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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자수 Oct 22. 2023

만인의 어머니

학교에 근무하면서 내겐 '별당 아씨' 외에 또 다른 별명이 있었다. 이번에는 조금 묵직한 '만인의 어머니', 마더.


교감 선생님께선 '만인의 어머니가 아프면 안 되지? 이렇게 많은 아이를 돌보려면... 힘내!'라고 말씀하시며 하얀 이를 드러내시며 미소 지으셨다. 좋은 소리도 계속 들으면 지겨운데 매일 같이 힘들다는 말, 우울한 이야기 들으면 되레 선생님이 힘들지 않냐고 안쓰러워하시면서 파이팅 손인사를 잊지 않으셨다.     


'만인의 어머니'라니...  

이제 갓 커가는 내 아이에게도 좋은 엄마가 되어주지 못해 헤매는데 이렇게 많은 학생이 학교에서 나를 '엄마'로 삼는다니... 가당치도 않는 일이라 여겼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에서 엄마로서의 사명감이 단단히 생기기 시작했다. 실제로 하나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물리적인 '엄마'가 존재하지 않는 아이도, '엄마'가 있지만 엄마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엄마'로 인해 상처받는 아이들이 참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인의 어머니'란 별명은 내가 추구하는 이론적 오리엔테이션과도 닮아 있었다. 세상에는 천 가지 이상의 상담이론이 있다. 그중 개인적으로 '애착 이론, 대상관계 이론'을 좋아한다. 애착 이론과 대상관계에서는 '사람은 관계적 욕구를 지닌 채 태어나 평생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고 본다. 그중 아기에게 가장 중요한 대상이자, 전 생애의 관계의 기반이 되는 대상은 양육자(부모)라고 볼 수 있다.      


생애 첫 시기에 아기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로(먹는 것도, 싸는 것도 혼자서 처리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롯이 부모와 나만의 세상에서 아이는 전적으로 부모를 의지한다. 만약, 양육자(부모)가 아이의 신호와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면 아이는 세상이 안전한 곳이구나 생각하고 세상으로 탐험해나간다. 하지만 양육자(부모)가 자기만의 어려움과 상처에 빠져 아이와 조율하는 관계 경험을 할 수 없다면 아이는 세상을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어떤 이유가 됐든, 세상에는 생애 초기 받은 상처를 간직한 이들이 많다. 따라서 애착 이론과 대상관계에서 치료의 핵심은 치료자의 재 양육이다. 전문상담교사로서, 학생들의 '만인의 어머니'로서 해야 할 일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세상이 두려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주저앉은 아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고, 그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 여느 엄마처럼 때론 기다려주고 위로하고 공감하는 것. 함께 아파하고 울어주는 것. 이제 세상이 궁금해진다면, 상담실 밖의 세상으로 나갈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 이것이 내가 상담을 통해 해야 할 일이라 여긴다.


아이는 자기만의 도토리 시간을 갖고 도토리에서 조금씩 깨어날 준비를 한다.      

허나 세상이 참 녹록지만은 않다. 이제껏 해보지 못한 일에 또다시 넘어질 때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아이는 다시 달려와 엄마에게 위로받을 수 있으니까. 엄마의 눈을 바라보고 한번 꼭 안긴 후, 다시 재충전하면 되니까. 안전기지인 상담교사인 나와 굳건하고도 안전한 관계를 베이스 캠프 삼아 재충전한 후 다시 또 세상밖으로의 탐험으로 나아가면 되니까.     


어린 시절 엄마 품에서 자라지 못한 아이, 수없이 많은 곳을 전전하며 외롭게 살았던 아이, 친구관계가 쉽지 않아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았던 아이, 외롭게 견딘 긴긴밤을 잊을 수 없는 아이...

아이들이 저마다의 사연으로 나를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나의 눈빛조차 마주할 수 없었던 아이들이 조금씩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본다. 우리가 마주한 눈빛에는 삶의 희망이 담겨 있다 믿는다.     







"치료자의 역할은 엄마가 아이에게 세상을 탐색해 나갈 수 있도록 안전 기지(Base Camp)를 제공하는 것과 유사하다(Bowlby, 1988)"


"좋은 치료자가 환자에게 하는 것은 양육을 잘하는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것과 유사하다(Holmes, 2001)"


"공통요인상담(Plain Old Therapy)란 수천 년간 인류를 생존하게 만든 평범한 돌봄을 제공하는 관계들이 현대 사회에서는 전문적 돌봄을 제공하는 관계들로 변화된 것이다(Allen,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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