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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nverselow Mar 11. 2021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외이도염이다. 작년 10월에 처음 치료받기 시작했으니 네달 동안 벌써 두번이나 재발한 셈이다. 잊을 만하면 자꾸 고개를 드는 것으로 보아 염증의 뿌리가 꽤나 깊은 모양이다.


  염증의 원인은 강의를 들으려고 낀 이어폰이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1년 내내 모든 강의가 비대면으로 진행되었는데, 집중을 잘하지 못해 짧은 강의는 길게, 긴 강의는 더 길게 늘여서 듣는 나쁜 버릇이 있었던 나는 이어폰을 거의 하루종일 끼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어 여름이 되고 날씨가 습해지면서 이어폰에 시달리던 귀에서 묘한 간지러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귀에 여러 번 손을 댔더니 진물같은 것이 나왔다. 사실 이때부터 약간의 불안감이 느껴졌지만 나는 애써 별일 아닐 것이라고 믿으며 꿋꿋이 병원에 가지 않고 있었다.


  버티던 내가 결국 병원에 가게 된 것은 귀가 먹먹하고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외이도염이라고 했다. (꽤나 고통스러웠지만) 귓속에 약을 바르고 항생제를 먹으니 상태가 빠르게 호전되었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싶었다.


  예상과는 달리 나는 한달쯤 뒤에 다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다 나았다는 생각에 방심해서 또 전처럼 귀에 손을 대고 이어폰을 오래 꼈더니 외이도염이 금세 재발한 것이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선생님이 "또 귀에 손댔죠?"라고 꾸지람을 하실 정도였으니 손을 많이 대긴 했던 것 같다. 저번과 똑같이 귓속에 약을 바르고 항생제를 먹었다. 이번에는 귀에 넣는 물약도 받아서 매일 한번씩 넣어줬다. 그러자 예전처럼 증세가 금방 호전되었고 나는 또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세달이 더 지난 지금, 나는 다시 이비인후과에 다니고 있다. 의사선생님 말씀을 듣고 귀에 손도 안 댔고 이어폰도 안 꼈지만 이번에는 다른 게 문제였다. 저번에 치료받을 당시에 의사선생님이 귓속에 약을 여러 번 더 발라야 하니 병원에 몇 번 더 오라고 하셨었는데 이 말을 듣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염증은 언제든지 재발할 가능성이 있는 모양이다. 최근에는 거의 매일 약을 바르고 먹는 약을 받으러 병원에 다니는 중이다. 여전히 귀찮고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이번에 기필코 뿌리를 뽑고 다시는 이 문제로 병원 신세를 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꾹 참고 매일같이 출근도장을 찍고 있다.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는 문제들도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 넘어가면 지긋지긋한 염증과 같이 언젠가는 우리 앞에 리스폰(respawn)된다. 히어로 영화에서 주인공이 동정심 때문에 악당을 살려주면 그 악당이 영화 후반부에서 재등장해 주인공을 못살게 구는 것과 똑같다. 염증이든 영화 속 악당이든 우리가 맞닥뜨리는 문제든 간에, 그 심각성이 0부터 10까지의 숫자로 표현된다고 하면 그 정도가 겨우 1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0이 아닌 이상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다시 10을 향해 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0으로 이행할 가능성이 없는 완전무결한 0을 만들어내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깔끔한 마무리가 필수적이다. "다음에 이 문제를 다시 일으키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어떤 문제를 해결했다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요컨대 나는 치료가 끝난 뒤에도 귀에 손을 대지 말았어야 했고, 이어폰을 끼지 말았어야 했고, 의사선생님 말씀을 듣고 약을 바르러 병원에 갔어야 했다. 오답노트를 제대로 쓰지 않으면 똑같은 문제를 다시 틀리게 된다는 사실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걸 병원 신세를 여러 번 진 뒤에야 몸으로 깨달았으니 난 어쩌면 생각보다 더한 헛똑똑이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마무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문제를 초기에 해결하는 것이다.


  상처가 다 곪아터진 뒤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는 것은 상처가 아직 조그마할 때 후시딘을 바르는 것과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비효율적이다. 나는 아직까지도 진작에 병원에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귀에서 처음으로 뭔가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 바로 병원으로 뛰어갔어야 했는데. 그때 별일 아닐 거라며 덮어두지만 않았어도 염증이 이렇게 심각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이렇게 쉽게 재발할 정도로 뿌리가 깊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병원에 이렇게까지 자주 갈 일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때 병원에 가지 않은  순전히 무서워서였다. 먹는 약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닌  같다는 불길한 확신이 들었는데, 귀를 치료받아본 적은 없었기에 얼마나 아플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아프기 싫어서 그냥 그렇게 무작정 몸의 자연치유 기능을 믿어보기로  것이었는데 일을 키우는 결과만 낳았다. 이처럼 비겁함은 문제를 해결하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핑계를 대며 문제를 해결하는 시점을 늦추는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할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시간은 문제가  시간이기도 하다 점을 유념해야 한다.  시간 동안 문제는 우리를 얼마나  골치 아프게 만들  있을지 고민해 온다. 치료를 받아도 받아도 떨쳐낼  없는 염증처럼 말이다.


  어떤 문제를 초기에 짚고 넘어가는 것은 상당한 결단력을 필요로 한다. 본능적인 비겁함에서 나오는 별일 아닐 거라는 속삭임을 필사적으로 눌러야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까닭이다. 내가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지금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나중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 보도록 하자. 수학 문제를 풀다가 발견한 계산 실수를 고치지 않고 넘어가면 언젠가는 풀이과정을 모두 지워버리고 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풀어야만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방금 발견한 오타를 바로 수정하지 않으면 나중에 몇십 쪽 짜리 보고서를 정독하며 오타를 찾아 헤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계산 실수와 오타는 발견하자마자 고치는 게 낫고 병원은 아프기 시작할 때 가는 게 낫다.


  어차피 맞아야 한다면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은 것처럼. 정말이지 옛말에 틀린 말 하나 없는 것 같다. 이 말 한 마디를 하겠다고 참 길게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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