿐이다. 심각한 표정, 곤혹스러운 표정, 즐겁고 편안한 표정들에 “말풍선”까지 띄우고 있다. 나는 말풍선에 인물들의 대화까지 상상하며 즐거운 시간여행을 다녀온다. 이 여행이 가능한 것은, 화면 내 ‘화가의 생략과 강조’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조절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풍경에 함께 있는 듯한 느낌, 조화로움을 선물하기 때문이리라.
그의 작품에서 ‘숨이 막힌다’는 또 다른 의미는, ‘사실성’의 맥락 위에 놓인다. 극사실적인 ‘사진’과 같은 묘사력에 대한 감탄이 아니다. 빽빽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발려진 물감과 화면 위에 가득 들어찬 조형에서 느낄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감수성’이다. 그의 힘 있고 간결한 필선에서 ‘인간미’가 느껴지고, ‘빼고 더할 것이 없는 여유’와 ‘대상에 대한 애정’이 한아름 묻어난다.
“여백과 함께하는 특유의 정서, 인간의 생에 담긴 정서적 사실감”은 단지 시각 형상의 표면만을 재현해내는 현대의 하이퍼 리얼리즘 작품과는 결이 다른 것이다. 즉, 김홍도의 작품은 ‘화가의 눈을 거친 해석의 사실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김홍도의 그림은 오래 볼수록 보이는 것이 참 많은 작품이다. 등장인물들의 역동적인 스토리텔링이 펼쳐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 사람의 심리, 적막하고 고요한 분위기’까지 한 폭에 자아낸다. 무엇보다 “따뜻한 풍성함”,“절제된 온화함”이 자꾸만 나의 시선을 그의 화폭 안에 머물게 한다. 그는 단지 성격이 꼼꼼하고 인내심이 강한 성품 덕에, 그리 웅장한 화폭에도 ‘깨알 같은 인물들의 표정과 행동’을 하나하나 다르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일까. 동일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움직임, 복합적이고 순간적인 감정의 향연을 저리도 명확하지만 간결한 포인트로 잡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손재주 덕분인가.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화원으로서 숙련되거나 뛰어난 기예와 재능으로부터 펼쳐지는 묘사 능력과 섬세한 성격에서 가능한 것, 그 이상 ‘화가의 눈(目)과 관심’이라 보아야 한다. 나아가 ‘사람의 기본 성정에서 비롯한 시각’으로 ‘마음에 달린 것’이라 볼 수 있다.
그의 눈은 시대의 많은 것을 담아내었다. 김홍도 그는, 산수, 인물, 화조 등 방대한 대상들을 아우르며 ‘자신의 눈’으로 보았고 ‘자신만의 조형, 정서와 리듬’으로 관찰했다. 그의 눈(目)은 어떤 눈이었을까. 나는 화가의 ‘손’보다 ‘눈’, 그 눈에 그 사람의 요체와 예술 -생각, 의식, 정신, 신념, 가치와 의미- 등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 만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의 ‘시각’에서, ‘예술’이 탄생하고 존재할 수 있으며 한 인간의 모습을 비추어 살펴볼 수 있다. “눈이 곧 그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단원 김홍도의 눈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다. 이토록 따뜻하고 풍요로운 눈으로부터 희대의 걸작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랑으로 아득한 그의 눈을 가까이서, 오래도록 응시하고 싶다. 나는 그와 영혼을 공유하고 싶다.
모든 붓질에 녹아 깃들어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는 그의 호흡과 나의 호흡을 섞고 맞추고 싶다.
그가 두 눈동자에 담아내던 사람들의 따스한 숨과 정겨운 생을 함께 느끼고 싶다.
그리고 질문하고 싶다.
그림을 그리는 ‘당신의 마음(心)’을 말이다.
말씀이 없으신 당신의 마음으로 나는 한없이 걸어 들어가...
‘아름다움’의 의미, ‘회화의 미(美)’에 대한 생각을 여쭤보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그가 ‘일인 명일대(一人鳴一代)’, 한 시대를 울리고 갈 수 있던 근본적인 힘은,
‘그림 자체를 향한 진심 어린 마음’과 ‘세상을 향한 소통과 사랑’에 있다.
그는 화선(畫仙)이었지만 사람들의 삶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人’에 가까운 신선이더라.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세상을 꾸밈없이 감각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순수하게 그림을 바라볼 수 있던 그의 저력’이 아닐까.
나는 단원 김홍도, 그의 ‘눈과 귀’가 너무나 아름다워 언제나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겠다. 떨리는 가슴과 미세한 전율을 부여잡고, 오늘도 그의 화폭을 마주한다.
