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태어난다
신기한 일이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태어난다. 아빠를 보내고 결혼식을 올리고, 아이를 가졌다. 임신을 하면 마냥 기쁠 줄 알았는데…. 둘 다 생각이 많았다. 책임감이라는 막중한 무게가 우리를 짓눌렀다. 아이를 가졌다는 기쁨보다는 우리 앞에 있는 현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 부부는 임신을 확인하고 일주일은 멍하게 보냈던 것 같다.
우리는 계획보다 아이를 일찍 가지게 됐다. 시어머니는 우리의 나이를 걱정하셨다. 결혼식을 올린 이후부터 내게 매일같이 전화를 해서 아이를 빨리 가지라는 얘기를 하셨다. “어젯밤에 무 캐는 꿈을 꿨는데 아들 꿈이다”며 “소식이 없냐" 혹은 "네가 혹시 문제가 있는 거 아니니" 하며 "한의원에서 한약이라도 해 먹으라 "는 애기도 하셨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어머니의 걱정 섞인 말이 불편하면서도 '혹시 불임이면 어쩌지' 생각이 많아졌다. 그렇게 결혼식을 올린 지 몇 달 만에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이다. 남편도 나도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보다 먼저 퇴근한 나는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뭔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확인을 해보니 속옷이 피에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먼저 임신을 한 동서가 임신 초기 속옷에 피가 비쳤는데 출근을 했다가 유산을 한 경험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피가 비치면 바로 병원을 가보라는 동서의 말이 생각이 났다. 택시를 타고 집에서 가까운 삼성병원 응급실로 가달라고 했다. 아이를 잃을까 두려웠다. 아이를 가지고 기뻐하지 못했던 마음이 죄책감처럼 밀려왔다.
아이를 잃었을까 봐 눈물을 흘리며 응급실에 앉아 있었다. 그날따라 환자가 많았다. 북악 스카이웨이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자동차와 접촉 사고가 나거나 여러 대 차가 추돌하는 등 교통 사고 환자가 많았다. 병상에 자리는 없었고 좁은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피는 계속 흘렀다. 몇 시간을 기다려 어렵게 당직 의사를 만나 검사를 했다. 초음파 상으로 아이가 보이기는 하지만 자궁에 피가 고여 있는 게 불안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임신 초기에는 유산되는 경우가 많으니 당분간 누워서 지내는 게 좋겠다고 했다. 어떻게든 아이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 순간 아이와 나는 강하게 연결됐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임신 기간이 좋았다고 한다. 물론, 임신하는 동안 겪는 여러 가지 신체적 변화에 마냥 편했다는 사람은 없다. 나 역시 입덧, 부종, 불면증 등 임신 기간이 쉬웠던 건 아니다. 다시 하겠냐고 하면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내 배 속에 작은 생명이 움직이고 발로 차던 그 느낌이 참 좋았다. 희망, 기대, 궁금함… 이런 단어로 가득할 때였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좋은 이야기만 들려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절로 생기던 시간이었다.
정작 태몽은 친정 엄마가 꿨다. 아빠가 하염없이 펼쳐진 꽃밭에서 꽃을 한 송이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기뻐하고 있었다 한다. 우리 아이는 아빠가 보내 준 선물이었을까.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콧노래를 부르며 기뻐하셨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