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 좋음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가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 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가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천상병, 나무-
아침 해가 떠오르자 옥상 가장자리를 둘러선 나무들 사이로 새들이 지저귄다. 밥 달라고 아둥대며 고개를 내민 눈도 못 뜬 새끼들에게 어미새는 먹은 것을 게워내 골고루 나눠주고는 또 다른 사냥을 위해 힘찬 날갯짓을 한다. 퍼드득.
얼어붙었던 땅이 녹기 시작한다. 겨우내 갇혀있던 생명의 숨결이 비로소 호흡을 하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땅을 갈아엎어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 옥상의 땅은 두 손과 두발로 직접 솎아줘야 한다. 가차 없는 쟁기질에 이마의 땀방울이 땅으로 뚝뚝 떨어진다.
갖은 채소와 여러 종류의 꽃씨를 뿌린다. ‘무럭무럭 자라나거라’ 기도하는 마음으로 물을 주며. 따듯한 바람이 불어온다. 낮이고 밤이고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며 고요한 땅을 바라본다. 비가 내리고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흙표면은 꿈틀대며 싹을 틔운다. 쪼그려 앉아 갓난아기의 볼따구 같은 새싹들을 바라본다. 옅은 초록의 나뭇잎이 듬성듬성 나뭇가지에 자리를 잡았다. 마음의 공간에 무엇인가 차오르고 있다.
한낮 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 자리 잡은 나무 아래 넓은 그늘이 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 방수페인트같이 짙은 초록색 나뭇잎이 나무를 가득 채웠다.
간이 의자를 펴고 그늘 밑에 앉아 얼음물에 담가 놓은 캔맥주를 딴다. 친구들을 불러 삼겹살을 구워야겠다. 목 뒤로 흐르는 땀을 닦고 맥주를 마시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다. 제법 꼴을 갖춘 야채와 발광하는 붉은 꽃잎에 물을 흠뻑 준다. 실컷 마셔라. 오늘도 태양을 견디느라 수고가 많았구나. 마셔라. 모르는 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온다. 나무가 노래를 부르고 길게 자란 잡초들도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
수확의 시기다. 형형색색의 열매와 커다란 채소를 조심스럽게 따 바구니에 넣는다. 친구들과 옆집 할머니에게 나눠주고도 남을 충분한 양이다.
시원한 저녁, 얇은 외투를 걸치고 옥상 주변을 조용히 걸어 본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꽃이 시들고 나뭇잎이 꽃의 빼앗긴 꿈을 대신할 것이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와 바짓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부르르 떤다. 어둠의 이른 방문이 잦아지면 숨결 같은 바람에도 나뭇잎들은 바닥을 향한 비행을 한다. 새끼들이 떠난 둥지가 맨살을 드러낸다. 겨울비가 내린다. 그리고 곧 첫눈이 내린다. 흙 위로 하얗게 쌓인 눈을 차마 밟을 수 없어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기새들과 함께 돌아올 봄을 기다린다.
오늘은 껴입은 외투가 무안하게 날이 따습다. 핸드폰을 꺼내 미세먼지 정보를 확인해 본다. 좋음. 묵은 숙취가 싹 씻긴다. 초록색 방수페인트가 칠해진 옥상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며 생각해 본다. 이 옥상에 커다란 나무가 자라고, 흙이 있어 생명이 자랄 수 있다면.
아파트 베란다에 가득한 화초에 물을 주며 오늘도 ‘흙 밟고 땅을 일구며 살고 싶어라’ 노래를 부르고 있을 엄마를 위해.