예술은 소통으로 단단해진다. 나는 그의 그림과 숨을 쉬듯 소통을 다한다. 그렇게 그림은 '화가와 보는 이의 대화'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는 것'이다. 나의 그림은 세상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단원 김홍도와는 또 다른 ‘숨의 결’을 멋지게 풀어낼 수 있을까. "사람과 통하고 세상과 통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김홍도의 언어는 자꾸만 내 모든 것을 내려놓게 만든다. 나를 성찰하게 한다."
그림은 ‘나’를 담아내는 투명한 그릇이고, 그림은 ‘나’와 다름이 아니다.
너무나 솔직한 거울과 같은 존재이다. 그림은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나는 그런 그림을 사랑해 오고,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그림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다 할 것이다. 나의 생을 바쳐 화폭을 심고 떠날 것이다.
고백하건대, ‘사람과 사랑’을 심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나는 화가이기 전에,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림의 세계란 곧 화가의 의식과 시각의 세계이다.” 사람들을 소홀히 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첨예하고 면밀한 관찰을 이룬, 김홍도의 의식과 시각. 그것의 본질은 ‘세상에 대한 사랑’, ‘인간애’가 아닐까. 화폭에 자리한 따스한 정서, 다양성과 작은 일상들을 견지하는 그의 꼼꼼함은 넉넉한 인품(人品), 아름다운 성정(性情)에서 출발한 것이다.
“예술가는 예술가이기 전에 사람이다.” 한 사람으로 삶을 살아갈 때 가질 수 있는 바람직한 마음과 올곧음은 무엇일까. 그 마음과 깨달음이 먼저 나에게 설 때야 비로소, 바로 그 지점에서 나의 회화는 시작되는 것이다. “사람의 생과 사랑에 뿌리를 둔 이미지가 환해졌다.”
문득 어느 순간에, 오래도록 그림과 함께 나아가려면 ‘사람’의 가치만큼 내 심지에 굳건히 자리할 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스친다. '화가'라는 이름을 당장 왼쪽 가슴에 달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이면의 ‘사람’이라는 본질과 인격적 소양에 대한 ‘성찰’이고, 사람들과 더불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자 진심이 담긴 인품, ‘내면의 눈’을 갖추는 것이다. 결국 ‘나’라는 사람만이 심어낼 수 있는 ‘사랑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 인(人)’위에 온전히 설 수 있는 것이다.
단원 김홍도, 그가 나에게 남기고 간 것은 ‘사람 人’ 한 자였다.
폭풍처럼 광활하고 한없이 고요하게 다가와, 소리 없이 그윽한 향만 남기고 떠난 바로 그 자리에.
사람을 안고, 저 멀리 하늘로 비상하여, 영원한 신선이 된 그의 자취에,
“人이 愛의 모습을 하고 남았다.”
그리고 그가 스미고 간 자리에, 조금은 맑아지고 단단해진 내가 서 있다.
우두커니 빈 눈으로 공허한 허공을 쳐다보며, 무엇인가를 바쁘게 쫓는 마음에서 자유로워졌다.
이 여유에, 나는 나를 다음과 같이 다시 세워본다.
‘사랑받는 화가,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사람들 가까이에 있는 화가’가 되기를 소망한다.
‘사랑’을 심어 내고(栽), ‘사람’에 이를 것(詣)이다. 그것이 “나의 예술”이다.
가장 낮은 생각이, 가장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다고 하였는가.
단언컨대, 그것이 내게는 ‘사람(人)과 사랑(愛)’이다.
이것은 ‘삶의 지혜이며, 어우름의 미학’이다.
‘총체적인 에너지이고, 마르지 않는 샘’이다.
이 두 가지를 견지하는 ‘나’는, 넓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진심(盡心, 眞心) 위에 존재한다.
'진정한 藝人'의 모습에 다가간다.
"내 사랑의 온도는 식지 않고,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다.
사랑하는 것보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울 때까지-
'그림'에 대한 사랑, '당신'에 대한 사랑, '자연과 세상'에 대한 사랑.
이 모든 것을 움직이는, ‘나’에 대한 사랑까지."
-“‘나’라는 사람의 책 속, ‘오늘의 페이지’를 열면,
그 안에 당신이 요약할 수 있는 것이 어렵지 않게 ‘사람’과 ‘사랑’이라는 두 단어이기를.
좋은 이삭이기를.
나는 간절히 꿈꾸며, 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